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iott Smith
(1969~2003)
생후 6개월 맞이하게 된 부모의 이혼.
그 후 편모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어머니의 재혼 후
계부 Charlie Welch와의 원만치 못한 관계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후에 그는 계부로 부터 성적학대를 받았다고 회고하였으며,
이러한 아픔은 그의 가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Charlie beat you up week after week,
and when you grow uo your're going to be a freak..」
성인이 된 후에도 그의 삶은
알콜 중독과 약물 중독, 만성적 우울증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절벽에서의 투신기도로 친구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되기도 하였다.
훗날 자살의 결심보다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이 보다 끔찍했다고 회고했던 그였다.
그리고 34세가 되던 해. 2003년 10월 21일.
스미스와 그의 여자친구는 말다툼을 하게 된다.
이후 화가 난 여자친구가 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샤워를 시작하자,
그의 비명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졌다.
황급히 욕실을 뛰쳐나온 그녀의 눈 앞에
가슴에 키친 나이프를 꽃은 채 서있는 엘리엇의 모습이 들어온다.
당황한 그녀는 칼을 뽑아내었고 스미스는 그녀의 눈 앞에서 쓰러진다.
이어진 911에의 신고에 그는 곧장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01시 36분, 과다출혈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그가 자신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던 옆 테이블에는
유서로 추정되는 포스트잇이 한 장 남아 있었다.
「I'm So Sorry... Love, Elliott. God Forgive Me」
(미안해요.. 사랑을 담아 엘리엇이. 신이여, 부디 용서해주세요..)
Ozaki Yutaka
(1965~1992)
자위대 간부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교교에 진학하였으나
음주 및 흡연 등으로 학교에서 징계와 정학처분을 수없이 받았다.
끝내 고교를 자퇴한 그는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으로 작곡과 작사에 힘썼다.
이후 「I Love You」 「卒業(졸업)」 「シェリ(셰리)」 「15の夜 (열다섯의 밤)」 과 같은
일본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10여년간 일본 최고의 가수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각성제 복용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으나,
그의 철학과 사상이 녹아든 반항적 가사에 일본의 젊은이들은 매료되었고,
학교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던 그의 음악은 당시 젊은이들의 공감을 사며
압도적 카리스마의 존재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던 그가 26세가 되던 해, 1992년 4월 25일.
최고의 스타로서 군림하던 그가
돌연 도쿄의 도로 한복판에서 알몸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병원에서는 폐수종에 의한 사망이라고 진단을 내렸으며 경찰은 자살로서 수사를 끝마쳤으나,
시신의 몸 전체가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고 옷가지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죽음의 과정 속에 단 한명의 목격자조차 없었던 시간대가 존재하는 등의 의문을 남겨
당시 마약설, 야쿠자 구타설 등의 수없이 많은 의혹들이 제기되었다.
이후 그의 아버지와 형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팬들의
끊임 없는 진상 규명 요청과 함께
십여년간 끊이지 않던 수많은 논란 속에서
2011년 그의 아내가 언론을 통해 그의 유서를 공개하였다.
이전부터 죽음을 기도하고 있었다던 그의 메세지가 담긴 내용이었으나,
여러 팬들이 그의 자살을 인정하지 않는 등,
단순 자살로 치부하기엔 그의 죽음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남아있다.
HIDE
(1964~1998)
X-Japan이라는 전설적인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팀 해체 후 활발한 솔로 활동을 벌이던 와중
1998년 5월 2일, 자택에서 타월로 문고리에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즉시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오전 08시 52분 숨을 거두었다.
당시 히데의 사인을 두고 검찰은 자살이라고 공식 발표하여,
그를 추종하던 수많은 팬들이 충격으로 자살소동을 일으켜 사회적 혼란을 빚었다.
그의 장례가 이루어졌던 추모식에는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 혼절을 거듭하는 등,
긴급 상황들이 연달아 속출하자 X-Jpan의 멤버이자 히데의 가장 절친한 친우였던
리더 요시키가 이튿날 기자회견을 열어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기타리스트의 특성상 만성적 어깨결림으로 통증을 호소하던 그가
타올등으로 어깨에 매달아 견인 마사지를 했을 것이며,
사망 직전 만취상태였던 그가 마사지를 하던 도중 그대로 잠이 들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과로에 의한 사고사라는 것.
이후 거듭되는 진상 규명의 요청과 유가족들의 항의로 인해 재조사를 벌인 결과
'기도폐쇄로 인한 사고사'로 사인을 수정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이와 같은 경찰의 애매한 발표로 한때 사고사, 타살 등의 다양한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히데가 사망 전 알콜 중독 증세를 보였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발적인 충동을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일본에서는 지배적이다.
