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항일무장투쟁의 전개과정
⑴ 유격전근거지에서의 무장투쟁
① 만주사변(滿洲事變) 전후의 동만(東滿)
1930년에 들어서면서 전체 주빈의 76퍼센트가 조선인이면서도 민족적·계급적 차별과 냉대에 시달리고 있던 간도지방의 조선인들 사이에는 만주의 여타 지방에서 볼 수 없는 급진적 혁명의 분위기가 강하게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혁명적 분위기는 1930년 3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총국(滿洲總局)이 해체되면서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에 가입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주동으로 5·30폭동(五三十暴動)은 비록 사후에 급진 좌경주의로 낙인찍히기는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만주 땅에서 조선 농민의 고뇌와 그 속에서 싹튼 혁명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다음의 표3·표4는 당시 간도에서의 조선 농민의 민족적 차별대우와 사회경제적 관계의 열악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민족차별 없이 빈곤농민들에게 나누어주자!”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자!”는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만주의 조선인 농민들에게 타도 대상은 일본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중국인 지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주 타도’라는 구호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조선인=소작농’ ‘중국인=지주’라는 등식이 일반화되어 있고 간도 거주 중국 농민의 43.7퍼센트가 지주인 상황에서 이 구호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둔 조선 민족과 중국 민족 사이를 분열시킬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민족간의 심리적 갈등은 뒤에 일제가 ‘간도자치공약’ ‘민생단조직’ 등의 기만적인 술책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었으며, 이 술책들을 통해 일제는 민족간 갈등뿐만 아니라 민족 내부의 갈등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요컨대 간도지방에서의 특수한 지주-소작관계의 성격은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표출되는 민족간 갈등의 중요한 발원지였으며, 이로 인해 일제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여 효과적으로 동만주를 통치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만의 분위기 속에서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났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9월 22일 국민당(國民黨) 정부를 타도하고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혁명전쟁의 전개를 호소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임무로 소비에트구의 확대와 소비에트 혁명 노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공산당에서는 “만주사변이 일제의 중국 침략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민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9월 22일의 결의문에 “파업과 파시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점령에 반대하라” “유격전쟁을 일으키라” 등의 슬로건을 미미하게나마 내놓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중공당 중앙위는 ‘반일(反日)’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주에서 동북군벌계통의 군대들을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인 대일무력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당연히 중공당에서도 반일항쟁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931년 10월 12일 중공당 중앙위는 만주성위에 보내는 사병공작에 관한 지시 속에서 항일유격대의 조직을 명확하게 제시하게 되었다. 중앙위의 지시를 받은 만주성위에서는 1831년 11월 중순 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서의 항일유격대의 창건을 결정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정세가 전개되는 가운데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파견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중국인 동장영(童長榮)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주 각 현 당·단원 적극분자회의’를 소집하였다. 연길현·화령현·왕청현·훈춘현·안도현에서 온 공산당 간부 약 40명이 참가하여 10일간이나 계속된 이 회의는 중공당 중앙위와 만주성위에서 제출한 유격대 창건에 관한 지시를 토론한 뒤 동만에서도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전근거지를 만들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명월구회의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김일성이 이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전근거지 창설 방침을 밝히는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들이 이 회의의 소집 책임자를 동장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김일성의 당시 직위(안도현의 당 간부로 추정된다)로 보아 결코 그가 회의를 소집하거나 주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 문헌 중 명월구회의가 처음 등장하는 백봉의『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1931년 11월 장군의 참가하에 명월구회의가 열렸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활동지역인 안도현의 당 간부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② 항일유격대의 조직과 유격전근거지 건설
명월구회의에서 항일유격대와 유격전근거지 창설이 공식 결정되자 만주사변 전에 이미 화룡현 약수동 등의 산간벽지에서 소비에트 정권과 홍색적위대를 건립한 경험이 있는 동만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즉시 항일유격대와 유격전근거지 건설사업에 착수하였다. 동만 각 현에서 많은 공산당원과 청년당원들이 1931년 말부터 1932년 봄 사이에 군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공작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이 결과 1932년 봄에 이르러 동만 각지에서는 우후죽순격으로 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동만은 남만과 더불어 만주에서는 가장 만저 항일유격대가 조직된 곳이다.
동만 각 현의 유격대 조직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길현에서는 먼저 노두구 유격대(1932년 초)와 의란구 유격대(1932년 초)가 건립되고 이들이 합쳐져서 연길현 유격대(1932년 10월)로 발전하였다. 연길현 유격대는 1933년 1월 화련리 유격대를 합병함으로써 대원 130여명의 연길현 항일유격대대로 확대되었다(대대장은 박동근이며, 정치위원은 박길). 화룡현 유격대는 개산 툰구 권총대와 대감자·평강 등의 유격대가 합병되어 1932년 12월에 건립되었다가 1933년 3월 대원 80여명의 화룡현 유격대대로 발전하였다(대대장은 양성룡이며, 정치위원은 김일성).
