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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는 왜 죽음으로 말해야 하는가

참의부 |2014.01.02 20:54
조회 43 |추천 0

 

 

2014년 첫 일출이 울산 간절곶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찬란한 빛은 아니지만 두터운 구름 뒤로 붉은 해는 천천히 떠올랐다. 진하고 두터운 구름에 빛은 보이지 않아도 그 너머로 반드시 해는 또 다시 뜬다. 

 

그래, 지금 빛이 보이지 않아도, 해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변화의 조짐은 희미하지만 우리는 옳음을 믿는다. 꿈꾸는 청마의 해를 앞두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저녁이었다. 한 사람이 또 분신자살을 선택했다. 2013년의 대한민국에 흐르고 있는 어둠의 시간들에게 아프게 말을 건네며 떠났다.

 

십대부터 느껴오고 마음 깊이 쌓여진 사람들을 향한 감정들은 나의 마음에서 가장 좋은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가장 꺼내기 어려운 고통이기도 하다. 그 감정을 만나게 해주는 선택의 상황들에 놓이면 저절로 번지는 하얀 웃음과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고통이 공유된다. 삶은 늘 그렇게 절망과 희망을 오가며 진행되었나 보다.

 

우리 사회는  탐욕적인 권력자들이 갉아먹은  공동의 선함들이 시체처럼 널려져 있다.  강자로 군림하려는 그들은 개인들에게  행복과 불행을 오가며 곡예를 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하나의 사상만으로 사회를, 그 개인을 규정지을 순 없지만 각자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가치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차마 말을 건네기가 불편한 한 개인이 선택한 자살이라는 죽음에 대해 자신만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나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도하며 한 해를 열고 있다.

 

 

    ▲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1878년 톨스토이의 상상력은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 슈줴트를 '결혼'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두 주인공을 각각의 다른 선택으로 이끌어 갔다.

 

안나와 레빈. 그 시대에 놓인 같은 인간으로서의 선택이 아닌 여자와 남자의 선택으로 인한 결혼은 결말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19세기의 문학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선택으로 빚어지는 결말은 21세기인 지금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상상력은 의미가 다르게 작동한다. 자본이 노동을 잠식하고 기득권을 휘두르는 이들의 넘치는 탐욕으로 세상은 달리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겪는 고통을 공감하고 분노의 눈물로 날 선 아침을 맞는 상상력이다. 이런 상상력이 발휘될 수도 없다면 삶은 참으로 피폐해질 것이다. 그것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 해도 타인의 고통을 느껴줄 수 있는 힘이리라.

 

제정러시아 시대의 귀족들이 생각하는 노동의 의미와 노동을 통해 생존을 해야만 하는 농노들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놓여 있다. 허나 현대 사회, 자본에 의해 부여되는 노동의 가치도 모양새만 달리 했을 뿐이다.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과 결코 다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놓인 자리에서 대상을 객관화 시키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이지 싶다.

 

내 삶의 모든 관계는 인간으로서 발생되는 거였다. 무언가 특수한 대상으로서 사랑하거나 연민에 빠지거나 분노에 놓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과는 다른 그가 놓인 사회적 위치에 따라 이해 관계, 혹은 기타 감정들을 갖고 있는 것같아 슬퍼지기도 한다.   이 책의 주인공  '레빈'은 삶을 향유하는 방식에서 톨스토이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만나며 그가 추구하는 '선(善)'이 나아갈 길을 따르지만 여전히 사회에 계속 물음표를 던진다. 권력가들이 이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개인의 탐욕을 줄여나간다면 이런 죽음으로 시작될 한 해는 아닐 것이다. 

 

그 사회가 지닌 인습과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한 개인에게 그것은 혁명인 것일까. 허나 그것은 이성적인 태도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누구나 머리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정의라는 것과는 무관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소설 속 허구가 현실에서 사실처럼 가능한 일이 되어 왔다. 그런 상황이 우리들의 대한민국에서 기획, 연출되고 있다. 머리로만 아는 것들은 사회적으로 주입되어 학습된 것이기에 자신만의 만족감에 얽매인 노예로 추락한 삶이 될 수 있다. 내 마음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이로서 느끼는 공감이다.

 

우리는 사회적 복지를 모든 사람에 대한 '정'이나 '사랑'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 판단 하나에 얽매여 합리적 사고, 운운하는것에 불과하다면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게 없을 것이다. 돈만으로 해결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의 레빈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현상들에서 멀어지려는 자신에게 스스로 생각한 것들과 그의 감정들을 삶에 반영하고자 한다.

 

고전문학들을 읽어 가는 시간동안에는 밤새 작품 속 주인공들에 취한다. 그들이 떠난 아침에도 여전히 이들로부터 받은 영감에서 깨어나지 않길 바라며 우리들의 세상을 생각하곤 한다. 문학적 상상력에 힘입은 내가 전사처럼 괴물같은 권력자들을 향해 우뚝 서 있도록 두 다리에 힘을 실어 주기도 한다. 

