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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정인수 |2013.05.19 08:23
조회 91 |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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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겪은 5. 18  광주 (5월 소년에 비친 그날의 광주)

 

 

여기는 1980.  5. 18, 늦은오후, 전남 광주시  계림동 시청부근 뒷 골목 어느 한모퉁이,  집 대문밖을 나서니,  저쪽 골목사거리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일인가 궁금해서 그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순간, 반대편에서는 생전 처음보는 날카로운 전투모를 쓴 2명의 계엄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날렵한  군인들은 모여있는 군중들속에서 젊은 청년 한사람을 발견해내고는,  바로 그사람에게 시선이 꽂였다.

 

몇초였던가 !  그 짧은 순간의 무언의 눈빛교환,  그것도 잠시, 대학생 나이지만 대학생은 아닌거 같은 그 젊은 청년은, 이내 겁을 집어먹고 냅다 내달리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소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한손에는 곤봉을 휘두르며 살기어린 눈빛을 띤채, 그 청년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쫒아가고 있었다. 이유를 알수없는 죽음의 추격전이었다.

 

극한 상황이 닥치면 초능력이라도 생기는걸까 . 광주시청 담을 옆에끼고 젊은 청년은 온힘을 다하여 도망가는데, 목숨을 걸고 달리는지라, 계엄군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자 계엄군은, 곤봉은 왼손에 옮겨잡고, 오른손으로는 갑자기 단도를 뽑아들고 도망가는 젊은 청년을 향해  휘익 내던졌다. 단도는 청년의 등뒤 불과 1m쯤 남겨두고 땅에 떨어졌다. 

 

오 !  신이시여 ~ . 그렇게 해서 하나의 생명체는 살아서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어린 소년이었던, 내 눈앞에서 벌어진 최초의 5. 18 목격상황이었고, 충격 그 자체였다.

 

그날 저녁이 다가올 무렵, 대학생이던 형과 사촌형,고향동네 형친구,  도합 3명은 계엄군에게 쫒기며 허겁지겁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완죤 겁에 질린 넋나간 표정들이었다. 친형은 집안 오른쪽 모퉁이쪽의 방에 숨었고, 나머지 2명의 형들은 뒷담을 넘어 이웃집을 경유해 빠져 도망나갔다.

 

좀 있으려니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계엄군 1명이 안마루 앞에 서서, 방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향해 대뜸 " 아들 내놓으쇼 ! 라며, 낮고 굵은 목소리로 살기있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 여긴 대학생 없는데요 ! " 라고 하니까, 계엄군은 " 게노무시키들 !  분명히 이리로 들어왔는데 "  라고 중얼거리면서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편, 반찬거리를 사러 가까운 계림시장에 갔다가, 집에 들어오신 어머니는, 집 바깥대문(이중대문)앞에 이르러 얼굴이 멍하니 굳어버렸다.

 

대문앞에 계엄군 1명이 떡하니 경계총을 한채 서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인 아들이 있는데 무슨일일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근심가득찬 발걸음으로 안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에서는 또다른 계엄군 1명이 분주히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들어오자, 혼자 뭔가 못마땅하다는듯 투덜투덜 중얼거리며 대문밖으로 나갔다. 

 

집안을 둘러보던 어머니는 오른쪽 모퉁이의 방문을 열어보고는 아연 실색했다. 거기에는 대학생인 아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숨어있었던것이다,

 

하늘이 도와서인지, 계엄군이 집안 왼쪽모퉁이는 둘러봤는데, 오른쪽은 둘러보지않아서, 용케 살아남아 천만다행이었다.

 

후일, 왜 다른형들하고 같이 뒷담을 넘어 도망가지 않았느냐는 말에, 같이 도망가다가는 세사람 모두 다 죽을것같아서 그랬더란다. 참 말문이 막힌다. 아마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도와서 살았을거라고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렸다.

 

이튿날 아침일찍, 전북 고창에 계시는  큰아버지가 택시를 대절해 와서 형과친구들, 세사람 모두 고창 시골로 빼돌렸다. 그러고 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시외곽은 모두 전면봉쇄됐다.

 

그 광란스런 인간사냥의 폭풍이 절정이던, 5월18일 오후가 지나가고 저녁이 되자, 광주시내 곳곳은 주로, 도청, MBC방송국, 대인동 시외버스터미널, 광주역등을 중심으로, 시위하는 사람들과 계엄군간에 밀리고 미는 접전이 저녁내내 계속되고 있었다.

