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근원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과 악이 있다. 이러한 선과 악은 인간의 사유에서 구별하여 마음속에서 그 근원을 찾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짐승은 사유할 수 있는 머리가 없으니 선과 악을 구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또한 인간이 사유를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짐승과 매한 가지가 되고, 악의 마음에 끌려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악행인지 선행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알게 모르게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선과 악은 익혀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본성에 내재된 인간의 속성이다. 이러한 선과 악을 어릴 때부터 다스리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는 더욱 힘들게 된다. 선과 악은 극단적인 관계를 이루어 인간의 심성에 쉽게 싸움을 일으킨다. 이러한 싸움에서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악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 싸운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악이기에 악은 선에게 끊임없이 싸움을 건다.
만약, 그 싸움에 끌려가면 어떠한 경우든 선이 지게 된다. 그런즉 어릴 때부터 악과 싸우지 않는 방법을 가리키며, 선을 선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심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선과 악이 투쟁하는 장소는 마음이다. 투쟁하는 것은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되며, 이것은 악이 가장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다. 즉, 악은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것을 즐기며 끊임없이 상처를 내려고 싸움을 건다.
자신의 마음을 투쟁의 장으로 만들지 않아야 바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현재론적 삶의 행복과 존재론적 영혼이 밝아지는 것이다. 상대가 선이든 악이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악이다. 그것은 악의 본질은 공격이기 때문이다. 선을 공격하는 것이 악이지만, 악을 공격하는 것 또한 악이 된다. 그것은 공격하려는 그 마음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니, 외부적 대상의 선과 악에 의하여 공격의 정당성을 말하여도, 그 자체가 악이 되는, 결국 상대가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이 악행을 저지른 것이 된다.
악에 대하여 공격성을 띠지 않고 싸우려는 마음을 지워버리면, 그 악은 악으로 결정되어 그 악의 댓가대로 끝이 난다. 그러나 그 악을 공격하여 싸우게 되면, 그 악은 악이 소멸되고,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그 악이 저지른 악행은 자신이 갖게 되어 자신이 악행을 저지른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이러한 불합리한 것 같은 결과가 발생하는가? 그것은 먼저 현재론적 삶을 행복하게 하기위함이며, 존재론적 자아인 영혼의 밝음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현재론적 삶을 불행하게 하고, 존재론적 자아인 영혼의 빛을 죽이기를 원하면 된다. 즉 악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악이 원하는 악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보다 믿음이 앞선다거나, 인간의 삶이 스스로 자신의 주체성이 아닌 타율적인 무엇인가에 매달려야 한다거나, 인간의 본성을 선의 중심에 두지 않고 악의 바탕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부족한 존재로 취급하는 불경한 짓이리라.
하느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부족한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보다 더 사악한 존재이리니, 그것은 왜곡된 인식으로 하느님을 인간세상과 이간시키는 짓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왜곡시키면서 그것이 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악보다 더 악한 존재인 것이며, 더 심한 것은 왜곡시킨 하느님과 악을 대립시켜 싸움을 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악을 동급으로 취급하게 되고, 인간세상으로 하여금 선과 악의 양극적 대립관계가 형성되게 하여, 반목과 투쟁, 그리고 전쟁과 살상이 자행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역사적 현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실존여부에 의혹을 갖게 하여 삶의 존재론적 의지를 무너트리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론적 자아를 이룰 수 없고 무엇인가의 대상에 영혼을 맡겨야 한다고 하는 것과, 인간세상은 악의 세상이며 인간은 죄악적 존재라고 하는 것들은, 종교적 믿음에 쇄뇌된 인간들에게서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인간세상이 악의 세상이라면 악과 싸워 이긴들 어차피 악이며, 인간이 죄악적 존재라면 아무리 선행을 쌓아도 그 선행은 죄악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하느님께서 펼쳐 놓으신 선의 세상이며, 선의 세상에 선한 존재인 인간이 존재하게 하시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선행을 쌓음으로써 영혼의 빛을 밝게 이루어 존재론적 자아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왜곡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적 믿음의 쇄뇌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악의 소굴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악의 소굴에선 싸워 이겨도 그것은 어차피 악이니 그 영혼이 지는 것이 되며, 악과 싸워 이기려면 악의 소굴에서 나오는 것이 그 영혼이 승리하는 것이다. 악의 소굴에서 보면 악이 선이고 선이 악이다. 그러나 악의 바깥으로 나가 선의 영역에서는 선이 선이고 악이 악이 된다. 보이는 그것만이 선이나 악이 아니니, 선이나 악을 따지기 전에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그 근본의 자리가, 선인가 악인가를 먼저 알아야 선악을 바르게 구별할 수 있다.
