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을 때...
차가운 손가락 사이로 입김을 훅훅 불어넣으며 떨고 있는 어린 소년의 얼굴에는 이미 핏기가 없었다.
소년의 이름은 상우... 이제 아홉 살 소년이다.
상우는 1미터 높이 남짓의 작은 언덕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간간히 떨어지는 눈송이가 ‘그 언덕’ 위에 떨어질라치면, 상우는 마치 기계처럼 그것을 두 손으로 툭툭 쳐대는 것을 반복했다. 눈송이가 많이 내리면 내릴수록 상우는 더 열심히 그것을 치우고 또 털어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논두렁 옆으로 하나 가득 선물 보따리를 안고 있는 자상해 보이는 아주머니와 상우보다 두 살 정도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상우의 귓가를 스쳤다. 뭐가 그리도 기쁜 건지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우리 딸, 좋겠네. 빨리 집에 가서 풀어보자꾸나."
"네, 너무 신나요. 진짜 매일매일 크리스마스였음 좋겠다."
상우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그 순간 여자아이와 상우의 눈이 마주쳤고, 상우는 재빨리 눈동자를 돌렸다. 어린 상우였지만,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상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는 그런 상우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여자아이의 모자를 고쳐 씌워주며 말했다.
"뭘 보고 그러니?"
"아니에요. 그냥... 저쪽에 누가 있어서.,,“
아주머니는 상우가 있는 쪽을 대충 둘러보며 대답했다.
"어디? 그쪽엔 아무도 없는데? 어쨌거나 빨리 가자. 아빠가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최고로 맛있는 외식시켜준다고 빨리 오라고 했단다."
아주머니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자아이는 상우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갸우뚱하다가 금방 웃음꽃을 터뜨리며 사라져버렸다.
그들을 쳐다보던 상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좋겠다. 저 애는 선물도 많이 받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볼 때마다 눈망울이 아른거리는 상우였다. 상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매서운 바람이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줄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상우는 그것을 연신 손등으로 훔쳐 내렸지만, 그 자리에는 금세 그만한 물방울이 다시 맺혔다.
상우가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삼년 전 바로 오늘이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아름다운 눈발이 새털처럼 흩날리던 날이었다.
***
"상우는 이 다음에 뭐가 되고 싶니?"
"보디가드... 엄마 지키는 보디가드!"
상우는 누워있는 엄마의 손과 다리를 열심히 주무르면서 대답했다. 엄마의 손과 발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엄마는 손을 뻗어 상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우리 상우, 정말 착하구나."
"평생 엄마 곁에서 엄마를 지킬 거야. 커다랗고 무서운 아저씨들이 다시는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야."
"그, 그래. 엄마도 우리 씩씩한 상우가 진짜 든든해.“
상우의 엄마는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그 누구보다도 슬퍼 보였다. 그 눈동자를 보니 상우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속으로 씩씩거렸다.
순전 그 이상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찾아와 하루 종일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이렇게 몸져누운 것이었다.
때문에 상우는 가끔씩 찾아와 집안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깡패 같은 그 사람들이 미치도록 싫었다. 하지만, 아직은 작은 꼬마에 불과한 상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띄엄띄엄 이야기를 꺼냈다.
"상우야, 혹시... 엄마가 멀리 가고 없으면, 우리 상우는 어떻게 할 거야?"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물어보는 거야."
"그런 소리는 하지 마. 싫단 말이야."
"어미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상우한테 너무 미안하구나."
"아냐, 울 엄마가 어디가 어때서..."
"다른 애들은 돈 잘 버는 아빠도 계시고, 맛있는 것 많이 해주는 엄마도 있고... 그런데 우리 상우는 아빠도 안 계시고, 친척도 없고 엄마가 맛난 거 해주지도 못 하..."
"그만, 그만... 난 엄마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아빤 필요 없어.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걸. 영원히 엄마 곁에 있을 거야. 난 항상 엄마하고만 살 거라고!"
무표정한 엄마의 얼굴에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둘 사이에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엄마... 사랑하니?"
"당연하잖아!"
"많이?"
"그렇다니까!"
"그럼... 엄마가 어디로 가든 우리 상우도 엄마 곁에 있을 거야?"
"당연하지. 난 엄마의 영원한 보디가든데..."
엄마는 모처럼 활짝 웃더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상우가 엄마의 팔을 잡았다.
"엄마 많이 아프잖아. 누워있어."
"아니... 엄마가 상우한테 줄게 있어서 그래."
"응?"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주륵 흘리더니 몸을 겨우 지탱하고는 벽장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상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리스마스인데, 지금까지 엄마가 선물 한번 못해서..."
엄마의 손에는 커다란 초콜릿 하나가 쥐어져있었다. 상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나 주려고 산 거야?"
"우리 상우 주려고 엄마가 샀어."
"엄마 돈 없잖아. 어떻게 이런걸..."
"크리스마스인데..."
"그래도..."
한동안 머뭇거린 상우는 초콜릿을 받아 쥐고는 반을 뚝 잘라 엄마에게 내밀었다.
"자 공평하게, 반반씩..."
"그래, 반반씩..."
평소 같았으면, '엄마는 이런 거 안 좋아해. 상우가 다 먹어야지.'라고 대답했을 터인데, 무슨 일인지 엄마는 그것을 받아 쥐었다. 상우는 엄마도 같이 먹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욱 좋아져 히죽거렸다.
