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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19

대모달 |2014.04.16 17:04
조회 111 |추천 0

▷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Ⅳ. 박정희의 친위대 다시 반란을 일으키다

 

 

1. ‘코드 원’ 박정희 피살

 

전두환이 권력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국동향과 정치정보에 야생동물과도 같은 후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후각은 공부해서 얻는 지적 능력과 달리 일종의 체질이다. 정치적 군인으로서 체질을 타고났던 셈이다. 그는 육사 재학중 공부보다는 축구 같은 운동부 쪽에 더 열의를 보였다. 군사 지휘관으로서도 야전보다는 청와대를 지키는 수경사 30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같은 박정희의 친위대 노릇을 한 것이 주요 보직이었다.

 

① 전두환 육사성적, 156명 중 126등으로 꼴찌 수준

 

그의 육사 졸업성적은 126등으로 11기 전체 졸업생이 156명이었으니까 거의 꼴찌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떤 동기생보다도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전두환과 함께 군 내 정치장교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한 11기생들의 성적은 대체로 중간 정도였다. 대구 출신으로 하나회원이었지만 가장 색깔이 약했던 김복동(국민당 국회의원 역임)이 13등으로 가장 좋은 편이었다. 나머지는 노태우(전 대통령) 67등, 권익현(민자당 사무총장 역임) 55등, 정호용(국방부장관 역임) 86등, 손영길(수경사 참모장 역임) 81등 등으로 중간 정도였다.

 

전두환의 그런 정치적 후각을 높이 사고 친위대장으로 키워낸 장본인이 박정희였지만 거기에는 영남군벌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10·26 거사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해가 된 1979년 초 친위대장을 곁에 두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시국이 뒤숭숭할수록 친위대장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오르기 직전 박정희 정권의 권력구조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보안사령관 진종채, 수경사령관 정성각,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73년 봄 윤필용 사건 이후 주요 군 인사는 서종철(육군참모총장·국방부장관·대통령안보특보 역임), 노재현(육군참모총장·국방부장관 역임), 진종채(보안사령관·2군사령관 역임) 등 영남군벌 3인방에 의해 요리됐다. 이들은 모두 경상도 출신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군 경력을 자랑했다. 이들은 하나회의 후원세력이었다. 하나회는 군 장교들의 성분을 네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핵심세력은 자신들 하나회원이고, 둘째로 하나회에 밀접한 후원세력, 셋째는 하나회에 간접적인 지원세력, 넷째가 하나회에 대한 견제세력이었다.

 

영남군벌에서 특히 서종철은 군 내 성골이라 할 만했다. 그는 1972년 육군참모총장을 마친 뒤 바로 청와대 안보특보, 1973년~77년 4년 이상에 걸쳐 국방부장관, 1978년 재차 청와대 안보특보로 들어갔다. 이 같은 군부 고위직에 계속 중용되면서 그는 박정희의 군 통수권 행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1군사령관과 육참총장을 지내면서 하나회 핵심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그가 육참총장이던 시절 최측근인 수석부관 자리를 전두환과 노태우가 앞뒤로 인수인계했다. 자신의 직계부하가 둘씩이나 대통령에 오른 예도 그 이외에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② 전두환 보안사령관, 영남군벌이 합의 추천

 

박정희에게 운명의 해인 1979년 2월 중순경,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2군사령관 영전이 내정돼 있었다.

 

박정희는 인사자력표를 보다가 약간 주저했다.

 

“이제 막 사단장을 마쳤는데, 너무 이르지 않을까….”

 

그는 특히 윤필용 수경사령관 사건 이후 보안사령관과 수경사령관의 위계서열을 정해야 군부 내 질서가 잡힌다고 판단했다.

 

통상 두 명 이상의 복수안에 순위를 매겨 올려야 하는 인사안이 전두환 단독후보로 돼 있었다. 영남군벌 내부에서 이미 구수회의를 마친 노재현은 소신 있게 밀었다.

 

“각하, 이만한 적임자를 따로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서종철 특보나 진종채 사령관도 같은 의견입니다.”

 

박정희는 의심이 많아 막료들이 어느 하나의 안을 강력히 진언하면 그것을 다른 선택안으로 바꾸어 결정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주색으로 흐트러진 사생활 때문에 심약해진 데다 의욕도 전만 못했다. 그는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인사안에 그대로 결재했다.

 

③ 경호실장 차지철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임명에 이견

 

노재현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오자 으레 그랬듯이 좀 만나고 가라는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보안사령관 인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각하께서 결재하실 때 뭐라고 안 하시던가요?”

 

노재현은 사실대로 얘기해주었다.