 

흑백TV를 켰다. TV속의 풍경은 완전히 딴세상이다. 지금 광주는 사느냐 죽느냐 그야말로 생과사의 갈림길인데 - - . 그 우울한 소식은 어디 한군데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소위 말하는 폭도(?)들 기사만 간혹 존재할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답답한 나머지, 집바깥으로 나섰다.

 

시내가 온통 매캐한 연기냄새와 최루탄 가스로 가득차있다. 나는 호기심에 시위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광주역을 향해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에서 " 따다당 따당 따다다다당" 하는  연발 최루탄 발사소리와 함께 한무리의 시위대들이 계엄군에 쫒겨 몰려오고 있었다.

 

나도 덜컥 겁이 나 시위대를 따라 같이 도망간다. 한참 도망가다가 이번에는 시위대들이 광주역쪽으로 재차 우르르 몰려간다. 나도 또한, 같이 이에 휩쓸린다. 광주역을 타겟으로 삼아, 밀리고 미는 공방전이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거의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자 , 내가 잘못됐을까 하는 걱정에, 집안은 온통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두번 다시 나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나이에 뭘 안다고 그렇게 밤거리를 헤메이며 쏘다녔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 그때의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울분에 찬 동병상련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한 이틀을  집에서 두문불출하던 나는. 5월 21일경에 다시 길거리로 나섰다. 뭔가 가슴을 꽉 쥐어누르는듯한, 답답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휘감아 돌고 있었다. 나는 집회가 있다는 도청앞 금남로를 향하여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미 도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있었는데, 모두 5월18일에 있었던, 같은 국민으로서, 그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국군이, 또한 인간애적인 면에서 보아도, 말도 안되는 무자비한 진압광경을, 공포스런 눈으로 지켜보다가,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하나둘씩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된것이다.

 

사실 이때쯤부터는, 시위군중의 대부분이 학생들로부터 시민들로 바뀌어진다.  계엄군은 늘어나는 시민수에 눌려, 도청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외곽변두리로 빠져나가 진을 치고 있다한다.  

 

한무리의 시위차량들이 지나간다. 모두 다, 차량 앞부분에는 대형태극기를 달아놓고, 차창 밖으로는 각목을 든 손을 내밀어, 장단에 맞춰 구호를 외친다.   

 

 " 비상계엄 해제하라 " " 전두환은 물러나라 " " 김대중을 석방하라 " " 계엄군은 물러가라 " 등등. 시위차량이 잠시 서면, 그 부근 동네에 사는 아줌마들이, 자발적으로 김밥이나 빵, 음료수등을 차창안으로 올려다 준다. 누구 누구 딱 정해진게 없다. 모두 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다.  

 

모든 언론, 통신, 식량공급, 교통등이 외부와 일절 차단된 상태에서 믿을수 있는것은, 그 순간만큼은, 국가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광주시민 그 자신들뿐이었다.

 

부족한 식량은 나눠먹으며, 무질서한 상황에서도 자체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남의 일을 내일같이 생각하며, 공동으로 합심해서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것, 그게 바로 오월의 정신인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가 그 당시에는, 시민들 전체의 의식속에 자연스럽게 베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돌이켜보면, 가장 불행한 시기였지만, 역설적으로 마음만큼은 가장 행복한 추억의 한때를 보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간혹, 지나가는 부상자나 사망자를 실은 차량들을 뒤로하며, 이윽고 도청앞 금남로에 다다랐다.  금남로에는 이미 수많은 인파들로 가득차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계엄군의 대부분은  조선대나 시외곽에 있었고, 일부분만 도청안에 있었기때문에, 도청쪽의 앞쪽만 잘 주시하며, 군중들틈에 끼어, 금남로 아스팔트바닥에 쪼그려 앉은채로, 집회연설등을 들으며 오후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알려지지않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순간 갑자기 50대후반으로 보이는, 이마가 좀 없고 몸집이 약간 통통한 중년남자가 성큼성큼 군중앞으로 다가와, 그 와중에서 한다는 말이 " 전두환씨를 나쁘게 보는데 사실은  좋은사람 어쩌고 저쩌고 . . " 

 

그 순간, 당황스럽고 서먹한 분위기가 잠시 연출됐다. 그때, 등뒤에서 누군가가 야유를 보내자, 그 중년남자는 황급히 현장을 떠나 줄행랑을 쳤다.