훈춘현 유격대(일명 훈춘현 유격총대)는 1932년 1월에 세워진 대황구 별동대가 발전한 영북 유격대(1932년 9월)와 영남 유격대(1932년 6월)가 합펴져서 1933년 초에 건립되었다(총대장은 중국인 공산당원 공헌침이며, 정치위원은 박태익). 대원 120명의 이 유격대는 산하에 2개의 대대를 두었다.
이렇듯 동만에서 항일유격대 조직작업이 한창이던 1932년 6월 중공당 중앙위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북방각성위원회 대표들이 참석하눈 북방회의를 임시로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고·장문천 등 당중앙의 지도자들은 만주사변 이후 새롭게 변화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이 시기 동북당의 중심 임무를 ‘동북 인민을 지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시키는 것으로 설정’하면서 소비에트혁명을 반대했던 만주성위원회 서기 나동현의 주장(‘북방낙후론’과 ‘북방특수론’)을 비난하면서 ‘전중국 일체의 토지혁명 추진’ ‘소비에트 정부 수립’ ‘홍군의 건설’을 주장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새로운 좌경노선이 당 중앙으로부터 제기되자 동만 각 현에서는 소비에트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소비에트 구역내에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개혁을 추진해나갔다. 그 결과 1933년 초까지 동만에는 왕우구·소왕청·석인구·황구·연통라자 다섯 구역에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소비에트 구역에서는 일제 주구를 타살한다는 구호 아래 많은 지주들이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죽어갔으며 부농의 재산까지도 몰수하는 급진적인 좌경노선이 기세를 떨쳤다. 그러자 반일지주들도 반공을 기치로 내걸게 되었으며, 항일유격대는 지주들이 무장한 산림대와 빈번히 충돌하면서 적지 않은 손실을 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정권 수립 노선’은 엄청난 반일 역량의 이탈을 초래시킨 뒤에야 당중앙이 만주성위에 보내는 1월서한(1933년 1월 26일)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만주에서의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결정한 북방회의가 막을 내린 지 두 달만인 1932년 8월 개최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12차 회의(8월 27일~9월 15일)는 만주에서 ‘종래의 소비에트 방식을 수정해서 민중의 반일운동을 동원하고, 선거에 의한 동북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종래의 토지혁명과 소비에트 정권 수립 노선을 파기시켰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방침이 중공당 중앙위에서 구체화되어 나온 것이 ‘반일통일전선의 실행’ ‘소비에트 혁명추진의 중지’ 등을 핵심내용으로 담고 있는 1월서한인 것이다.
1월서한이 만주성위 순시원인 조선인 반경우를 통해 동만특위에 접수된 것은 1933년 6월경이었다. 새로운 방침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1. 소비에트 정부를 해체하고 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할 것
2. 적위대·유격대를 기초로 하여 인민혁명군을 성립할 것
3. 종래의 복잡한 조직을 정리하고 반일투쟁을 활발히 할 것(예로는 농민위원회의 설립, 반일화의 확충 등)
4. 다른 반일부대와의 공동전선의 확립.〃
이제 좌경적인 토지개혁과 소비에트 정권 수립 노선은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광범한 반일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 통일전선에 기초한 인민혁명정부 수립 노선이 제기된 것이다.
중공당 중앙위의 새로운 지시사항을 토론하기 위해서 동만에서는 왕청현위의 제1차 연석확대회의(1933년 6월 4일)를 필두로 동만특위와 각 현위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는 대체로 기존의 좌경노선에 대한 비판과 구국군 등 다른 반일부대와의 연합작전 등이 토론되었으며 당중앙의 새로운 방침이 전달되었다.
새로운 노선에 따라 동만 각지에서는 기존의 소비에트 정부를 인민혁명정부로 바꾸고 새로이 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광범하게 일어났다. 반일역량을 보다 수월하게 결집시켜가면서 인민혁명정부 수립 노선을 취하게 되자 기존의 유격전근거지는 확대되고 새로운 유격전근거지들이 연이어 건설되었다. 유격전근거지에서는 인민혁명정부의 주도로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한 많은 민주개혁이 추진되었다. 1933년 2월 현재 5개 지역에 4천 5백명의 군중밖에 포용하고 있지 못하던 소비에트 구역에 비해 인민혁명정부 노선에 입각한 유격전근거지는 1933년 말 현재 13개의 고정된 유격전근거지와 3만여명의 인구를 포용할 만큼 크게 성장·발전하였다.
소비에트 노선의 포기에 따라 다른 반일부대와의 연합작전도 가능해져 1933년 8월 왕청현 유격대는 왕청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세영(施世榮)·이삼협(李三俠)·오의성(吳義成)·사충항(史忠恒) 등 중국인들이 지휘하는 항일구국군 부대 1천여명과 공동으로 동녕현을 공격하여 2백여명의 일본군과 3백여명의 만주국군을 살상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른바 동녕현전투(東寧縣戰鬪)는 왕청현 유격대의 정치위원이었던 김일성이 오의성과 담판하여 그의 부대를 대일공동전선에 끌어들였으며,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가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요령구국군(遼寧救國軍) 지휘관인 사충항을 구출하였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끈다.
