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Ⅰ.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한 최초의 반역 5·16쿠데타
5. 반란군의 3대 타킷
박정희는 군사반란에 일부 불만분자들만이 아니라 군부 전체가 참여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육참총장 장도영을 포섭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것은 무혈 쿠데타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유엔군 모자를 쓰고 있는 한국주둔 미국군 사령부 측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박정희에게 장도영은 단순히 상관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출해준 은인이었다. 장도영 자신은 일본 동양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 학병으로 일본군에 들어갔지만 일본 육사 출신인 박정희가 군사 지식과 역량 면에서 우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았다. 그런 박정희가 6·25동란 전부터 육군본부 정보국장이던 자신의 부하로 근무했으니 호락호락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1948년 여수·순천 군사반란 때 남로당의 군사 프락치인 것이 발각돼 구속되자 장도영은 그의 구명운동에 나선다. 당시 일본군 출신 다수가 군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장도영은 정일권·백선엽 등과 함께 박정희를 구출할 수 있었다. 물론 박정희가 풀려난 것은 군 내에 있던 남로당 조직을 진술한 ‘배신’이 결정적 배경이었지만, 다른 한편 장도영 등이 요로에 탄원한 것도 실질적 효과를 보았다. 박정희가 풀려나자, 장도영 등이 요로에 탄원한 것도 실질적 효과를 보앗다. 박정희가 풀려나자, 장도영은 예편당해 민간인 신분인 박정희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기용한다. 일본군 계열의 끈끈한 선후배 관계였다. 그러다가 6·25동란이 터지자 육본 정보국의 문관 신분이던 박정희를 다시 현역 소령으로 복귀시켰다.
4·19혁명 후에도 제2군사령관이던 장도영은 박정희가 육사 8기 정군파 김종필 등의 하극상 사건으로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밀려나 갈 곳이 없을 때 제2군 부사령관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어차피 박정희는 소장(少將)에서 중장(中將)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없었으며 그래서 1961년 5월말 옷을 벗게 돼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4·19혁명 후 여론에 편승한 육사 8기 정군파의 보스 노릇을 했고, 장도영은 3·15부정선거 때 제2군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그 부정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군운동의 명분 중 하나는 군 내 부정선거 책임자 문책이었다. 여기서 장도영은 정군파의 보스 박정희를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장도영과 박정희는 상당히 긴밀하게 교유하는 직속상관과 부하 사이가 된 것이다.
① 장도영, 반란을 묵인하다
1961년 4월 10일 낮, 육군본부 총장실.
갑자기 찾아와 혁명 거사를 말하며 영도자로 모시겠다는 박정희 앞에서 장도영은 당황했다. 우선 육군참모총장이 군사반란에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육참총장에게는 정보수사기관으로 육군방첩대와 헌병대가 있다. 언제든 군 내에 범죄혐의자가 있으면 체포하고 수사해서 기소하게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를 체포할 만한 결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가 행동에 나서지 않도록 설득했다.
“이봐요. 박 장군, 나는 그런 허무맹랑한 혁명 같은 것에 협조할 수 없어요.”
“그럼, 묵인만이라도 해주십시오.”
박정희가 장도영에게 묵인을 요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자신이 주도하는 군사반란이 벌어져도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진압군 동원을 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장도영은 처음에 “묵인해 달라”는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나는 협조도 묵인도 할 수 없소.”
“각하, 이 썩어가는 정치와 도탄에 빠진 민생고 때문에 정의감 있는 장교들이 나서는 것입니다. 저와 함게 그 장교들이 각하를 모시려고 합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끈질긴 요구와 경의 표시에 또 한 번 엉거주춤했다. 설마하니 박정희가 나라와 군부를 망가뜨리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유엔군의 모자를 쓴 한국주둔 미국군이 5만명이나 있는 데다 한국군 전방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도 유엔군 사령관이 쥐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또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군 부대를 동원하려 해도 유엔군 사령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사실 군 작전권이 한국주둔 유엔군 사령관에게 있기 때문에 진압군의 동원이 육참총장이 전권사항은 아니었다. 장도영은 일단 박정희에게 책임을 던지기로 했다.
“나는 들은 얘기를 밀고하거나 무력으로 막지는 않겠소. 박 장군이 알아서 하시오.”
“그럼 묵인하시고 거사가 성공하면 저희 지도자가 돼주시겠다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장 각하.”
박정희는 그 후 장도영에 대해 집중 관리에 들어갔다. 며칠 후엔 장도영의 측근 장성 중 한 명인 논산훈련소장 최홍희를 보내 쿠데타군의 규모가 전군에 퍼져 있음을 귀띔하게 했다. 장도영은 최홍희가 박정희에 포섭된 것을 처음으로 본인에게서 확인하고 내심 놀랐다. 쿠데타 동조세력이 얼마나 될지 정확히 헤아려지지도 않았고 더욱 불안해졌다. 얼마 지나 박정희는 또 사람을 보내 정권 장악 후 정부 운영의 방향과 정책들에 대한 설명자료도 전달했다. 일련의 심리전이기도 하고, 또한 군사반란의 공범으로 만드는 공작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박정희는 상당한 비밀 누설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장도영의 마음을 사로잡느라 무진 애썼다.
