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박정희의 친일행각은 불타는 출세욕의 발로
“교사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로, 패전 일본군 장교에서 광복군으로, 조선경비대 장교에서 군내 남로당 프락치로, 남로당 프락치에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며 끝내 살아남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고 18년 일인독재 철권통치를 일삼다가 심복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가다.”
어느 한국 군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생존력과 출세의지가 남다르게 강인했다. 말수는 적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혼자만의 계획을 실천하는 데 주력했다. 언제나 힘이 있는 쪽에 가담했지만 그 기대가 사라지면 눈치 볼 것 없이 변신하고 전향했다. 그의 개인적인 욕망 추구 때문에 수많은 주변사람들의 삶이 망가졌고 끝내 본인 자신도 비운에 사라져야 했다. 바로 박정희의 눈부신 변신 이야기다.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두고 그동안 말이 많았다. 재판까지 거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事典)》에 수록된 것으로 일단락됐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아래서 육군 보병중위를 지냈다는 것이 뭐가 그리도 큰 매국역적(賣國逆賊)에 해당되느냐는 식의 항변이 나왔다. 유족은 물론이고 박근혜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등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친일행각은 한국인 전체가 식민지 지배를 받던 불행한 시대에 그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뼛속까지 스며든 ‘친일DNA’라고 분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1965년 한일협정도 굴욕적인 외교협상 자세 때문에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 박정희가 특별 지시해 추진하고 체결한 한일협정은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이 견지해 온 일본의 식민지 지배 사죄 요구와 정당한 배상청구권을 크게 망쳐버렸다. 이때 한·일 간 교섭을 배후조종한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이 바로 박정희의 옛 일본군 상관들이었다.
박정희가 휘두른 군사철권통치는 일본군 장교 시절에 일본 군국주의의 독소가 체질화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황국신민화 정책 시기의 사범학교 5년, 만주국군관학교 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2년 등 모두 9년에 걸쳐 남다른 군국주의 교육을 이수했다. 그는 사범학교에서는 성적이 꼴찌였지만 군사학교에서는 최우등이었다. 거기서 일본의 군국주의 사상을 숭상하는 정신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오죽했으면 100년도 더 지난 일본 메이지유신의 명칭을 그대로 답습해 유신독재체제를 선포했을까? 이 때문에 미국의 아시아학자들은 한국의 산업화가 일본의 식민통치에 의해 씨앗이 뿌려졌다고 말한다. 통탄스러운 것은, 일본 사무라이들이 주도한 메이지유신에 대해 교육받고 그것을 숭배하게 된 박정희가 그 증거라는 사실이다.
1946년 10월 초, 대구를 중심으로 영남지방에서 민중봉기가 터졌다. 봉기의 직접적인 동기는 친일경찰과 관료의 전횡 그리고 식량 등 생필품 유통의 자유방임주의적 양극화였다. 그런 민중의 발화 요인에다 좌익 남로당 계열이 불을 붙인 것이다.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좌우합작위원회가 경찰 총수 조병옥을 불러 따졌다. 좌우합작위의 공동대표는 중도우파의 김규식, 중도좌파의 여운형이었다. 이들은 친일파를 숙정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병옥은 흑판에 영어 단어를 써가며 이렇게 말했다.
“친일도 다 비슷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pro-Jap이 있고, pro-job는 그것과 다릅니다. pro-job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한 것이니 친일이라고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pro-Jap(Japan)인데, 이 경우는 단순히 먹고 사는 것 이상으로 제국주의 일본을 위해서 협력하고 출세한 친일파입니다.”
조병옥은 이 말이 설득력 있는 친일파 구분의 근거일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행각은 과연 어떤 것일까?
● 첫 번째 변신, 교사에서 일본 군국주의 장교로
1939년 3월 31일,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에서 발행된 유력지《만주신문(滿州新問)》에 “한 조선인이 혈서로써 군관지원을 했다”는 이색적인 기사가 실렸다.
˝3월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 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깊이 감격시켰다.
그는 편지에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밝혔다.˝
당시는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이 강압되기 전이어서 박정희란 이름이 그대로 사용됐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부터 시행됐다.
만주국 군관은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군관학교 입교 연령도 16세 이상에서 19세 이하로 제한되어 있었다. 대구사범을 졸업한 박정희가 문경공립소학교에서 3년간 근무한 뒤 처음 만주국군관학교에 지원할 때 나이가 23세였다. 원칙적으로 입학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는 두번 낙방한 뒤 혈서를 써서 군관학교에 보내고 세번째 지원한 1940년 4월에야 입교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박정희는 첫번째 변신으로 소학교 교사에서 일본군 장교로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일제는 교사를 상당히 우대했다.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려면 교사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인으로 말단 공무원인 면서기를 하면 시골에서는 그런대로 잘 살았다. 그런데 면서기 월급이 20원일 때 사범학교 학생에게 다달이 지급되는 관급 장학생이 25원이었다. 교사가 되면 월급은 물론 일반 공무원보다 훨씬 많았다. 더구나 교사는 사회적으로 존경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박정희는 그런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혈서로써 자원한 것이다.