항일유격전근거지 건설과정에 또 하나의 값진 승전(勝戰)은 1933년 봄에 있었던 소왕청전투(小汪淸戰鬪)였다. 일제는 1932년 겨울부터 많은 병력을 규합하여 유격전근거지에 대한 계속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 특히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의 주재지인 소왕청 병영에 약 3천명의 일본군 전투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 공세를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30일 하루 종일 치열한 격전을 치른 끝에 동만특위 서기 동장영과 김일성 등이 이끄는 유격대와 자위대는 일본군의 맹공을 퇴치하여 3백여명의 적군을 살상하고 보총·권총 259정과 박격포 4문 등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듯 계속되는 적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격퇴하고 기존의 좌경노선의 오류를 시정하여 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하면서 항일유격대는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1933년 말 현재 동만의 유격대원은 7백여명에 이르렀고 당원 수는 만주사변 전애의 636명에서 1천 2백명으로 증가했으며 1934년 2월 현재 유격대원들 중 당 단원의 비중은 80퍼센트에 달하게 되었다.
③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의 성립
1933년 12월 3일 중공당 만주성위는 동만특위와 유격대 지휘관들에게 연길현(延吉縣)·화룡현(和龍縣)·왕청현(王淸縣)·훈춘현(琿春縣) 등 4개 현에 현재 조직되어 있는 유격대를 기초로 동만 일대의 항일투쟁을 영도할 인민혁명군 지휘부를 건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미 중공당 중앙위의 1월서한에서도 제시된 바 있는 인민혁명군의 건립을 만주성위가 다시금 결의하게 되자 1934년 초에 들어서서 동만에서는 이 문제가 중요한 당면과제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1934년 3월 연길현 삼도만 항일유격전근거지인 장지영에서 특위와 유격대 책임간부 회의가 소집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각 현 유격대를 통합·편성하여 정식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제1독립사단을 결성하고 사단부(師團部)를 발족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사단장에는 조선인 주진(周眞)이, 정치위원에는 중국인 왕덕태(王德泰)가 취임하였다.
본래는 때를 보아 왕청현·훈춘현 두 현의 유격대를 따로 편성하여 제2독립사단을 건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지영회의 후 제2독립사단 건립계획은 사정상 실현되지 못하고 제2로군 제1독립사단이 제(諸)독립사단으로 개편되면서 이 부대는 연길현·화룡현·왕청현·훈춘현 등 4개 현의 유격대가 개편된 1·2·3·4사단과 독립단을 포괄하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 사회과학원이 오늘날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으로 보르고 있는 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독립사단’의 편성을 두고 일제 관헌자료에 의존한 국내외의 대부분의 저술들이 착오를 범하고 있어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먼저 일제의 관헌자료에 따르면 1934년 3월 연길현 삼도위 능지영 산정(山町)에서 동만특위 군사부 책임 왕덕태, 특위 조사부 책임 이상묵(李尙默), 반일유격대 수뇌부, 항일의용군 수령 등 약 15명이 모여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제1독립사단을 편성하고 당분간 연길현 삼도위 동구에 근거지를 두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1934년 5월 30일 5·30폭동 기념일을 기해서 왕청현 대왕청을 중심으로 왕청·훈춘 두 현을 행동구역으로 하는 제2독립사단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이 자료는 제1독립사단과 제2독립사단이 각각 3대대씩 휘하에 두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각 단의 단장들 중 불과 3명의 이름밖에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1독립사단의 경우 사단장은 만인(滿人), 정치위원은 선인(鮮人) 이모(李某)라는 정도밖에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자료에서 제시한 14개의 직책 중 일제가 어설프게나마 그 신원을 파악하고 있던 간부는 주진·왕덕태, 그리고 김일성(金日成)의 오기(誤記)로 보이는 김일선(金日善) 등 7명에 불과하다.
