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에 대한 것도 언급을 하셨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참 찾았네요
아래글은 님들이 그토록 부정하는 천주교 신자의 글이 아니라 동방정교 신자께서 올린 글입니다.
개신교에서 천주교의 성상을 비방하면서 동방정교를 인용하는 것을 보고 참 저들은 무지한 거짓말에 속아넘어가는 구나 하고 느꼈죠
거짓에 현혹되지 말라고 동방정교 신자가 올린 글을 퍼왔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성상에 대고 기도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데 기도에 대해 잘 모르니 나오는 말입니다.
군대에서 몰래 부모님의 사진을 보고 부모님을 떠올리거나 애인의 사진을 보고 애인을 떠올리며 애뜻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한낫 종이 쪼가리인 사진에게 품는 감정인가요? 어떻게 애인 사진을 본다고 애인이 아니라 사진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사진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더욱 북돋을 수 있다면 유익한 것입니다. 개신교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세뇌가 되었길래 본질적인 것은 멀리하고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며 유치하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로또 당첨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기도는 성스러운 행위입니다. 마음을 집중하고 정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신을 다스리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고차원적의 행위입니다.
참 우려스러운 것이 개신교 인들은 "로또 당첨되게 해주세요." 따위의 기도를 즐겨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에 대고 빌죠. 이게 돌맹이에 대고 빌던 토템신앙과 다를게 뭐가 있습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기도란 고도의 정신적인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려면 우리의 정신을 순수하게 단련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분심을 방지하기 위해 묵주를 들거나 촛불을 켜거나 성상에 집중하거나 하는 것들은 다 그것을 돕기 위한 것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목표를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표에 한층 다가서기 위해 그러한 수단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목표도 모르고 가톨릭 신자들을 헐뜯기 바쁩니다.
개신교인들이 그렇게 의미없는 것에 집착하며 헐뜯는 동안 천주교 신자들은 조용히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갑니다. 자, 그럼 누구 손해일까요.
밑의 글은 성상에 대한 동방정교회 입장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지럽히는 이단들과의 논쟁에 맞서서 2천년동안 순수한 신앙을 지켜오는 교회입니다.
이단들이 성서근본주의를 표방하며 우매한 이들을 폭도로 만들어 성상파괴행위를 하기 시작하는등 많은 비방과 공격들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만 님이라도 중세때 무지한 자들 처럼 더이상 바보처럼 휘둘림 당하지마시길 바랍니다.
어머니 사진을 찢어버리는게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인가요? 애인의 사진을 찢어버리는게 애인을 사랑하는 건가요? 사진은 단지 사진일 뿐입니다. 아무도 사진 자체를 공경하거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게 본질적인 것에는 무지한체 멍청하고 편협한 사고에 물들어 계시는지요? 우리가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교입니다. 유대교나 토테미즘 신앙이 아닙니다. 그렇게 저열한 사고에 머물러 계시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다가가시렵니까?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들은 681년 공의회에서 끝나지 않았으나, 8, 9세기에는 다른 형태로 확장되었다. 논쟁은 성상, 그리스도의 모습,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고 교회와 개인의 집에서 공경 되던 성인들에 집중 되었다. 인간과 하느님을 묘사하는 종교 예술을 의심하는 성상 파괴론자 또는 성상 박해론자들은 성상 파괴를 요구하였다. 그 반대파인 성상옹호론자 또는 성상공경론자들은 격렬하게 교회의 삶 속에서 성상의 위치를 방어하였다. 투쟁은 단순히 기독교 예술에 대한 두개의 개념들 사이의 투쟁이 아니었다. 보다 깊은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의 특징, 물질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참된 의미.