아무리 선을 이야기하고 선을 바르게 알려고 하여도 악의 소굴에 영혼이 빠져있다면 그 어떤 선도 악으로 보이니, 자신이 하는 행위가 선이 되는지 악이 되는지를 모르고 악행을 저지르는 인생이 되어, 현재론적 불행한 삶과 존재론적 자아를 망각하는 인생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악의 소굴에서 벗어나 행복을 추구하고 영혼의 밝음을 추구하는 보편적이며 확실한 삶의 길을 따라가며, 반복과 투쟁에서 벗어나 상보적 삶을 이룬다면 악의 힘과는 다른 힘이 주어질 것이다.
인간세상의 삶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존재하는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깨어날 것이며, 이성에 따른 지혜가 넓고 깊어져, 그러한 삶에서 인간에게 내재된 하느님의 속성을 찾아 이루고, 땅의 어둠을 극복하며 존재론적 자아인 영혼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악과 싸우지 않는 것이 진정 이기는 것이기에 악과 싸우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본능에 따른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악을 이길 수 있으며, 그러한 인간세상일 때 인간세상을 악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악을 억압하고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간세상이 되고, 인간이 이성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물질에 대한 탐욕과 마음에 의한 번뇌를 극복하고 이겨야 한다. 인간세상을 악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악의 수법은, 물질에 대한 탐욕과 마음에 끊임없는 번뇌를 일으키게 하여, 반목과 투쟁의 인간세상으로 만들며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러한즉 스스로 악에 빠지지 않아야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으며, 그 책임에 따라 악을 다스려 인간과 인간세상을 밝은 선의 세상이 되도록 할 수 있게 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성적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능력인 이성으로 행복한 삶을 이루고 존재론적 자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부정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 인생은 고통스런 절망으로 끝날 것이며, 인간의 이성을 배재하고 영혼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존재론적 자아를 잃고 영혼은 허무한 귀신으로 타락할 것이다. 오직 인간의 이성만이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에 따라 그 영혼을 밝게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능력에 따른 인생에서 인간에게 내재된 하느님의 빛과 사랑을 발견하고 일깨울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빛과 사랑을 일깨울 때, 하느님의 빛과 사랑에 일치할 수 있으며, 그것이 진정 자신을 사랑하고,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인간이 되고 인간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악의 근본에서 벗어나도록 하여야하며, 악의 본질인 반목과 투쟁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악의 소굴로부터 미움과 질투가 선의 세상인 화합과 사랑의 세계에 분열과 파괴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할 때, 인간의 심성에 하느님이 함께하게 되고, 인간세상이 하느님의 세상이 될 것인즉, 그러한 세계가 신인이 합일한 세상이 되어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을 즐겁고 편안하게 이룰 수 있게 된다.
선악의 본질
하느님의 본질은 선이며, 귀신의 본질은 악이다. 그러한즉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잡고 악을 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성품에 따르는 것이며,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귀신의 성품에 따르는 것이다. 정신을 자기자신 속에 두는 것은 밝은 하느님의 빛을 이루게 되고, 정신을 밖으로 내는 것은 감정이 나가는 것이므로 그것은 정신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리하여 마음에 의한 독기(毒氣)를 정신력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에 의한 독기가 귀신의 정신력인즉, 인간의 사악함이 이렇게 하여 발생한다. 인간에게 정신력은 자아를 이루는 원동력이며, 정신력은 자기자신의 내면에서 길러져 그것이 영혼의 힘이 된다. 그러나 정신이 밖으로 나가면 땅의 이치에 따라 선과 악에서 방황하게 되고, 그럴 때 마음은 쉽게 악에 물든다. 그러할 때의 악은 귀신의 독기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마음에 놀아나면 귀신의 노예가 되어 영혼을 잃고 어둠의 고통적인 인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된다.