 

과연 광주시민이, 소위 말하는 폭도(?)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남자 무사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며,  도대체 그 사람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베짱있고 용기있게 군중들 앞에 나서서 그런 말들을 할수 있었는지 참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간다.

 

시위집회는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시위대를 태운 각종 차량들이 우리가 앉아있는 옆을 지나, 분주히 공수부대와 시민군이 대치하고 있는, 도청앞 분수대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한다.

 

사실 나는 금남로에 앉아있지만,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도청건물이나 도청 바로 앞 분수대 주변의 상황은, 각종 바리케이드나 장애물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소총의 유효사거리때문에 더이상 가까이 갈 수도 없다.

 

그런데 한번은  오후 2시경쯤, 차량위에 기관총이 장착된 트럭이 분수대쪽으로 들어 갔었는데( 젊은 청년 1명이 기관총을 손에 잡고 있고, 검은 교복입은 학생 1명은 그 옆에 앉아있었다),  

 

분수대쪽에서 나올때는, 그 젊은 청년의 목이 정통으로 총알을 맞아, 얼굴은 상방45도 하늘방향을 바라보는 상태로 죽어서, 시뻘건 피를 흘리고 있었고, 그 까만 교복을 입은 학생은, 총에 맞아 죽은 청년옆에서 두손으로  바닥을 치며 울면서 어쩔줄 몰라하는 상태로, 우리가 앉아있는 바로 옆을, 그 트럭은 지나갔다.

 

섬뜩하고 살벌한 광경이었다.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이제 집에 돌아갈까 ! 하는 생각도 해 보았으나, 더 있어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주위는 뭔가 산만해지는 느낌이었으나, 공수부대원들이 있는 도청은 앞에 멀리 떨어져 있고, 비교적 후방에 위치한, 내가 자리잡은 금남로 도로 위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느긋하게 시위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금남로 도로 좌우 양쪽으로는, 전일빌딩, 관광호텔, 카톨릭센터,YMCA건물등, 그 당시로서는, 대체적으로 높은 빌딩들이 도로 좌우로  늘어서 있다,

 

그런데, 한 오후 4시경쯤 되었을까?  갑자기  " 탕 ! 탕 ! 탕 ! 탕 ! 타당 ! " 하는 난데없는 총소리와 함께 총알들이 그 높은 건물들 쪽에서,금남로 도로위에 앉아 시위집회를 하고 있는, 시민들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민들로 가득 메워진 금남로는,  이 예고없이 쏟아지는 갑작스런 총알세례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공수부대는 도청안에만 있는줄로 알고 여유있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까운 빌딩들위에서 총알이 날아드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들 틈에 끼여, 나는 충장로 골목쪽으로  몸을 피하려고, 재빨리 온힘을 다하여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금남로 대로에서 충장로 골목으로 막 들어가는 순간, 내 좌측 한 3 m 정도 떨어져서 뛰던 어떤사람이 픽 !  하고 쓰러졌다.

 

뛰어가면서 힐끔 돌아다 보니, 30대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총알을 정통으로 맞았는지, 쓰러진 사람은 일어날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나는 더욱더 발에 힘을주어 속력을 내며 뛰었다. 정신없이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후에야, 숨이 찰 무렵 겨우 안심을하고, 뛰던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이미 충장로 골목 이곳저곳은, 총알을 피해 도망온 수많은 시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총을 소지한 누군가가, 실없이 허공(하늘)에 대고 탕 ! 탕 ! 쏘아대고 있었다. 그러자 시민들이 " 안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왜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냐 " 고 야유를 하자, 총소리는 이내 잠잠해졌다.

 

충장로 !  금남로 옆의 이 골목은 광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 충장로 우체국앞 " 하면, 모든 시민들의 약속과 또한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어느 충장로 골목 깊숙한 곳에서 이렇게 불안하게 숨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충장로에서 한참을 있다가 날이 어두워질무렵, 나는 금남로를 피해, 멀리 대인동 시외버스터미널부근을 경유해, 광주시청 인근 계림동에 있던  우리집으로 조심스레 돌아왔다.

 

나중에서야, 이날(5월21일)이, 시내중심에 있는 도청에서의, 계엄군의 마지막 철수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전시(戰時)상황에서나 연출되는 것처럼, 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채, 그냥 길거리에 앉아있는 수많은 시민들을 향해, 예고없는 무차별 사격을 가해야 했단말인가? 왜? 왜? 왜?  철수작전을 위해 꼭 그렇게까지 하지않으면 안되었다는 말인가 ???

