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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의 형(神獸之形) 8

Wagi |2003.12.30 06:06
조회 168 |추천 0


민혁의 집은 복층으로 된 아파트였다.

 

교수인 아버지가 해외로 세미나를 가시는 바람에
엄마까지 따라갔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지 일주일이 되는 날,
그러니까 오늘로부터 이틀 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단다.

 

처음에는 잠결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가 어느 순간 확 잠이 깨버렸다.

 

흐느끼는 듯한 소리,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

 

무서워서 침대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이불을 둘러쓴 채 하루밤을 꼬박 세웠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침.
무서워서 한시도 집에 있고 싶지 않아 허둥지둥 학교로 도망쳤다.

 

허옇게 뜬 얼굴을 본 재형이 말을 걸 때까지
민혁은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은 민혁은 가위눌린 거라고 판정을 내렸다.

쓰잘데 없는 곳에 자잘한 지식을 갖고 있는 재형의 말에
민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말똥한 정신으로 꿈을 꾸는 것도
가위눌리는 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자칭 사소한 일들의 만물박사인 재형은
수척한 민혁의 등을 팡팡 쳐대며 놀리기까지 했었다.


조금 무서웠지만 재형의 말을 신뢰한 민혁은
훨씬 편해진 기분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은 또 일어났다.

이번에는 아예 식은땀까지 흘렀다.

그 차가운 손이 등줄기를 훑어내리는 느낌이 너무나 선명해서
민혁은 분명히 깬 상태라고 자가 판단을 했다.

 

무서워서 볼을 꼬집지는 못했지만
분명하게 깬 머리로 곡성을 들은 것이다.

재형이한테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민혁은 눈을 감고 아는 신의 이름을 죄다 불러가며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민혁은 보아버린 것이다.
자신의 발치에 희끄무레 뭉쳐진 안개 같은 것을.

 

그리고는 대패닉.

 

아마도 기절하지 않았나 싶지만
민혁은 죽어도 기절은 아니라고 우기고 있으니 진실은 알 도리가 없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이 되었다 싶은 이른 아침에
민혁은 이번엔 세수고 뭐고 챙길 사이도 없이 재형의 집으로 직행해서
자고 있는 재형을 두들겨 깨워 멱살을 잡고 영문을 모르는 친구놈을 죽도록 흔들어줬다.


지방촬영때문에 하품을 하며 집을 나서던 재형의 아버지가
새파랗게 질린 민혁을 보고 들여보내 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난밤의 충격과 재형에 대한 분노로
사망직전까지는 이르렀을 것이다.

 

아무튼 자다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재형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민혁을 반쯤 밟아놓고 다시 소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 빛냈다.

 

뭐라 해도 호기심은 남들의 세배요,
겁은 남들의 반에도 못 미치는 재형이었다.

 

이런 호기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평소에도 귀신이라면 자다가도 뛰어나올 정도로 좋아하는 이야기다.

귀신이 나온다는 집을 순례하는 동호회 활동까지 하고 있는 재형에게
더이상의 솔깃한 유혹은 없었다.


"야, 니네 집에 가자."

"미쳤냐? 너나 가. 난 못 가.
젠장, 그런 게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갑자기?"

"그 집에 이사한지 육년째다.
그런게 있었으면 지금까지 살았을거 같냐?"


밟힌 원한에다 잘못된 정보를 주어 원치 않은 경험까지 하게 만든 원한으로
민혁은 단단히 토라져 재형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집에 가자고?
죽어도 못 간다.
아니, 다시는 그 집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없다.

엄마랑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는 일단 고모집에 있던가 하고 뒤야 알아서 하겠지 뭐.


다시 한번 떠올려도 소름이 끼친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재형을 곁눈으로 흘겨보며
민혁은 왜 저렇게 바라는 새끼한테가 아니라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한탄중이었다.

 

그 옆에선 재형이 같은 생각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 다시 없을 기회인데 친구라는 놈이 도무지 협조를 안 해준다.
나같으면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아 날뛰겠구만.

아니, 인생에 귀신을 보는 사람이 몇명이나 있겠냐고.
아니, 아직 귀신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지.

 

"넌 그게 뭐라고 생각하냐?"


난데없는 재형의 말에 민혁은 눈쌀을 찌푸렸다.
이 새끼가 돌았나?


"귀신이나 유령이겠지."
"춥지 않던?"


추웠냐고?
글쎄다. 등줄기로 한기가 달리긴 하더라.

 

"몰라. 소름이 끼쳤으니까 추웠을 수도 있겠지."

"공포감은 체온을 빼앗아가지.
그리고 귀신이 나타나는 곳은 온도가 떨어진다고 해.
닭이 먼전지 계란이 먼전지의 문제겠지만."

"아, 그만 해라. 듣기만 해도 닭살 돋는다."

"그렇게 무섭냐?
사내새끼가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디에 써먹냐?"

 

"차라리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사이코가 설치는 게 낫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는 연관되고 싶지 않아."

"아직 확실히 귀신이라고 판명이 난 것도 아닌데 너무 몸사리는 거 아니냐."

"야이 씨발아. 그럼 니가 가봐라.
그게 귀신이 아니면 뭐냐!"

"그래, 그러니까 이 형님이 친절하게 확인해 주시겠다잖아.
그런 고로 너, 오늘 너희 집에 가는거다."

"미친 새꺄, 난 안 가!"

"어허, 난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주인 없는 집엔 안 들어가.
잔말말고 앞장 서."


손가락을 세워 흔드는 재형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민혁은 저 손가락을 확 잡아 부러뜨렸으면 좋겠다는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잠깐 그 통쾌한 유혹에 빠져버릴까 고민했다.

 

그러나… 재형이 새끼와 마찬가지로 가정교육을 잘 받은 민혁으로서는
도저히 실행할 용기가 나지 않아 주먹을 불끈 쥐는 것으로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근데 너, 교복은? 어라, 가방은 들고 왔네?"


아차차, 급해서 아무 옷이나 꿰어 입고 왔구만.
아악! 도저히 그 집에 들어가기는 싫단 말이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는 민혁의 귀에
재형은 느끼한 미소를 짓고 슬며시 속삭여 주었다.


"오늘 교문담당이 아마 미친개지."

"으아아아악!"

"교복 빌려주마. 교과서랑 노트도 필요하면 빌리러 와라.
대신, 토끼면…, 알지?"

"씨발, 이 악마새끼!"


이렇게 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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