인간의 정신력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에 있지 않고, 악을 배척하고 극복하며 선을 지키는 힘에 있다. 정신력이 약한 인간은 악을 극복하지 못하고 선을 놓치게 되니, 나약한 정신에서 악에 굴복하고 용인하게 되는 것이며, 또는 나약한 정신에서 악을 행하려는 사악한 정신이 나온다. 인간의 본질을 악에 두고 선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선을 죽이라고 하는 말과 같으며, 인간의 본질을 악에 두고,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지르는 일을 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악을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악행을, 인간의 본질이 악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인간은, 크나큰 불행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악행을 저질러 남의 행복을 강탈하려 한다. 인간의 본질을 악에 두는 그러한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된다. 그것은 악 자체가 불행이기 때문이니, 인생의 근본을 불행에 둔 삶이 간혹 행복한 일이 발생하는 것은 오히려 신기하다 할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선이며, 선의 본질은 행복인즉, 행복한 삶에서 행복을 지키고 간혹 발생하는 불행을 극복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땅의 유기체적 생명체로 삶을 이루고 있는 인간에게는 육체만이 진정한 소유물이 된다. 이러한 자신의 소유물을 잘 관리하여 영혼을 탄생시켜야 하는 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이니, 종교적 허상에 매달리는 불행의 습관을 단호하게 버리고, 지나친 물질적 욕심을 삼가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육체는 영혼의 집이며, 영혼은 육체 안에서 성장한다. 이러한 육체를 천하게 취급하면서 겉을 꾸미는 짓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론적 자아를 갖추는 것은 영혼인지라, 영혼을 갖추고 나면 육체는 껍질이지만, 껍질이 없는 알맹이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헛된 망상에 놀아나 인간의 삶을 저주하면서 사랑을 베푼다고 하는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진정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보라.
자신의 삶이 슬픔과 갈등의 불행한 삶에 있으면서 남에게 행복을 찾아준다고 하는 인간은 남 걱정 하지 말고 자신이나 걱정하라. 진정한 사랑은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진정한 행복은 건강한 육체적 삶에 있으며, 진정한 삶은 육체 안에서 밝은 영혼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언제나 인간이, 언제나 인간세상이 귀신에 놀아나지 않고, 불행한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한 삶과 밝은 세상을 이룰 것인가?
인간의 노력하는 삶이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에서 행복을 찾지 말고 삶에서 행복을 찾아야 행복이 이루어지며, 악의 사상과 악행에서 벗어나 선의 사상과 선행을 실천하는 삶에서 행복이 이루어지고, 불행에서 행복을 찾지 말고, 행복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행복한 삶을 이루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밝은 빛을 내리시지만, 귀신은 인간에게 어두운 색채를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빛을 받은 영혼은 자유로워지며, 귀신의 색채에 물든 영혼은 어두운 색채에 쇄뇌되어 빛을 잃고 만다.
선한 인간일수록 종교가 필요치 않으며, 종교를 통해서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이 아니요 위선이다. 스스로 행하는 선이 선이요, 외부적 조건에 따라 행하는 선은 어디까지나 위선인 것이다. 스스로 행하는 선에서의 기쁨은 자아의 영혼을 밝게 하지만, 종교를 통하여 행하는 선에서의 기쁨은 자기만족적 기쁨으로 자아적 영혼의 밝음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영혼의 밝음은 스스로 행하는 선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아가 빠진 영혼은 빛이 퇴보할 뿐 어떠한 경우에도 빛을 발할 수 없다.