1934년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독립사단이 고정된 유격전근거지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반민생단투쟁(反民生團鬪爭)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때라서 유격전근거지 내의 항일조직들이 일제에 의해서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던 때이다. 그런데 제1독립사단의 조직 일자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일제가 어째서 부대편성에 대해서는 모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동만특위와 동만의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이 본래 2개의 독립사단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고 본다. 즉 일제는 2개 독립사단 건립계획에 대한 정보는 입수하고 있었으나 이후 이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고 항일유격대가 하나의 독립사단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그 당시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필자가 중국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밝혔듯이 1934년 동만에 있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은 ‘제1독립사단, 제2독립사단’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사단’ 즉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독립사단’이었다. 일제 관헌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이 정치위원으로 있던 왕청현유격대가 1934년 5월에 제2독립사단으로 개편됨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제1독립사단이 조직된 이 해 3월을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의 달로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1934년 봄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은 단일 독립사단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여기서 최근 중국에서 발행된 문헌들을 근거로 1934년 3월 9백여명의 전투병력으로 구성된 동빅인민혁명군 제2로군 독립사단의 편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단장에 주진(周眞), 정치위원에 왕덕태(王德泰), 제1여단장에 김순덕, 정치위원에 최학철(崔學哲), 제2여단장에 맹소상(孟素相), 정치위원에 김낙천, 지3여단장에 조춘학(曺春鶴), 정치위원에 남창익(南昌益), 제4여단장에 하덕윤, 정치위원에 김현(金鉉), 1934년 여름에 결성된 독립여단장에 유장구(柳章龜)가 각각 선임되었다.
아직까지 중국 문헌들 중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독립사단의 조직을 상세하게 기술해놓은 것이 없어 이 부대의 전모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 부대 창설 초기부터 김일성이 주요 간부였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이 부대 창설 초기부터 제3여단 정치위원이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제3여단 정치위원이 되는 것은 제3여단 정치위원인 남창익이 전사한 1934년 9월 이후부터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일제 관헌자료에 나타나는 제2독립사단 제2여단 정치위원 ‘김일선’은 김일성의 오기(誤記)다. 이러한 잘못된 표기는 정보자료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사소한 부정확성의 한 표본일 따름이다.『만주공산비의 연구』에서 정확하게 이름을 밝히고 있는 제1·제2독립사단 간부 7명 중 필자가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인물은 6명이었는데 이 중 주진과 왕덕태, 맹소상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이름이 모두 조금씩 부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즉, 김일성이 김일선으로 표기된 외에 제2독립사단 제1여단 정치위원 남창익은 남창일(南昌一)로, 제2독립사단 제3여단 후국충(사실은 제3여단 제1중대장)은 후국춘(侯國春)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아무튼 동만의 항일유격대들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독립사단으로 통합·편성됨으로서 대일전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독립사단은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응하여 1934년 한 해 동안 다른 항일부대와 함께 9백여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전투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1935년 5월에는 다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군장에 왕덕태, 정치위원에 위증민)으로 확대·개편하게 된다. 참고로 일제의 관헌자료에 나타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단의 병력추이를 살펴보면 1935년 10월 현재 1290명, 1936년 7월 현재 950명 가량으로 파악된다.
④ 반민생단투쟁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위기
1932년 3월 괴뢰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동만에서 항일유격대의 저항이 점점 거세어지자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이용하여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의 슬로건을 내걸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유격전근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내부 분열공작에 들어갔다. 이 내부 분열공작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중국공산당은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응하여 소비에트 혁명을 중지하고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지시하는 1933년의 1월서한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내려보냈다. 그러나 1월서한에는 일제가 공공연히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를 공언하면서 조·중 두 민족을 분열시키고 유격전근거지내의 조선인들을 동요시키고 있던 당시 정세에 대응할 만한 조선민족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을 제시하지 못했다. 조선인에 대해서 특수한 슬로건을 내걸 필요를 강조하면서도 그 내용을 보면, “조선의 농민제군! 일본의 제국주의는 제군의 토지를 약탈하고 제군을 고향으로부터 추방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여 당신들의 토지를 탈환하기 위해 분투하라”는 식으로 종전과 다름없이 조선인들의 민족해방의지를 중국의 혁명투쟁에 흡수하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즉 1월서한은 “재만조선인의 존재는 일제의 조선지배 결과 발생한 ‘난민’이므로 반일투쟁을 승리로 이끌면 이들의 해방된 조선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소박한 중공당 지도부의 생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조·중 국경지대인 간도지방은 역사적으로는 19세기 중반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들어와서 생활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곳이었다. 일제의 박해를 피해 건너온 조선인들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따라서 1월서한은 재만조선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방침을 담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공산당의 불철저한 소수민족 정책이 바로 동만에서 수백명의 조선인 전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조·중 민족간의 갈등을 첨예화시킴으로써 항일전선에 커다란 손실을 안겨준 이른바 민생단사건의 중요한 배경이 된 것이다.
만주사변을 전후해서 조선으로부터 연변에 들어온 친일파들은 일제를 등에 업고 간도자치를 주장하면서 김성호(金聖鎬) 일파를 중심으로 간도자치촉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1932년 2월 일제의 지도 아래 간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진압할 목적으로 당시 경성 매일신보 부사장인 박석윤(朴錫胤), 광명회의 정사빈 등과 연합하여 민생단을 조직하였다.
공개적으로 반공조직이 나타나자 용정에 있는 혁명적인 단체들은 민생단을 타도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일본영사관에서도 아직 만주국의 기초가 공고화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민생단이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민생단은 조직된 지 다섯 달 만인 1932년 7월에 해체되었다.