 

 

글은 계속 이어짐  ~~~. 

(윗글은, 제가 실제로 직접 보고 겪은

사실들만, 있는 그대로 서술 나열한 것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위키백과)

 

* 이경남 목사. “'그 때' 특전사 출신 목사가 고백하는 5.18 광주민중항쟁”, 《코리아포커스》, 2006년 5월 18일 작성. 2006년 5월 18일 확인.

 


* 5.18 광주민중항쟁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aitdYFftmHM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5qwIQCjm8wo

 

* 사진으로 본 5.18 광주민중항쟁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Cy73bZBqEVI

 

 

 

 

 

* 사건 개요


5, 6공 시절 광주 사태라고 불리던 5.18은 처음에는 당시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이 배후에서 조작한 내란으로 규정되었으나, 1989년 국회 청문회에서 그 진상의 일부가 밝혀져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규정되었다.
5.18이라는 이름은 계엄군이 광주에 처음 진입한 5월 18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군부가 5월 17일 밤을 기해 수도권에서 전국으로 계엄 지역을 확대하면서, 5월 18일 새벽부터 전남대, 조선대 등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가 진주해 학생들을 마구 연행하기 시작했고, 아침에는 학생들의 등교를 막았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물론 청년이라면 무조건 붙잡아 거리에서 소총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때리고 옷을 벗기는 등 심하게 학대했다. 이 모습을 본 일부 시민들이 항의하기도 하기도 하고, 격분해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소총에 대검을 꽂고 진압하는 모습에 시민들은 더욱 큰 위기감을 느꼈고, 무자비한 시위 진압과 전두환 등 신군부를 규탄하는 집회가 계속되었다. 이 때, 무자비한 계엄군의 진압 실상을 알리기는커녕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가는 언론사의 보도에 분개하여 시민들은 MBC, KBS 방송사를 불태웠다. 계엄군의 발포로 사망자가 나고 헬기 기총소사까지 벌어지면서, 시민들은 경찰서, 예비군 부대를 습격하여 총기를 획득해 무장하게 된다.

 

 

 

* 5.18 광주민중항쟁 열흘 간의 상황 일지

 

1979.10.26  박정희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피살,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1979.12.06  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긴급조치 9호 해제
1979.12.12  신군부의 군사반란

1980.04.14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
1980.05.14  광주지역 대학생 등 1만여 명 가두 진출, 도청광장에서 민주화 성회 진행
1980.05.15  서울역 광장에서 학생, 시민 20만여 명이 집결해 계엄철폐, 민주화 요구 시위


다음은 5.18기념재단이 밝힌 광주민중항쟁이 전개된 과정.    

  

▲ 1980년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뒤

 총검으로 완전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내로 시가행진하며

 진출하고 있다. '피의 광주'를 예고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5월 17일 (토요일, 맑음)
·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 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 24시 00분 : 비상계엄 전국 확대,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5월 18일 (일요일, 맑음)
·  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 10시 00분 :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 10시 15분 :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 10시 20분 :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 15시 40분 :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 19시 02분 :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 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  3시 00분 : 증파된 공수부대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  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 14시 40분 :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 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 16시 30분 :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 의해 부상
· 20시 00분 : 수만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  8시 00분 : 고등학교 휴교조치
· 10시 20분 :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간의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 금남로에서 200여 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 20시 10분 :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 21시 05분 :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 21시 50분 : 광주MBC건물 방화
· 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 (수요일, 맑음)
·  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  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
·  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 남로에 등장
·  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
·  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 10시 15분 :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교체
· 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 11시 10분 : 대형헬기, 도청광장에 도착
· 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 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 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 14시 15분 : 도지사, 경찰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 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 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 16시 00분 :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 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 1980년 5월 18일 민주화 요구 시위대를 향한 계엄군의 유혈 진압

이 시작되면서 공수부대원이 대학생을 무차별 타격, 공격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5월 22일 (목요일, 맑음)
·  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 10시 30분 : 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 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 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 13시 30분 :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 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 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 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 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 10시 00분 :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 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
· 11시 45분 :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 13시 00분 :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 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 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 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비)
· 11시 00분 :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 대책비 1000만원 전달
· 15시 00분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 21시 10분 :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  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  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 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 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 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시킴.
·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맑음)
· 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 방송
· 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 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
· 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 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 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 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Qui a tue grand maman(누가 할머니를 죽였나, 오월의 노래2 원곡)
노래/ 미쉘 뽈나레프(Michel Polnare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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