(중략) 약 120년 동안 지속된 성상파괴 논쟁은 두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 기간은 레오 3세가 성상들에 대하여 그의 공격을 시작했을 때인 726년 시작되어, 성 이레네 황후가 박해를 중지했을 때인 780년까지의 기간이다. 성상옹호론자들의 입장은 제 1차 공의회처럼 니케아에서 모인 제 7차 마지막 세계 공의회에 의해 지지되었다. 제7차 공의회는 성상은 교회 안에서 보존되며, ‘소중하고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와 복음서와 같은 다른 물질적 상징들에게 제공되는 동일한 상대적 존경이 주어져야 한다고 결정했다. 성상에 대한 새로운 공격은 815년 아르메니아인인 레오 5세에 의해 시작되어, 성상들이 또 다른 성 테오도라 황후에 의해 영구적으로 다시 복원된 때인 843년까지 계속되었다. 843년 성상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정교회의 승리’로 알려졌으며, 사순절 첫번째 주일인 ‘정교주일’에 거행된 특별한 예배 (성상행렬) 속에서 기념 되었다. 첫번째 기간에 성상론에 대한 중요한 옹호론자는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675-749)이었으며, 제 2차 기간에는 스토디오스(Stoudios)의 성 요한(759-826)이었다. 요한은 그가 동로마 정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이슬람의 영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이 때는 이슬람이 정교회의 보호자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던 마지막 기간은 아니었다. 정교회의 특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정교회가 성상에 제공하고 있는 위치이다. 오늘날 정교회는 성상들로 가득 차 있다. 교회에는 건물의 몸체로부터 성소를 나누는 견고한 스크린, 즉 완전히 성상들로 덮히어 있는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가 있다. 한편 다른 성상들은 교회 주변에 있는 특별한 성상보관 장소에 두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벽들은 프레스코나 모자이크로 된 성상들로 덮여 있다. 정교회인들은 이러한 성상들 앞에서 엎드리고, 그것들에 입 맞추고 그것들 앞에서 성초를 태운다. 그 성초들은 사제들에 의해 불 피워지고 행진 속에서 운반된다. 이 제스처와 행동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왜 다마스커스의 요한과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가? 우리는 먼저 성상파괴론자들이 성상옹호론자들에 대항하여 제시한 우상숭배라는 비난, 그리고 교훈의 한 수단으로써의 성상의 긍정적 가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교리적 중요성을 생각해야 한다.성상 파괴론자들의 성상 훼손
(1) 우상숭배의 문제. 정교회 교인이 성상에 입을 맞추거나 그 앞에 엎드릴 때, 그는 우상숭배에 대한 책임이 없다. 성상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다. 상징들에 주어지는 존경은 돌, 나무, 그림을 향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된 인물들에게 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성상파괴논쟁 이전에 네아폴리스의 성 레온티오스(Leontius of Neapolis:약 650년경 사망)에 의해 잠깐 지적되었었다.
우리는 나무의 본성에 경의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숭배하고 경의를 표한다.... 십자가의 두 들보가 함께 연결되어 있을때,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습을 경배한다. 그러나 만약 그 들보들이 분리되어 있다면, 나는 그들을 던지고 그들을 불태울 것이다.1)
테오필로스 황제의 성상옹호론자들에 대한 박해
성상이 단지 상징이기 때문에, 정교회는 그들을 경배하지 않고, 그들을 존경하고 공경한다.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사려 깊게도 물질적 상징들에게 표해지는 상대적 존경과 하느님께만 적합한 경배를 구별하였다.
(2) 교회 가르침의 부분으로서의 성상 성 레온티우스가 말했듯이, 성상은 우리가 ‘하느님을 회상하도록 하는 개방된 책들이다. 그들은 교회가 신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학 책들을 배우거나 연구할 시간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의 앞에 있는 벽면에 펼쳐진 기독교의 모든 신비들을 보기 위해 교회에 들어와야 한다. 성상옹호론자들은 만약 어떤 이교도가 당신의 신앙을 보여 주기를 당신에게 간청 한다면, 그를 교회 안으로 데리고 가 그를 성상들 앞에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방식 속에서 성상들은 거룩한 전통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3) 성상들의 교리적 중요성 이제 우리는 성상파괴논쟁의 실제적 의미로 왔다. 성상들이 우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들이 가르침을 위하여 유용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허용 이상의 필수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성상을 지니는 것은 본질적인 것인가? 성상옹호론자들은 성상이 충분하고 적절하게 성육신론을 보호하기 때문에, 본질적이라고 가르쳤다. 성상파괴론자들과 옹호론자들은 하느님(성부)의 영원한 본질이 묘사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어느 때에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18) 그러나 성상옹호론자들은 성육신이 전형적인 종교 예술을 가능하도록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느님(그리스도)은 자신이 인간이 되셨고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묘사될 수 있다.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물질적 상징들이 물질적 몸을 취하신 하느님을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체가 없고 외형이 그려질 수 없는 옛 하느님(성부)은 도대체 묘사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은 육체로 나타나 인간들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볼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상징들을 만들 수 있다. 나는 물질을 숭배하지 않지만, 나를 위하여 물질이 되시고 물질 가운데 거하신, 물질을 통해 나의 구원을 이루신 물질의 창조자를 믿는다. 나는 나의 구원을 가져온 물질(성육신)을 숭배함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묘사를 거부함으로, 성상파괴론자들은 성육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실패하였다. 많은 청교도들이 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일종의 이원론에 떨어졌다. 물질을 오욕으로 간주함으로 그들은 물질적인 것과의 모든 접촉으로부터 분리되는 종교적 자유를 원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인 것은 비물질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성, 그의 육체에 어떠한 역할도 허락하지 않음으로, 성육신을 배반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가 구원되어야 하고 변형되어야 함을 잊은 것이다. 그래서 성상파괴논쟁은 초기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종교 예술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성육신, 인간구원, 전체의 물질적 우주의 구원에 대한 문제였다.