민생단은 해산되었으나 민생단이 남긴 폐해는 실로 대단하였다. 민생단의 스파이들이 백색구역(일제의 통치구역)과 적색구역(유격전근거지) 가릴 것 없이 공산주의 진영에 가입하여 ‘조선인들의 간도자치론’ 등을 내세우며 내부 분열공작을 획책한 결과 유격전근거지에서는 조선인이면 일단 민생단분자로 한번쯤 의심을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생단은 해체되었으나 유격전근거지내에 민생단의 유령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주구 김동한(金東漢)을 중심으로 1934년 9월 간도협조회가 만들어졌다.
동만지방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의 박멸을 기치로 내걸고 성립된 간도협조회는 민생단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으나 사회적 성격은 동일한 것이었다. 약 2천여명의 귀순분자·변절분자들을 규합시킨 김동한은 곧장 공작대를 조직하여 유격전근거지 파괴공작에 나섰다. 그들은 중공당 만주성위·동만특위·북만특위 등의 일반 민중층 세포체를 박멸하여 민중과 공산당을 분리시키고, 동만특위에 가짜 공산당원을 침투시켜 내정을 정확히 탐사하면서 주요 간부를 연행 혹은 암살하고, 유언비어를 뿌려 중공당의 상하관계를 이간시키는 술책을 구사하였다.
이들의 활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협조회의 사방대에서의 공작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연길현 의란구 유격전근거지 공급부장으로 있던 한영호는 유격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동안 백색지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탐지해낸 협조회의 김동한은 이 사실을 이용하여 유격전근거지를 와해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김동한은 의란구 유격전근거지에서 방금 귀순하여 공작대원이 된 변절자 두 명을 총기를 휴대시키지 않은 채 유격전근거지가 있는 연길현 사방대로 파견하였다. 유격전근거지 지형에 익숙한 공작대원들은 제2보초선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유격대원들에게 “우리는 통치구역 조직에서 당에 공작보고하러 오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한영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짐짓 물은 뒤 서로 잡담을 하며 눌러 앉아 있다가 보초병이 부주의한 틈을 타서 총기를 빼앗아 가지고 도망하였다. 백색지구에서 식량을 구해가지고 유격전근거지로 돌아온 한영호는 민생단원으로 몰려 체포되어 고문치사하고 말았다. 한영호는 죽기 전에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조선인 지도자 수명을 민생단원이라고 허위자백하였다. 그리하여 동만특위의 상무위원이며 좌경맹동주의자로 치부되었던 김성도, 동만특위의 조직부장 이상묵,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독립사단장 주진, 연길현위의 박길 등 10여명의 주요 조선인 지도자들이 민생단원으로 몰려 탈주하거나 체포되었다.
이렇듯 민생단사건은 유격전근거지내에서 엄청난 반민생단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반민생단투쟁은 부분적으로 구공산주의자들의 분파주의와 연결되면서 혁명대오의 자체 분열까지 초래하였다. 당시 일부 분파분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위협·공갈하여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그것이 안 되면 덮어놓고 민생단 감투를 씌워 처형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결국 동만특위의 지도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의 민족배타주의와 구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분파주의가 일제의 공작에 말려들어 반민생단투쟁을 그릇된 방향으로 몰아감으로써 항일혁명역량의 심각한 자체 분열이 초래된 것이다.
당시 동만특위의 비서장이었던 중국인 조아범(曺亞範)은 만주성위의 순시원이 내려왔을 때 혁명대오내 민생단의 비율을 화룡현 80퍼센트, 연길현 70퍼센트, 훈춘현 60퍼센트, 왕청현 50퍼센트라고 보고하였다. 이는 당시 각 유격대에 속해 있던 조선인 유격대원의 80%~90%선을 일률적으로 산정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인 유격대원은 거의 모두가 민생단원으로 의심받았던 것이다. 협조회에 말려든 어처구니 없는 좌경맹동주의와 분파주의, 그리고 중국인들의 민족배타주의가 반민생단투쟁을 야기시키면서 5백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조선인 간부와 핵심분자들이 체포·해임·처형되거나 도망가야 했고, 이에 많은 지방당조직이 활동마비상태에 빠졌다. 인민혁명군내에서도 수많은 조선인 지도자를 잃음으로써 대체할 새로운 간부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김일성이 정치위원으로 있던 왕청현 유격대장 양성룡도 1933년 말 민생단 혐의자로 낙인찍혀 보통전사로 강등됐으며, 반민생단투쟁의 선봉에 섰던 좌경맹동분자 송일마저도 협조회의 공작에 말려들어 “아…. 나 같은 사람도 민생단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장탄식을 남긴 채 죽어갔다.
