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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 그날 밤,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나는

sadcafe |2013.11.13 17:58
조회 484 |추천 5

철커덕



거실에서 자고 있던 나는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떴다.
누굴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센서등이 고장난 신발장에서 현관을 지나 거실에 있는 어항 근처까지 왔을 때, 비로소 그 어항 안에 켜져있는 랜턴의 빛으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언니의 전남자친구.


그런데 왜 저 남자가 지금 이시간에 우리집을 들어온 거지? 열쇠는 또 어디서 난 거야. 분명 몇일 전 헤어졌다고 했는데.


현관에서부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그에게서 역겨운 술냄새가 풍겨왔다.


그 남자는 아직 내가 깬 걸 모르는지, 날 지나쳐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고 포도주스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생각해 보면 그는 자주 포도주스를 사오곤 했다.


1/3정도 남아있던 포도주스를 다 마신 그는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쉬더니 식탁 앞에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언니는 담배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그 사람이 집에 찾아 오는 날이면 키스하기 전 어김없이 입냄새 검사부터 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언니와 나의 집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



지금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저 사람이 알아 봤자 그다지 좋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기척을 줄이고 실눈을 뜬 채로 가만히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언니가 아끼던 화분에 담배를 짓이겨 끄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부엌에서 잠시 주섬거리던 그의 왼쪽 손에 무언가 금속성의 희끄무레한 것이 어렴풋이 비쳐 보였다. 에이, 설마.


설마.


그가 다시 내 앞을 비틀거리며 지나갈 때, 어항의 푸르스름한 불빛에 비쳐 보인 그것은 분명히 칼이었다.


그리고, 날 다 지나쳐 갔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그가 멈춰서서 내쪽을 돌아봤다. 난 눈을 꼭 감고 생각해봤다. 왜지. 뭔가 잘못이라도 한건가. 도대체 저사람이 지금 왜 저러고 있는거지. 왜. 왜.


저벅. 저벅.


그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 머리맡까지 오더니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만 있었다. 바보같게도 그렇게 있으면 알아서 갈 거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봐 왔던 이 남자는 그렇게까지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이 내 귀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손은 이내 목 아래로 흘러 어깨,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얼마간 내 몸을 쓰다듬던 손이 멎더니,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지독한 술냄새, 담배냄새.

다시 일어선 그는 피식 하며 뜻모를 실소를 흘리고는 언니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깐의 비명. 잠깐의 신음소리. 그리고 또다시 잠깐의 비명.


그 남자가 다시 문을 닫고 나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냄새와 담배냄새에 더해 옅은 언니의 향수냄새와 비릿한 냄새. 귀와 코로 파악한 지금 이 상황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개같은 상황'이 분명했다.


그는 언니의 방에서 나와 여전히 가만히 누워있는 내 옆에 앉았고, 또다시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툭.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거실 카펫 위로 던졌다.

무척이나 떨리는 호흡으로 담배를 다 태운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가 신발을 신는 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는데, 언니의 방쪽에서 무언가 기척이 느껴졌다.


언니가 걸어 나왔다.


어제 저녁 나에게 잘자라고 인사하고 방에 들어갈 때 입고 있던 원피스는 엉망으로 찢겨진 데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팔과 다리엔 군데군데 멍과 상처들이 보였다.


언니는 방 문앞에 서서 증오어린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그런 언니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내 집 문을 열고 나가버렸고, 문이 닫히자 마자 언닌 나에게 잠시 나갔다 온다는 짤막한 한마디를 하고 뒤따라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언니를 기다린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날이 밝을 무렵이 다 되어서 언니가 집에 들어왔다.
나갈 때와 똑같은 차림의 언니는 오자마자 뜬눈으로 거실에서 밤을 지새고 있던 날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울고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날 안고 눈물을 흘리던 언니는


아침햇살이 조금씩 거실을 적시자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있는 언니는 더이상 내게 밥을 챙겨주지도 않고, 예전처럼 따뜻하지도, 향기롭지도 않았다.

 

그 때 목청껏 짖어봤더라면, 죽을 각오로 깨물어보기라도 했더라면 언니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수도 있을텐데.

 

 

그저 후회할 뿐이다.

그날 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언니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던


한낱 개일 뿐인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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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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