하느님은 육체를 취하셨고, 그럼으로써 물질도 구속될 수 있음을 증명하셨다.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육신을 입으신 말씀은 그 육신을 경배하였다’고 말하였다. 하느님은 물질을 신성화 시키시고, 그 물질을 영적 객체로서 만드셨다. 그리고 만약 육신이 영의 전달수단이 된다면, 다른 방식이지만 나무와 페인트도 될 수 있다. 성상에 대한 정교회의 교리는 영적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하느님의 피조물 전체는 구속될 수 있고 성화 될 수 있다고 하는 정교회의 신념과 결합되어 있다. 니콜라스 제르노브(Nicolas Zernov:1898-1980)가 러시아인들에 관하여 말한 것은 모든 정교회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상은 러시아인들에게 단순히 그림이 아니다. 그들은 미와 예술을 통하여 피조물을 구속하는 인간의 영적 권능에 대한 역동적인 표현들이다. 성상의 색상과 선들은 본질을 흉내 내고자 의도된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인간, 동물, 그리고 식물과 전 우주가 그들의 현재의 타락의 상태로부터 구조될 수 있고, 그들의 적절한 ‘모습’이 회복될 수 있다는 설명을 목표로 한다. 성상은 타락된 피조물을 넘어 구속받은 피조물의 도래하는 승리에 대한 약속이다.... 성상에 대한 예술적 완성은 단지 하늘의 영광에 대한 반영이 아니다. 성상은 그것의 근원적 조화와 아름다움으로 회복되고, 성령의 수단으로 봉사하고 있는 물질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성상은 변형된 우주의 한 부분이다.
다마스커쿠스의 성 요한이 지적한것처럼,
성상은 성인들의 승리와 사탄의 치욕에 대한 승리의 노래이며, 계시이며, 지속적인 기념물이다.
성상파괴논쟁의 결론, 제 7차 세계 공의회의 모임, 843년 정교회의 승리, 이러한 것들은 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제 2기의 끝을 의미한다. 7개의 공의회들은 정교회에 대단히 중요하다. 정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7개의 공의회들의 관심은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현시대 적이다. 7개의 공의회들은 학자와 성직자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의 관심사이다. 딘 스텐리(Dean Stanley)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동방의 농부들과 동일한 삶의 계층의 사람들이 콘스탄스와 트리엔트(카톨릭 공의회)라는 이름은 아마도 잘 알지 못하지만, 정교회의 무식한 농부들은 그들의 교회가 7개의 공의회의 기초 위에 의지하여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은 아직도 그 시대의 악들이 일소될 제 8차 세계공의회를 보기 위해 산다는 희망을 소유하고 있다. 정교회는 종종 자신을 7개의 공의회들의 교회라고 부른다. 이것으로 그들은 정교회가 787년 이후로 창조적이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회의 기간들 속에서 위대한 신학의 시대를 보았다. 정교회는 모든 세대들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구함에 있어서, 공의회들을 성경 다음의 기준과 안내서로 삼고 있다.
개신교 분리시 청교도인들에 의한 가톨릭 성상의 파괴
독일 개신교의 로마교회의 성상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