이후, 수많은 의혹을 남겨둔 그의 죽음에 대하여
언론에서는 자살, 또는 사고사라는 어느쪽의 언급도 하지 않으며
'급사' 혹은 '의문사'로서 표현하고 있다.
TAIJI
(1966~2011)
전설적 락 밴드 X-Japan의 희대의 베이시스트로 활약하던 그는
X-Japan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1992년 도쿄돔 공연에서 돌연 탈퇴를 선언한다.
공식적으로는 음악적 견해의 문제라고 밝혔으나,
멤버들과의 불화, 수익금의 분배 등의 마찰, 리더 요시키의 독재에 견디지 못한 반발심
등을 이유로 요시키의 권고로 탈퇴하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룹 탈퇴 이후, 그는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오랜기간 간질과 뇌경색, 우울증 등에 시달려오던 그는
이혼을 거치며 대부분의 재산과 양육권마저 빼앗긴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괴로워하였으며,
기타 하나를 들고 우에노 공원에서 홈리스 생활을 시작한다.
홈리스 생활 중 홈리스 사냥 (양아치나 불량 청소년이 무작위로 홈리스를 구타하는 것) 의
급습으로 턱이 마비되고 이빨이 4개나 부러지는 등의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며,
끝내 의절했던 모친을 찾아가 돈을 빌려 아파트를 장만하지만,
강물에 투신하는 등 잇달아 자살 시도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98년 히데의 사망 소식을 계기로 자신의 삶에 대해 자각.
재기를 꿈꾸고 다시 베이스를 들었으나 재차 간질병으로 쓰러져 입원하게 된다.
그후 몇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다시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심각해진 알콜 중독,
수전증으로 인한 악기 연주의 불가, 간경화, 뇌경색으로 인한 언어 장애, 환각과 망상.......
결국 다시 한번 동맥 절단을 시도하며 자살을 기도한다.
이에 여동생과 주위 지인의 권고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는 갱생의 길을 걷지만
다시 베이스를 잡은 그는 앨범 녹음 과정에서 사고로 인해 왼쪽 발목 인대가 절단되어
더이상의 회복은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그러던 와중 2011년.
그는 사이판 행 비행기에서 다른 여성 승객과 말다툼을 벌이다
스튜어디스를 걷어차, 폭행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기에 이른다.
구속 중이던 그는 이윽고
침대 시트를 이용하여 목을 메 자살을 시도한다.
이내 의식불명 상태로 빠져 든 그는 곧이어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승과의 작별을 고했다.
Okada Yukiko
(1967~1986)
80년대 명성을 떨쳤던 슈퍼 아이돌 중 한명으로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이라 불리던 그녀.
마츠다 세이코의 직속 후배로서 깨꿋하고 청순한 모범생 이미지로 활동하며 크게 성공하였다.
수없이 많은 아이돌 스타들이 속출하던 아이돌 쇄도기였던 당시를 감안하면
데뷔 초 부터 커다란 인기를 모았던 그녀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녀가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여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인 '스타 탄생'에 출연하기를 희망하자
(전설적인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와 나카모리 아키나도 이 프로그램 출신,
오카다 유키코가 이 프로그램의 최후의 우승자였으며 이후 방송은 종영)
그녀의 부모는 결사반대하며 3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 조건이란,
1. 교내 테스트로 학년 1등급을 딸 것.
2. 충부 통일시험으로 학년 5위 이내에 들 것.
3. 명문 고교에 합격할 것.
부모로서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 그녀를 포기시킬 요량이었으나,
그녀는 독하게도 세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내고 프로그램에 출전하여 당당히 우승을 하게 된다.
데뷔하자마자 스타덤에 오르며 신인상을 휩쓸었던 그녀는
살이 쉽게 찌는 체질로 언제나 다이어트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으며
하루에 3~4시간의 수면으로 버티어 내는 등, 근면 성실한 타입인데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완벽주의 성향마저 있어
또래의 아이돌에 비해 자신을 굉장히 몰아부치는 스타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그녀가 19살이 되던 해, 1986년 4월 8일.
(이 날은 일본의 유명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의 출생날짜와 일치하여
한때 사와지리 에리카는 오카다 유키코의 환생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소속사에서 마련해준 맨션에서 하숙을 하며 생활하던 그녀.
오전 9시 즈음, 같은 맨션의 거주자가 가스 냄새가 난다는 의혹을 품고 맨션 관리인에게 연락을 취한다.
