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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본책) *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

irish15 |2013.08.06 15:33
조회 316 |추천 0

 

 

 

 

 시를 가르치는 문화센터의 강사는 내 또래의 남자 시인이었다. 그는 첫 수업 시간에 엄숙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해서 나를 웃겼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8p)

 

 

 몽테뉴의 [수상록] 누렇게 바랜 문고판을 다시 읽는다. 이런 구절, 늙어서 읽으니 새삼 좋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14p)

 

 

 카그라스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예컨대 남편은 갑자기 아내를 의심한다. “내 마누라 얼굴을 하고 꼭 내 마누라처럼 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누가 시킨 거지?” 얼굴도 똑같고 하는 일도 똑같은데 아무래도 남처럼 느껴진다. 낯선 사람으로만 보인다. 결국 이 환자는 낯선 세계에 유배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얼굴의 타인들이 모두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는다. (17p)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망각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상관하지 않는다. (28p)

 

 

 “쓰인 모든 글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33p)

 

 

 문화센터에서 만난 사람이 내 시가 좋다며 자기가 내는 문예지에 실어주겠다고 했다. 3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러라고 했더니 얼마 후 전화가 왔다. 책이 나왔다며 어디로 보내줄까 묻는다. 그러고는 자기 계좌번호를 불러준다. 돈을 내고 사는 거냐니까 다들 그렇게 한다고 했다. (-) 어쨌든 나는 그 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38p)

 

 

 선사시대 인류의 유골을 조사해보면 태반이 살해당한 것이라 한다. 두개골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뼈가 예리한 것으로 잘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연사는 드물었다. 치매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남기도 어려웠을 테지. 나는 선사시대에 속한 인간인데 엉뚱한 세상에 떨어져, 거기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그 벌로 치매에 걸린 것이다. (39p)

 

 

 우리 지역의 연쇄살인 때문에 요즘 TV에 범죄 전문가들이 많이 나온다. 프로파일러인가 뭔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인사가 이런 말을 했다. “연쇄살인은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습니다. 더욱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다음 희생자를 집요하게 찾게 됩니다. 중독성이 강해서 감옥에 들어가서까지도 그 생각만 합니다. 다시는 살인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들면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그 정도로 강한 충동입니다.”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 (42p)

 

 

 프랜시스 톰프슨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48p)

 

 

 책을 읽는데 갈피에서 메모지가 툭 떨어진다. 오래전에 베껴 적은 것인지 종이가 누렇게 바랬다.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 (62p)

 

 

 “박주태는 어떻게 만났지?”

 아침을 먹다 은희에게 물었다.

 “우연히요. 정말 우연히요.”

 은희가 말했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 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63p)

 

 

 메모지에 ‘미래 기억’이라는 말이 뜬금없이 적혀 있다. 뭘 보다가 적어놓은 걸까. 내 필체인 것은 분명한데 무슨 뜻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래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식사하시고 30분 후에 약을 드세요” 같은 말을 기억하는 게 바로 미래 기억이란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 일까. (93p)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98p)

 

 

 몇 년 전, 치과에 갔다가 몰입의 즐거움 어쩌고 하는 책이 있기에 대충 읽었다. 저자는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다. 이보게, 저자 양반, 나 어릴 때만 해도 아이가 하나에만 몰입하면 어른들이 걱정을 했다네. 애가 외골수라며. 그때는 오직 미친 사람들만 한 가지에 몰입을 했지. 오래전의 내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골몰하여 얼마나 깊이 몰입했는지, 거기에서 얼마나 큰 즐거움을 얻었는지를 당신이 안다면, 몰입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안다면, 그 입을 다물 거야. 몰입은 위험한 거야. 그래서 즐거운 거고. (112p)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출발 카운터의 항공사 직원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바위처럼 확고하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태연하게 카운터로 다가가 여권과 항공권을 내민다.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죄송하지만 하루 일찍 오셨다고 말한다. 그는 직원이 잘못 봤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오.”

 다른 직원까지 가세해 그가 날짜를 잘못 알았다고 말한다. 더 이상은 우길 수가 없게 된 그는 실수를 인정하고 물러난다. 다음날 그가 다시 카운터에 가서 탑승권을 내밀면 직원은 똑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하루 일찍 오셨네요.”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된다. 그는 영원히 ‘제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126p)

 

 

 한 남자가 찾아와 만났다. 기자라고 했다. 그는 악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요?”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1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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