선적자와 악적자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는 습관적인 방식에 따라서 선을 쌓거나 악을 쌓게 되니, 선을 쌓는 자를 선적자라 하고, 악을 쌓는 자를 악적자라 한다. 선적자(善積子)란, 자신과 남에게 정당하고 도덕적 기준에 맞는 삶에서 선을 쌓는 자를 말하며, 악적자(惡積子)란, 자신과 남에게 부당하고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삶에서 악을 쌓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같이 있는지라, 선을 쌓는 선적자는 안으로 선한 내선자(內善子)와 밖으로 선한 외선자(外善子)가 있으며, 악을 쌓는 악적자는 안으로 악한 내악자(內惡子)와 밖으로 악한 외악자(外惡子)가 있다. 그리하여, 내면과 외면에서 선과 악이 같은 자가 있고, 내면과 외면에서 선과 악이 차이가 나는 자가 있다. 즉, 안으로 선하고 밖으로도 선한 선적자가 있으며, 안으로는 선하고 밖으로는 악한 선적자가 있고, 안으로 악하고 밖으로도 악한 악적자가 있으며, 안으로는 악하고 밖으로는 선한 악적자가 있다.
내면과 외면의 성품으로 인하여, 내선과 외선의 선적자는 선적자와 악적자 모두에게 선하게 대하고, 내선과 외악의 선적자는 선적자에게 선하게 대하고 악적자에게 악하게 대하며, 내악과 외악의 악적자는 선적자에게 선하게 대하고 악적자에게 악하게 대하며, 내악과 외선의 악적자는 선적자에게 악하게 대하고 악적자에게 아부한다. 이러한 인간의 성품에 따라서 선과 악을 쌓는 성격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게 되니, 내선과 외선의 선적자는 선과 악에서 모두 선을 쌓으며, 선과 악을 모두 가까이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면서 선을 지키며 쌓는다.
내선과 외악의 선적자는 선을 보고 선을 쌓으며, 선을 가까이 하고 악을 멀리하여 선을 지킨다. 또한, 내악과 외악의 악적자는 악을 보고 악을 쌓으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여 악을 덜어낸다. 또한, 내악과 외선의 악적자는 악을 보고 악을 쌓으며, 선을 멀리하고 악을 가까이 하여 악을 쌓는다. 인간세상은 이러한 인간의 성품에 따른 성격으로 인하여 존재론적 자아와 현재론적 삶에서 행복과 불행이 오가게 된다.
내선을 갖추고 외선을 지키는 것은, 하늘의 길이며 존재의 길인즉, 존재론적 자아를 지키는 진리이며, 내선을 갖추고 외악을 멀리하는 것은, 공기의 길이며 현재론적 삶의 길인즉, 가정을 지키는 진리이다. 또한, 내악을 품고 외악을 투기하는 것은, 땅의 어둠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세상으로 하여금 그 선과 악을 알게 하며, 내악을 품고 외선으로 가장한 위선(僞善)은, 땅의 어둠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남의 영혼까지도 타락시키며, 세상으로 하여금 선과 악을 혼란시킨다.
선에게 선을 베풀면 선이 쌓이고, 악에게 선을 베풀면 악이 쌓인다. 쌓이는 것은 보이지 않나니, 선이 쌓이는 것은 잊어야 쌓이고, 악이 쌓이는 것은 찾아서 지워야 하며, 지운 후 잊어야 쌓이지 않게 된다. 무조건 선을 베푸는 것은 언뜻 진실한 것 같지만, 그것은 선과 악을 꼭 같이 반반씩 쌓게 된다. 그리하여 악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삶이 불행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불행의 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편안한 삶을 이루는 것은 그 삶 자체가 선을 쌓는 행위가 된다. 그것은 자신과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선보다 더한 선은 없기 때문이며, 불편한 삶에서 선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 되니, 불편하게 하는 악보다 더한 악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즉 애써서 선을 베풀려 하기 전에 자신의 삶 자체를 편안하게 이루는 것이 선의 시작임을 알라.
선을 행한다고 하는 선이 자율적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거나, 타율적 가식에서 이루어진 것인가에 따라서, 그 선으로 인하여 행복이 쌓이거나 불행이 쌓이게 된다. 욕심에 의한 선은 선이 아니라 악이 되며, 진심이 아닌 가식적인 선은 자신과 상대의 운명을 해치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 선의 본질을 상대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인즉, 선을 베풀려는 자는 상대가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식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을 베풀어야 할 것이며,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 욕심껏 선을 쌓는다고 하는 것은 상대가 그것을 무시하고 악을 심게 되니, 그러한 선은 행하는 만큼 불행한 운명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선이라 하여 모두 선이 되지 않는 것은, 선은 선을 선으로 소화하고, 악은 선을 악으로 소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