"엄마, 고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야. 아무도 안 부러워. 너무 맛있어 보인다."
엄마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을 하더니 다시 자리에 누워 초콜릿을 한 입 떼어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상우도 엄마를 따라 초콜릿을 베어 먹었다.
"엄마, 너무 맛있어."
"그러네, 달콤하구나. 상우가 잘라줘서 그런지 더 맛있네."
"아껴 먹어야겠다."
"얼마 안 되는데, 다 먹으렴."
"그럼 엄마도 다 먹는 거다!“
"그래."
나머지 초콜릿까지 먹고 나자 엄마는 상우를 끌어당기더니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엄마가 오랜만에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구나."
상우는 엄마의 보드라운 손길을 느끼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이었다.
상우는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엄마는 상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엄마의 몸뚱이가 이상할 정도로 딱딱하고 차갑게 식어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장가와도 같은 엄마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우는 벌떡 일어났다.
"엄마?"
상우는 엄마의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엄마, 왜 이래? 엄마, 엄마!!!"
엄마는 슬픔이 가득한 양면의 미소를 띤 표정으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
잠이 들었던 것일까?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자 상우는 방문을 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둑어둑해지면서 눈발이 더욱 거세어졌다. 상우는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눈송이들아, 너희들까지 내리면 엄마가 너무 춥단 말이야. 엄마 몸이 얼마나 찬데... 엄만 추우면 안 된단 말이야. 맨날 추운데서 주무셨다고... 제발, 그만 좀 내려, 응? 아까 그 여자아이처럼 선물 같은 거 안 받아도 좋아, 앞으로도 착한 일 많이 할게. 그러니 너희들만 내리지 마. 제발 내리지 말라고...'
상우는 어머니의 묘(墓) 위에 셀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이미 새빨갛게 변해버린 손으로 열심히 치웠다. 하지만, 세차게 내리는 눈발은 금세 그 부분을 다시 하얗게 만들었다. 그래도 상우는 쉬지 않고 어머니의 묘에 떨어진 눈을 닦아내고 털어냈다.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면서 상우의 몸도 꽁꽁 얼어가고 있었으나, 상우는 추운 것도 모르고 엄마의 묘를 쳐다보고 중얼거렸다.
"내가 엄마를 지키기로 약속했잖아. 엄마... 빨리 일어나. 여기 엄마의 보디가드 상우가 있어. 내가 춥지 않게 할 테니까 빨리 일어나. 응? 엄마..."
어둠이 세상을 덮으면서 눈이 멈추자 그제야 상우는 엄마의 따뜻함을 느끼며 그 자리에 안기듯 쓰러졌다.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크리스마스 날이 찾아왔다.
"희한한 일도 다 있어요?"
바로 전 날, 여자아이와 함께 선물꾸러미를 안고 그 앞을 지나갔던 인자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이번엔 성경책을 들고 남편과 함께 걸어가다가 상우 엄마의 묘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무슨 일인데?"
"저기 저 무덤 말이에요. 신기하잖아요."
아주머니는 상우 엄마의 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곳은 폭설로 온통 새하얗게 변해있었지만, 유독 상우 엄마의 묘에만 커다란 우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눈이 하나도 쌓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쪽에만 눈이 없으니 멀리서도 눈에 잘 뜨였다. 게다가 눈이 쌓이지 않은 그곳에는 파릇파릇한 풀까지 자라있었다. 아주머니의 남편이 대답했다.
"그러게? 작년에도 저 묘지 위에만 눈이 쌓이지 않더니만... 거참 별일이로군. 참! 근데 당신, 저 묘에 얽힌 이야기 알아?"
"저 묘지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거 있잖아. 여섯 살 박이 아들에게 독이 든 초콜릿을 먹여 살해하고, 자기도 그것을 먹고 따라 죽은 여자. 그렇게도 힘들게 살더니만 결국에는..."
"아, 몇 년 전 크리스마스 때, 말이에요? 이 마을이란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그게 저 묘지였구나. 세상에나..."
"그렇다니까! 불쌍하기도 하지. 오죽했으면, 어린 아들까지... 그러고 보니 그 일이 있던 이후에 크리스마스만 되면 눈이 많이도 내리는구먼. 그 때마다 저 묘지에만 눈이 쌓이지 않고, 정말 묘하단 말이야. 이런 엄동설한에 새파란 잔디와 잡초들이 자라있는 것도 그렇고... 삼년 내내..."
아주머니와 남편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멀리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엄마..."
여자아이는 아빠와 엄마 앞으로 뛰어오더니 숨이 찬지 헐떡이다가 입을 열었다.
"헉헉, 또, 나 안 깨우고, 두 분만 교회에 가시기예요?"
"허허, 우리 딸내미, 곤히 잠들어 있어서 깨우지 않았어. 울 애기는 오후 예배에 가도 되잖니."
여자아이는 두리번거리며 물어보았다.
"그런데 무슨 말씀 중이셨어요? 저쪽을 쳐다보시고 말씀하시던데..."
"아, 아니다. 빨리 교회에 가자꾸나. 이런, 예배 시작하겠다."
여자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사이에 끼어 둘의 손을 잡고는 교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아빠와 엄마의 눈치를 보더니 뒤를 돌아 묘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쪽에는 상우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 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눈에만 그 소년이 보이는 것인지 소녀의 눈빛 속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반짝 스치고 지나갔다. 소녀는 혼잣말로 작디작게 중얼거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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