만주성위원회의 순시원은 1935년 2월 본부에 돌아와서 “인민혁명군 간부 임명에 있어서 연장 이상의 지위에 조선인을 충당하는 일은 아주 부득이하지 않는 한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중국공산당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불신은 골이 깊어졌다. 그러나 수백명의 동료 전사들을 잃고 이탈자가 속출하는 마당에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를 내걸며 혁명진영을 파괴시키는 데 일조한 민족개량주의와 일부 구공산주의자들의 분파주의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민족배타주의에 대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반민생단투쟁을 겪으면서 이들을 아마 중국혁명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면서 조선해방을 위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의 조선민족에 대한 불신감이 증대하면 이에 비례하여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중국인의 민족배타주의에 더욱 혐오감을 느끼면서 조선민족을 위한 항일민족해방투쟁의 길을 갈망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반민생단투쟁의 좌경적 오류가 저질러지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1934년 겨울 공청 만주성위 특파원으로부터 좌경적 주장이 담긴 만주성위의 지시 서신이 동만특위에 전달되었다. 이 지시 서신은 당시 항일을 견지하고 있었던 산림대를 모두 비적으로 취급하면서 인민혁명군으로 하여금 산림대와 모두 비적으로 취급하면서 인민혁명군으로 하여금 산림대와 열등한 구국군 부대로부터 총기·탄약을 빼앗을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견지되어야 할 당시의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명백히 좌경맹동주의적 오류였다. 실제 인민혁명군은 산림대와 구국군 일부의 무기를 압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인민혁명군과 산림대·구국군 연합과의 무력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34년 말에 이르러서 반민생단투쟁으로 수많은 희생자와 이탈자가 생기고 동만특위의 통일전선 공작에서의 좌경적 오류가 겹치면서 유격전근거지는 그 기초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일련의 좌경맹동적 격랑 속에서 반일회원의 숫자가 격감하였다. 이것은 통일전선이 붕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35년 2월 말 반일혁명역량 붕괴의 위기 속에서 동만특위는 동만의 위기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1934년 말 만주성위에서 긴급 파견된 중국인 위증민의 사회로 연길현 대황위에서 동만당단 특위 제1차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통일전선과 반민생단투쟁에서 나타난 좌경오류의 문제에 대한 집중 토의를 시작하였다. 임춘추에 의하면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민생단이 발생하게 된 것은 종파분자들과 기회주의 분자 및 일부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이 보는 바와 같이 조선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파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 혁명조직을 내부로부터 와해하여 혁명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발광하고 있는 일제와 그 주구들의 조작에 기인된다”고 지적하면서 반민생단투쟁의 좌편향적 오류를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반민생단투쟁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임춘추의 기술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신빙성을 갖는다. 대황위회의에서 민생단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 좌경적 오류를 먼저 제기하고 나선 것은 아무래도 당시 민생단 공포에 떨며 언제 희생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과 중국인들의 민족배타주의에 대한 깊은 분노가 뒤섞여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주진·이상묵 등 조선인 최고지도자들이 유격전근거지에서 사라지고, 송일과 같은 좌경주의자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조선인 지도자는 반민생단투쟁에서 다시 한번 파벌로 얼룩졌다고 낙인찍힌 구공산주의 운동 출신이 아니면서도 동만특위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이러한 조건을 갖춘 조선인 공산주의자 중 최고지도자는 김일성이었다. 아마 김일성이 문제를 제기하고 위증민이 동조하였으나 반민생단투쟁론자들의 강경로닝 이에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3월 하순에 열릴 요영구회의로 그 결정이 미루어졌던 것 같다. 대황구회의에서 결의된 문건에 “고려 소수민족의 출로문제를 요해시킬 것” “중공당이 고려민족에 대해 자결권을 준 일을 요해시킬 것” 등의 문구가 들어간 것은 이 회의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반민생단투쟁 문제에 대해서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고 나왔다는 반증이다. 더불어 이 회의 후 김일성이 제2로군 조선인 지도자 중 항상 최고의 직책을 맡았고 조국광복회의 조직과 운영이 김일성의 항일연군 1로군 6사단에 맡겨졌으며, 김일성이 6사단장이 되었을 때 민생단 혐의자 1백여명을 그의 부대에 받아들였다는 사실 등은 모두 대황위회의에서 김일성이 민생단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인 주장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당시 일제가 확보하고 있었던 대황위회의 참가자 명단에 김일성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참석을 부인하고 있으나 그것은 신빙성이 없다. 최근 중국 문헌들은 이 회의에 참석했던 20여명의 간부들 중 확인된 7명의 중국인 지도자들의 명단(위증민·왕덕태·이학충·주수동·왕중산·조아범·왕윤성)을 밝히고 있는데 이 명단을 다시 일제 관헌자료와 대조해보면 위증민·왕덕태만이 분명하게 확인되고, 조아범 정도가 유추확인이 가능한 정도다. 