② 장도영을 이용하는 박정희
박정희와 육사 8기 하극상 정군파는 군사반란 D-데이를 당초 4·19혁명 1주년기념일로 정했었다. 이들은 혁명기념일에 학생들의 제2봉기가 터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될 때 혼란상과 국가안보 위기를 이유로 군사쿠데타를 거사할 흉계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중했고 서울거리는 조용했다. 숨죽이며 사회혼란상을 기대하던 군사반란 세력은 혀를 차며 학생들을 원망했다.
1차 거사 기회를 놓친 군사반란 세력은 다시 5월 12일을 D-데이로 정했다. 그런데 쿠데타 작전의 선봉부대인 박치옥의 공수단에 그날 서울 외곽지역에서 훈련을 하라는 육군본부의 훈령이 떨어졌다. 박정희는 애가 탔다.
5월 11일, 일이 어그러진 상황에서 박정희는 반란군 조직을 점검해야 했다. 그는 서울에서 쿠데타 핵심그룹을 만난 뒤 급거 전방으로 가 제5사단장 채명신을 만났다.
“채 장군, 별 일 없지요. 일부 기밀이 새 나가기도 하고 또 공수단이 하필 육본 훈련에 걸리기도 해서 거사 날짜가 차질이 생겼소. 그러나 조속히 날을 다시 잡아서 행동해야 할 것 같소.”
“그런데 장도영 총장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장도영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반란군 가담자 중 고급 지휘관일수록 육군 총수인 장도영의 의중을 궁금해했고 박정희에게 그것을 확인하려 했다. 거사 전에 육참총장의 생각은 매우 중요한 변수였다.
채명신은 만약 육참총장인 장도영이 쿠데타를 진압하겠다고 마음먹을 경우 일이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했다. 게다가 공수단장 박치옥이나 제6군단 포병사령관 문제준 등 육사 5기 동기생들과 함께 자신도 장도영과는 가까운 처지였다. 박정희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도영에 대해 심중의 일면을 드러냈다. 그는 장도영의 속마음과 결단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글쎄, 장 총장은 기밀누설에 대해 정보 보고를 들었을 텐데 별 조치가 없어요. 그가 큰 위험인물은 아닌 것 같소. 장 총장은 원래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자지, 그래서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언제 어떻게 태도가 바뀔지 몰라요. 우리가 그 사람의 변덕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빨리 단안을 내려야 하겠소. 내 신속하게 계획 전반을 검토하고 결정을 알려줄 테니 차질 없이 합시다.”
우유부단하고 사람 좋은 장도영의 오랫동안 반란을 꿈꾸며 권력욕으로 다져진 박정희, 5·16군사반란은 두 사람의 기싸움에서도 승부가 이미 예정돼 있던 셈이다.
③ D-데이는 5월 16일, 총병력은 4천명
전방에서 서울로 온 박정희는 반란군 핵심들을 만나 세번째로 거사 날짜를 검토했다. 두번째로 어그러진 5월 12일은 금요일이었고 여기서 가능한 한 가장 가까운 날을 잡아야 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군용 캘린더에 ‘1군 창설기념일’이라고 쓰여 있는 5월 15일, 월요일을 응시했다. 그날 야전군 고급지휘관들은 모두 제1군사령부 기념식에 참석하느라 부대를 떠난다. 지휘관의 공백 상태에서 하루 만에 주요 점령계획을 완료하고 국민에게 전파하기만 하면 거사는 성공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무총리 장면과 국방장관 현석호도 제1군사령부 창설 기념식에 참석하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장면은 쿠데타의 주요 행동계획상 거사 즉시 체포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야 정부가 무력화되고 새로운 ‘군사혁명위원회’가 들어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정부 전복이었다. 그런 장면이 제1군사령부에 가 있을 때 거사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무총리가 제1군사령부에 앉아서 진압 명령을 내리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작전으로는 매우 패착이 아닐 수 없다.
반란군 지도부는 묘수는 짜냈다. 국무총리 장면이 서울로 귀환하고 야전군 지휘관들은 제1군사령부에서 파티를 가진 후 잠들었을 시각인 5월 16일 0시, 그 시각이야말로 최고의 H-아워였다.
반란군의 제1선봉은 박치옥과 오정근, 차지철 등이 중심을 이룬 공수단이었다. 그리고 전 해병대사령관 김동하와 해병여단장 김윤근 등이 지휘하는 해병대가 제2선봉을 맡았다. 이어 제6군단의 포병사령관 문제준과 대대장 신윤창이 지휘하는 포병단, 서울의 김재춘이 참모장이 6관구사령부의 예하 병력과 30사단, 경기도의 33사단, 그리고 전방 체명신의 5사단 등이 주축이었다. 병력을 헤아려보니 도합 4찬여명, 공수단과 해병여단은 한강교를 넘어오게 돼 있고 6군단 포병단 등 전방부대는 의정부와 미아리를 거쳐올 것이다.
거사의 핵심 3대 타깃은 육군본부와 국무총리 장면의 거처인 반도호텔 808호실, 그리고 남산의 중앙방송국이었다. 이어 중앙청과 서울시청 앞 광장 등 서울의 관가 요소를 점령한다. 반란군의 작전계획은 주도면밀하게 군권 장악과 정부 전복, 그리고 민심 장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먼저 군 지휘부를 점령해 무력을 장악한 뒤 권력을 찬탈하는 것은 전형적인 수법이다. 박정희의 후예 전두환도 1979년 12·12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뒤 정권찬탈에 나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