박정희는 군관학교에 지원한 이유에 대해 “긴 칼을 차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도 아니고 교사 생활을 3년이나 경험한 사회인이 단순히 긴 칼을 차고 싶어서 군관학교에 갔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그가 차고 싶었던 ‘긴 칼’이란 바로 권력이었다.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권력의지와 출세주의에 사로잡힌 박정희의 첫 결단이었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군 장교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행각에 대해서 겨우 육군 보병중위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군국주의 체제에서 육군 보병중위란 시골 군수나 경찰서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위상이었다. 박정희가 일제에 충성하는 혈서까지 써가면서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지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정희가 입학한 신경의 만주국군관학교 2기생은 모두 250명으로 조선인은 12명이었다. 이 중엔 5·16쿠데타 당시 제1군사령관이었던 이한림도 있었다. 박정희는 어렵게 입학한 만큼 만주국군관학교에서 열과 성을 다했다. 나이도 동기생보다 4세~5세나 위이고 사회생활 경험도 그만큼 많은 박정희는 군관학교 2년 과정을 1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성적우수자로서 1942년 10월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때 이한림도 우등 졸업자로 함께 일본 육사에 편입했다.
일본 육사에서도 박정희는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무장하고 열심히 군사훈련에 임했다. 일본 사무라이를 동경한 그는 진지한 학습태도로 일관한 모범생이었고 충성스런 생도였다. 그의 육사 졸업성적은 전체 3등,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육군대신상을 수상했다.
만주국군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사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그가 단순히 학습능력이 뛰어난 수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구사범에 진학한 것 자체가 수재라고 하지만 거기서의 성적은 꼴찌였다. 대구사범 때 그의 성적을 보면 4학년 73명 가운데 73등, 5학년 70명 가운데 69등이었다. 이렇게 사범학교 때 열등생이 군관학교에서 우등생이 된 것은 오로지 황군정신과 사무라이에 대한 흠모가 에너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후 1944년 12월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구국군 보병소위로 임관해 일제 패망 직전까지 만주국군 중위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군국주의 일본군 장교로의 변신은 노력에 비해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기 때문에 막차를 탄 꼴로 끝난 셈이었다.
● 두 번째 변신, 다카키 마사오 중위에서 광복군으로
박정희의 두번째 변신은 재빨랐고 시의 적절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일본군의 소탕 대상이던 광복군으로 재빨리 찾아 들어갔다. 박정희의 후손과 숭모자들은 그가 복무한 만주국군은 일본의 군대가 아니며 독립군을 토벌한 부대가 아니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는 일본 관동군 사령부의 직접통제를 받았다.
여기서 박정희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그는 일본 육사 졸업 후 본토 제14연대에 배속되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만주 목단강(牡丹江) 부근의 영안(寧安)에 주둔한 만주국군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화북지방의 열하(热河)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되었다.
박정희가 만주국군 소대장으로 주둔한 영안은 간도의 독립군 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 머물던 독립군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열하는 일본군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이 치열했던 지역이다. 중국의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1군단(第一軍團), 국민혁명군(国民革命軍) 제8로군(第八路軍), 장제스[蔣介石]의 군대인 국부군(國府軍),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산하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산하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그리고 소규모의 항일유격대들이 이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만주국군 장교로서 박정희가 직접 조선인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작전에 참가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당시 관동군이나 만주국군은 모두 일본 군국주의의 첨병으로서 광복군(光復軍)을 비롯한 항일투쟁세력의 주적이었다. 더구나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관동군이나 만주국군은 모두 광복군의 공식 적군이었다.
일제의 패망과 한반도 해방이라는 뜻밖의 소식이 만주의 서쪽 변방인 열하에서 복무하던 박정희에게 전해진 것은 8월 17일이었다. 박정희는 같은 부대에 있던 만주국군관학교 선배들인 신현준 상위와 이주일 중위(5·16쿠데타 정국에서 최고회의 부의장) 등과 상의하고 베이징으로 가기로 했다. 이들이 9월 21일경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그 주변지역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당시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내 일본군에 복무하는 10만여명의 조선인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중국이나 연합국 측의 미국은 이 계획에 무관심했고, 임시정부로서는 10만여명에 이르는 병력을 무장시키고 조직화할 능력이 없었다. 어쨌든 박정희가 도착한 베이징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최용덕을 지대장으로 한 북평잠편지대가 설치됐고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광복군에 들어갔다.
이때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먼저 와 있던 장준하는 박정희의 일본군 출신 전력을 지적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이렇게 껄끄러웠다. 일본군에 강제징집당한 장준하는 일제에 부역하기 싫어서 일제 패망 전에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들어온 반면 박정희는 혈서로써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가 세상이 바뀌자 금세 변신하여 보신책으로 광복군을 찾아왔으니, 장준하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가 광복군에 들어간 것은 자신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것을 뉘우쳐서도 아니고 무슨 사상이나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일제가 패망한 마당에 이제 살 길은 광복군에 묻어서 해방된 조국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중국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로서는 그 편이 귀국하기에도 가장 편하고 좋은 방책이었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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