불확실한 일제 관헌자료를 가지고는 당시 참석자의 면면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당시 독립사단 3여단 정치위원이었던 김일성이 20여명의 간부들이 참가하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상식을 벗어난 추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굳이 추정하자면 일제 관헌자료에 중국 측 참가자로 나와 있는 특위위원 겸 제2로군 제2사단 제2여단 정치위원 왕대뇌대(王大腦袋)가 김일성일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민생단사건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음에 틀림없으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민족해방투쟁의 도정에서 귀중한 경험으로 축적되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조선인을 민생단으로 몰아붙이는 무자비한 죄경맹동주의를 체험하였으며 일제의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에 현혹되는 우경투항주의적 경향이 몰고온 파탄도 경험하였다. 또한 소수의 중국인들의 편협한 민족주의에 의해 다수의 조선인들이 당하는 무고한 핍박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민족공산주의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민생단사건은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대부분의 고참 구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되거나 변절함으로써 신진시대라 할 수 있는 김일성이 제2로군내 조선인 최고지도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⑤ 일제의 대토벌과 유격전근거지의 해체
유격전근거지내에서의 반민생단투쟁으로 항일유격전대오가 엄청난 손실을 입고 있던 1933년에서 1935년 사이의 기간은 설상가상으로 일제의 유격전근거지에 대한 대공세가 집요하게 계속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1933년의 제1차 토벌과 1934년 1월의 제2차 토벌에 이어 1934년 가을부터 1935년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3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한 제3차 토벌을 감행해왔다. 1933년과 1934년 초 사이에 감행된 두 차례에 걸친 일제의 공세는 그런 대로 잘 막아냈지만 유격전근거지와 일제 통치구역 주민들 사이를 분리시키는 집단부락, 보갑제 등이 어느 정도 모습이 갖추어지면서 시작된 3차 대토벌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유격전근거지들은 산간지대에 건설되어 있어 자급자족이 어려웠다. 따라서 후방으로부터의 식량공급이 절대 필요했으나 통치지역에서의 조선인 군중의 동요와 이미 건설된 수십 개의 집단부락들은 이들의 식량공급의 길을 막아버렸다. “연길·화룡·왕청현의 유격전근거지에 거주하던 군중 약 1천명 중 1935년 3월부터 7월 사이에 식량부족으로 사망한 자가 이 백 수십 명이며 겨울에 기아와 추위로 죽은 자가 50명 이상이었다”고 하는 일제 첩보가 말해주듯이 당시 유격전근거지는 거의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민생단사건은 유격전근거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인 군중들을 동요시켜 1933년 이후 수많은 이탈자를 속출시켰다. 이제 더 이상 유격전근거지를 고수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런 와중에 대황위에서 매듭짓지 못한 반민생단투쟁 문제에 대한 정리와 인민혁명군 강화 문제 그리고 유격전근거지의 해산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1935년 3월 하순 대황위회의에서 동만특위 서기로 선임된 바 있는 위증민의 사회로 왕청현 요영구에서 사단장, 사정치부 주임, 가단 정치위원 등 11명의 정치간부가 참석한 가운데 제2로군 독립사단 정치위원 연석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이 반민생단투쟁의 좌경적 오류를 또 다시 비판했다는 것은 한 달 전에 열렸던 대황위회의를 상기해본다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임춘추는 이 회의에서도 위증민이 김일성의 비판에 동조했으나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의 문헌들이 모두 이때 반민생단투쟁의 좌경적 오류를 시정하기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반민생단투쟁 문제는 완전한 해결을 보지는 못했으나 잠정적으로 일단락되었던 것 같다. 아마 임춘추는 당시 좌경주의자들이 그들의 좌경적 오류를 떳떳이 인정하지 않았던 분위기를 보고 그런 기록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영구회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는 무엇보다도 유격전근거지를 해산하고 부대이동을 단행하는 일이었다. 회의에서는 “동지들의 피로 건립된 반일유격전근거지를 의무적으로 보위하자”며 반대한 일부 간부들도 있었으나 김일성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유격전근거지의 해산 결정이 내려졌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이 사실을 두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광활한 지대에로의 진출, 제2차 북만원정”이라고 하고 있으며, 중국의 문헌들은 “유격전근거지를 사수하면서 단순히 소극적 방어태세를 취하던 방침을 개변시켜 기동력 활발한 유격전술을 쓸 것을, 이를테면 적의 세력이 박약한 지구에 가서 유격전쟁을 벌이거나 새로운 유격전구를 개척할 것을 결의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 의미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유격전근거지의 해산은 근본적으로 1935년 대토벌 반민생단투쟁의 좌경적 오류 등으로 초래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의 위기가 극도로 심화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임춘추는 그의 회상기에서 당시 유격전근거지의 해산 배경을 다음과 같이 폭넓게 설명하고 있다.
1. 적은 지역이 협소한 유격전근거지에 병력을 집중 동원하여 포위·공격하면서 각 해방구와 인민혁명군의 각 부대를 고립·분산시키고 각 개격파의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2. 군사상 적에게 유리한 지역에 조·중 인민을 강압적으로 집결시켜 집단부락을 설치하였다.