 

“글쎄, 그것은 각하께서 이의를 표시하신 건데 그냥 결재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차지철이 핀잔투로 말했다. 그는 영남군벌이 아니어서 그쪽 인물이 권력의 한 축인 보안사령관에 오르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노쇠한 박정희가 예전처럼 철저하게 챙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파고들 여지는 많았다. 그러나 영남군벌이 버티고 있는 군부 인사는 관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전방 1사단장에서 일약 보안사령관으로 두 단계 이상 월반시켜 파격 중용했다. 보통은 사단장에서 군단장급 보직을 거쳐 계급도 중장이 돼야 보안사령관에 발탁했다. 그런데 이런 관례를 깨고 보안사령관에 조기 발탁된 것이 전두환의 경우였다. 군 내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것이 박정희 독재권력의 유전자를 후계정권에 이어주는 끈이었음을 당시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진출했을 때 그를 견제해야 할 다른 권력자들은 그 이전 유신독재체제 1기의 인물들에 비해 ‘자질’ 면에서 떨어졌다. 유신독재체제 1기까지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사들은 그동안 권력경쟁이나 돌발사건의 와중에서 휩쓸려나갔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의 곁에 가장 오래 있던 이후락은 1973년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으로 실각했다. 종신 경호실장처럼 보이던 박종규는 1874년 육영수 피격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군 내 책사로 써먹을 만하던 보안사령관 강창성도 하나회 수사를 강행하다가 영남군벌의 반발에 밀려 좌천당했다.

 

박정희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수족으로서나 통치권 관리의 기술 차원에서 이들 유신독재체제 1기의 막료들이 일류라면 그 이후엔 핀치히터들이 등장한 격이었다. 거기다 박정희 자신의 심리불안정 상태와 판단력 상실까지 겹쳐졌다. 이것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10·26궁정동총격사건과 반인륜적 군사반란인 12·12정변이 일어난 환경요인이었다.

 

④ 합수부장 전두환,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불러 회의

 

전두환이 10·26궁정동총격사건 이후 권력자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요인은 합동수사본부장 자리였다. 박정희는 계엄령과 전시에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정보수사기관의 수장이 되도록 하는 대통령령을 하달했다. 이 지시는 검토돼오다가 수사기관 간의 균형이 안 맞아 보류돼 있었다. 박정희는 이것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기용한 직후 시행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합동수사본부는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앙정보부 차장이 참석하도록 돼 있었다. 아무리 비상시라고 해도 이야말로 병영국가 체제였다. 군 보안사령관이 검찰과 경찰과 정보부를 모두 지휘하는 구조였다.

 

10·26총격사건 다음날인 10월 27일 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정 차장 등 수사기관장을 불러 합동수사본부 첫 회의를 연다. 새벽 4시, 대통령 유고를 사유로 한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어 바로 합수부가 구성된 것이다. 전두환이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이어 그는 청와대로 가 비서실장 김계원으로부터 사건 전모에 대해 경위를 청취한다.

 

⑤ 전두환, 박정희 사망 맨 먼저 알고 대처

 

그때 전두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 사망을 그날 궁정동 비밀연회장에 참석했던 권력자들 외에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이 전두환이었다. 그만큼 비상대처에 처신하는 기민성이 남달랐다.

 

박정희의 시신이 국군수도통합병원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7시 57분이었다고 병원장 김병수 준장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김병수 준장은 시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피로 흠뻑 젖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고 중정 경비원 둘이서 보안조치라며 들여다보지 못하게 제지했다. 그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사망진단을 하기 위해 복부를 들추어 보았을 때였다. 배꼽 아래 흰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대통령 박정희가 흰 반점을 제거할 수 없겠느냐며 보여준 일이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하고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사태를 보안사에 알려야 하는데 중정 경비원 둘의 감시가 심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한 시간여 뒤에 전화가 아닌 인터폰이 울렸다. 보안사와 연결된 인터폰이었다. 감시원은 눈을 번뜩였다. 인터폰 목소리는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었다.

 

“보안사 참모장입니다. 김 장군, 지금 상당히 위협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 같은데요. 곤란하면 설명은 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시오. 병원에 들어온 환자는 돌아가셨습니까?”

 

“네.”

 

“혹시 실장입니까?”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러면 코드 원입니까?”

 

“네.”

 

우국일 준장은 전화기를 던지듯이 끊고 사령관 전두환의 자동차 무선전화를 호출했다.

 

“사령관님, 코드 원이 유고입니다. 지금 국군통합병원 분원에서 확인했습니다.”

 

“무어라, 코드 원…! 보안조치 철저히 하고, 내 지금 사령부에 들어가겠소.”

 

전두환은 가던 길에서 차량을 돌려 급히 보안사로 향하게 했다. 그의 권력 게임과 친위대로서 보복 행보가 시작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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