관리인이 가스 누출의 근원을 찾기 위해 가구별로 맨션을 방문하던 와중,
402호의 벨을 눌렀지만 응답은 없었다. 틈새로 부터는 강한 가스 냄새가 떠돌았고
도어는 체인락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윽고 구급차의 출동 요청으로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체인락을 절단하고 가내로 들어가자
오카다 유키코가 벽장 밑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길이 5cm에 달하는 열상이 2개나 새겨져 있었다.
칼로 손목을 긋고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피는 대부분 멈추었으나 주위에 선혈이 흥건했다.
그녀는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상처의 소독과 봉합 수술을 받았다.
4바늘을 꼬맸으며 안정을 위해 정신 안정제가 투여되었다.
열상의 깊이가 상당하여 신경의 손상을 우려한 의사는 그녀에게 손을 움직여 보길 요구했다.
손은 정상적으로 움직였으며, 이후 의사는 의식의 혼탁 정도에 관한 간단한 질문을 하였다.
그녀는 침착하게 생년월일, 주소, 이름을 대답하였고 후유증과 같은 소견은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는 즉시 퇴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곧이어 연락을 받은 그녀의 매니저와 소속사의 전무가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신발을 신지 못한채 병원에 실려갔기에 병원의 간소한 슬리퍼를 빌려
병원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고 소속사 본사로 향하던 3명은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11시 50분, 오카다 유키코 자살미수의 첫 소식이 언론에 유출되었다.
곧 취재진이 소속사 본사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소속사 건물 내에서 그녀는 매니저와 단 둘이 남아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생수를 엎질러 쏟았고, 「티슈...」 라는 그녀의 말에
이윽고 매니져는 티슈를 찾기 위해 일순 시선을 돌렸고, 그 틈을 타 그녀는 사라졌다.
12시 6분, 방을 빠져나간 그녀는
그 길로 곧장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한다.
머리가 깨져 뇌수가 사방에 퍼졌고, 피가 넘쳐났다.
발빠른 기자들은 앞다투어 현장에 도착하여 피를 흘리며 주검이 된 그녀의 시신을 촬영하였고,
이튿날 아스팔트에 뇌수가 흩어져 있는 그녀의 모습을 여과 없이 잡지 전면에 내보냈다.
비보를 접한 소속사 사장은 그녀의 일기장과 소지품을 수거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녀는 늘 중요한 일이나 사항들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고,
몇년동안 꾸준히 일기장을 써오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안들이 매스컴에 흘러들어갈 경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사장의 신속한 대응으로 일기장의 전면적 사항들은 비공개 처리 되었으나,
그 대략적인 내용에 따르면 선배 여가수에 대한 온갖 저주와 욕이 담겨 있었고
(그 대상이 마츠다 세이코라는 의견이 당시 지배적이었다)
또한 연정 관계에 있던 연상의 탤런트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자신은 단지 성적인 파트너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상심을 금할 수 없어 자살을 택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소속사 측에서는 일기장에는 그 남자의 정체가 담겨 있어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의문의 남자 텔런트의 정체를 두고 한차례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논란으로 불거졌던 사안은 그녀의 자살을 접했던 미디어의 태도였다.
이미 그녀의 일차적 자살 시도(가스 누출, 동맥 절단 시도)가 보도된 이후에
몰려든 취재진들은 이미 그녀가 충동적으로 자살을 재차 시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그녀를 말리거나 회유하는 대신
특종에 눈이 어두워 특종이 될 사진을 건져낼 궁리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결국 그녀의 주변에 잠복하고 있던 기자들은
자신의 눈 앞에서 떨어진 그녀의 시신을 덮어주거나 가려주려는 시도조차 없이
그 참혹한 현장에서 정신없이 현장 사진을 찍어댔으며
더욱 드라마틱한 한 컷을 건지려는 야심에
이미 사망한 그녀의 시신을 발로 건드리는 등,
보다 자극적인 한 컷을 위한 연출 및 시신의 훼손도 서슴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의 자살이 사회적 현상처럼 번져나간 것은 그 이후였다.
그녀의 자살 과정 자체의 충격적인 행보와 시신의 적나라한 노출 등
자극적인 보도들이 잇다르던 와중,
몇몇의 소녀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투신자살을 하기 시작한 것.
이후 모방 자살은 걷잡을수 없이 2주 사이에 31명의 팬이 집단 자살.
한 달 이내에 60여명 가량,
불과 몇달 만에 수백명에 이르는 십대 청소년들이 연쇄적으로 자살해
일본 당국에 초 비상 사태가 벌어졌다.
그 해의 청소년 자살율을 전년에 비해 56%나 급증한 경이적인 기록이었으며
결국 일본 정부는 이 현상을 '오카다 증후군' (혹은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 이라고 명명하고
연일 국회 문교 위원회에서 성토되었으며
이는 전국민적 대대적인 자살방지 캠페인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