3. 민족반역자, 혁명변절자, 간첩들을 혁명대오에 잠입시켰다.
4. 인민을 대량학살하여 유격전근거지 군중들에게 공포를 주면서 자수정책을 썼다.
5. 조·중 인민들과 인민혁명군과의 조직적 연계를 끊음으로써 인민혁명군의 병력보충을 저해하였다(이상 1~5는 일제의 대규모공세와 관련된 설명).
6. 동만 각 현에 산재한 유격전근거지들은 서로 연결된 지대가 아니라 적군의 포위 속에 점점이 산재해 있어 통일된 지구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7. 아군의 병력은 수천명에 불과하며 무장도 충분치 못했다.
8. 해방구에 대한 적들의 발악적인 봉쇄로 말미암아 군대와 유격전근거지내 인민들은 극심한 생활난에 시달렸다.
9. ‘5가작통’ ‘10가연좌법’ 등의 제도에 의한 적의 주민통제가 극심하였다.
10. 항상 반수 이상의 부대 성원들이 해방지구 보위사업에 충당되었으므로 병력부족이 심각하였다(이상은 인민혁명군의 사정과 관련된 설명).
11. 무장대내에서 반민생단투쟁과 관련하여 막대한 손실을 당하였다.
유격전근거지를 해체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은 남만과 북만의 두개 방향으로 부대를 분산하여 산개시켰다. 먼저 연길·화룡현에서 활동하던 부대들은 안도지방으로 이동해서 제2로군 군장 왕덕태의 지휘 아래 안도현의 처창즈(1935년 초), 내두산(1935년 가을) 등에 잇달아 유격전근거지를 세우고, 이 곳을 중심으로 안도현과 남만 일대에서 항전하다가 일제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1936년 2월 내두산 근거지를 포기하고 돈화·화전·무송 등의 남만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이 이동은 이오송·백학림 등 수십명의 아동단원을 포함한 수많은 노약자들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항일유격대를 따라 내무단으로부터 백두산 산록을 넘어 남만으로 행군하는 실로 고난의 퇴각이었다.
한편 유격전근거지가 해체되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이 광활한 지대로 진출하게 된 1935년은 항일유격대의 조선 국내 진출로 활발한 한 해였다. 처창즈 유격전근거지에서 활동하던 박성철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 일부가 국내공작을 위해 이 해 5월 초 무산방면으로 진출하는 등 여러 개의 공작조가 무산·온성 등 함경북도 일원에 파견되었다.
연길·화룡에서 활동하던 부대들(1여단, 2여단)이 남만으로 진출하는 동안 왕청·훈춘현에 근거를 두고 있던 부대들(3여단, 4여단)은 김일성 등의 지휘 아래 1935년 여름 북만원정을 시작하여 노흑산 전투(1935년 6월) 등을 치르면서 제5로군의 근거지인 영안현으로 진출하였다. 북만으로 진출한 제2로군이 제5로군과 배합해서 실시하려 했던 제2로군, 제5로군 혼성조직표는 김일성이 북만원정부대의 주력부대를 지휘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 조직편성표를 보면 제2·5로군 혼성조직표는 김일성이 북만원정부대의 주력부대를 지휘허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 조직편성표를 보면 제2·5로군의 지도부는 총지휘관 주보중(周保中), 부지휘관 이형박(李刑璞), 정치위원 김일성으로 되어 있으며, 김일성은 안도부대를 지휘하는 주보중과 함께 위하부대를 인솔하면서 서부대(西部隊)를 구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근의 중국 문헌에 의하면 1935년 8월 제2·5로군 영도간부회의가 소집되어 이 회의에서 제2로군 3여단 4연대와 제4여단 제2연대(이 부대는 전원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및 청년의용군이 제5로군 1·2·4여단으로 조직된 서부 파견대에 합류하여 제2로군 제3여단 정위(이는 김일성을 가리키는 것이다)와 제5로군의 중국인 시세영, 중국인 이형박 등의 인솔에 따라 서쪽으로 가 액목·돈화 일대에서 활동할 것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1935년 11월부터 1936년 1월 말에 이르는 두 달 동안 김일성과 시세영·이형박이 지휘하는 서부파견대는 액목·돈화 지구에서 종횡무진의 맹활약을 하였다.
조선민족이 절대 다수였던 간도에서 활동근거지를 잃고 북·남만으로 양분되어 흩어져 활동하게 됨으로써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은 다시 한 번 조선해방을 위한 그들의 직접적인 목적이 위협받게 될 위기에 처했다. 바로 이때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다녀온 위증민으로부터 영안현 남호두에서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은 제2로군내 조선인들에게 조선해방을 위한 새로운 과업을 제시한 코민테른의 지침을 전달받게 되었다.
☞ 이종석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