 

 

    ▲ 2012년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안나 카레리나>

 

 

소설 속의 등장인물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과 영화의 이미지는 대단히 다른 차원으로 전해진다.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한 개인의 선택에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는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시선이 다른 삶 속에서 추구했던 진실들 앞에서 한 개인의 선택에서 올 수 있는 결과들을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원작이 영화 한 편으로 표현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2012년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안나 카레리나>가 그렇다.

 

책에서는 러시아 문화의 정서가 누군가에게 우주의 기운, 그 힘을 빌어 고스란히 전달될 수도 있겠다는  설렘도 만난다. 또한 어느 한 시간대에 개인에게 각인된 사랑은 그저 봉인되는 것으로 멈추어지기도 한다. 톨스토이의 '안나'는 사랑을 도그마로 여긴 이들을 적절하게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개인적 시선에 머물게 하고 있다.

 

한 방향을 향해 내달리는 치명적인 열정은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것은 암울한 광기이기도 하다. 특히 한 대상을 향해 내뿜는 선택은 진실을 왜곡하고 만다. 사랑은 결코 하나로 합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다.

 

안나의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내던진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향유를 모독한 행위일 수도 있다. 또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집착의 또 다른 결과이기도 하다. 안나는 자신이 갈구한 사랑을 포기한 것이다.

 

 

 

 

 

죽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어 지는 것이 아닐까. 한 개인에게 담아 둔 정지된 시간의 흐름은 그 감정을 결코 바꾸거나  대체할 수는 없는가 보다. 허나 다른 빛으로 이어져 가는 것도 같다. 감정을 순간적으로 여긴다면 쉽게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렇기에 안나의 선택은 남겨진 이의 가슴에 평생동안 흔적을 남기며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 것이기도 하다.

 

지독히 이기적인 안나를 이성적으로는 지지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감정은 그녀의 선택을 느낄 수 있다. 낯설게 다가오는 이 땅의 수많은 죽음, 사회적 타살이라 할 수 있는 그 개인들의 자살이 말하려는 소리에 마음이 시킨다. 왜, 우리는 죽음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을 만나면서 나를 돌아본다. 십대를 어떤 생각으로 지나왔는가에 따라 나머지 삶의 시간대가 선택되고 그에 따른 길은 열려졌다. 스스로 찾아갈 변화의 모색이 없다면 삶은 그저 그렇게 사회에 의해 휘둘려 지나갈 뿐이었다.

 

자기를 잃은 채 실존이 아닌 타인들이 만든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개인적인 것일지라도 가치있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의 가치들이 명료해 지고, 그것들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런 마음들을 내 안에 담고 살아가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또 다시 누군가에게로, 인류는 그렇게 살아왔던 거였다. 

 

이 사회는 내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제대로 '앎'은 선동가들에 끌려다니지 않을 저항의 힘을 준다.

 

누구는 촛불로 또 누군가는 분신자살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의 몸짓들을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외부에 의한 잠시의 자극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늘 한계에 부딪힌다. 본연의 내가 온전하게 이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잠시의 변화에 머물다가 이내 되돌아 간다. 그것은 자기 만족감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는 언제나 개인의 선택을 긍정의 언어로 현혹해 왔을 뿐이다. 우리들의 의식은 자본주의의 시스템에 의해 파편화 되었지만 희망은 아주 작은 일들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것이 선(善)의 의미일 것이라고 톨스토이의 레빈은 시대를 초월하여 말을 건넨다. 

 

한 개인이 추구하는 아주 작은 선(善)이 공공의 선으로 확대되어 진다면 우리 사회는 공동체의 희노애락을 공감하며 살아갈 행복한 시간들로 채워질 수 있다. 그 선(善)은 내 안에 차오르는 사랑의 힘으로 발휘되는 것이기에 건네고 있는 나는 행복하기도 한 것이다.

 

향유하는 삶은 아름답다. 진하고 푸른 새벽의 정기로 충만한 시간들이 스치듯 지나지만 그 떨리는 작은 움직임들에서 다시 또 꿈틀거리는 고독이 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이토록 삶은 지난하지만 구름이 걷히면 떠오른 해는 따뜻하고 빛으로 눈부시다.

 

진화 생물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안나카레리나 법칙'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이 작품의 첫 구절,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법칙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대한 사회화에 의해 한 개인들의 고유함들이 '법칙'으로 규정되는 일들에 익숙해진 것이겠지. 내가 포기했기 때문에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적잖게 많았다. 그런 자기고백이 다음 해에는 나에게 또 너에게 적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이옥현 미디어협동조합「국민TV」뉴스 시민논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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