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내가 엑스맨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2000년 시리즈의 첫 개봉 때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난 동전만 생기면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했는데, 내가 자주 하던 게임 중에 엑스맨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게임이 있었다.(게임 제목은 잘 모르겠다.) 스트리트 파이터, 킹 오브 파이터같은 게임에는 완전히 밀리는 처지였지만, 당시 나는 비교적 관심이 덜한 이 게임을 즐겨했다. 이유는 물어보나마나 캐릭터들 때문이었다. 엑스맨 게임의 캐릭터들은 유독 화려한 기술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태풍을 일으키는 스톰이나, 눈에서 광선이 나가는 스콧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울버린에 밀려 조연으로 전락한 커트 영화 속 스콧도 그 당시엔 게임의 주인공으로 눈에서 광선을 뿅뿅 싸대곤 했다.
그리고 2000년 브라이언 싱어에 의해 <엑스맨>이 탄생했다. 난 땀을 뻘뻘 흘리며 친구들과 방과 후 안양 평촌의 자그마한 영화관에 가서 게임 속 그들을 영화 속에서 목격했다. 게임을 눈으로 본다는 것보다 더 흥분했던 건 아무래도 영화가 게임보다 더 근사했기 때문이다. 엑스맨은 인간과 돌연변이의 대립 이전에 내가 그토록 궁금해 했던 게임 속 캐릭터에 입체감을 심어 주었고, 노련한 브라이언 싱어는 진화론과 정치학을 가지고 SF을 논할 수 있는 야심 있는 남자였다.
영화든 뭐든 시리즈가 고정팬을 위로하는 방식은 얼추 비슷하다. 좋든 싫든지 간에 시리즈라는 하나의 고리를 따라와 준 팬들에게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허탈하지 않도록 결코 노여워하지 않도록 마치 효도하듯 정성어린 음식과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오래된 시리즈일수록 그렇게 기존 팬들을 챙기다보면 아무래도 어린 손자들은 투정부리기 일쑤다. 이제 시리즈 7번째 작품이 탄생했고, 15년에 다다른 장수시리즈 엑스맨 역시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부침을 겪고 있다. 골수팬은 여전히 엑스맨을 사랑하지만, 어벤저스 패밀리에 마음을 뺏긴 젊은이들은 이 시리즈의 기원과 경과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X맨 시리즈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던 11년도에 개봉한 매튜 본 감독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그런 의미에서 엑스맨 시리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프로페서X, 매그니토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이 작품은 왜 두 사람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고, 결국 어떤 방식으로 화합하는 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적들과의 무의미한 광선 싸움에 지친 팬들은 이 인간미 풍기는 두 젊은이의 사연에 열광했고, 시리즈의 태초부터 경과까지 다시 찾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브라이언 싱어가 다시 맡은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다시금 우리를 찾아왔다.
돌연변이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제작된 로봇 센티넬이 인간들까지 모조리 말살하는 2023년이 영화의 배경이다. 인류의 종말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프로페서X와 매그니토는 과거를 통해 미래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 울버린은 트라스크가 센티넬을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73년으로 보내진다.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한데, 등장인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2023년의 돌연변이들도 많고, 1973년엔 우리에게 익숙한 X맨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사연들도 제각기 천차만별이다. 이는 어쩌면 지난 시리즈들이 싸놓은 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미처 지나치기엔 찝찝해 닦아 줘야하고, 하나씩 짚어내기엔 이야기가 분산되어져버린다. 인류를 구하기도 바쁜데 참으로 고단한 시리즈의 운명을 타고 난 셈이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는 오히려 이 과다한 매듭들을 모두 리부트 시킬 수 있는 과거로의 여행을 택한다. <퍼스트클래스>가 그저 X맨 탄생의 프리퀄 역할을 해 고정팬의 사랑을 받았다면,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과거로 돌아가 모두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 아직 인물들 간의 사연들이 미처 써지지도 않은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X맨 들의 운명을 정의내리는 것만이 이 시리즈가 다시 젊은 세대들에게 관심을 받고, 기존의 팬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이 시리즈의 창시자 브라이언 싱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매력적인 배우들도 보시는 바와 같이 수두룩하다.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매그니토, 프로페서X, 울버린, 미스틱을 맡은 배우들은 어벤져스 군단과 비교해도 현재 헐리웃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들이 맡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이클 바스빈더와 제니퍼 로렌스가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적응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주요 캐릭터가 너무 많다보니 이야기를 집중시키기가 무척 어렵다. 그리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미래를 바꾼다는 설정 역시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같은 익숙한 설정의 블록버스터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브라이언 싱어는 캐릭터들의 다양한 능력을 인과관계로 맺어놓고 그들의 능력을 하나씩 합쳐서 미션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해나간다. 이후 이어질 시리즈가 건져 올릴 수 있는 캐릭터를 부곽시킴과 동시에 기존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가지지 못했던 다양한 캐릭터의 등장으로 볼거리를 제공해 단선적인 이야기구조를 회피한다.
우선 갇혀있는 매그니토를 빼내야 하는 미션, 서로 대립되는 매그니토와 프로페서가 힘을 합쳐야 하는 미션(물론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매력적인 미스틱이 혼자 동료들을 구한다고 설치고 있으니 이부터 뜯어 말려야 한다.(물론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이 2023년의 현실 역시 녹록치 않다. 센티넬들이 곧 돌연변이들을 찾아 없애기 바로 직전이고, 이 와중에 그들과 전투를 벌이는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이 출몰한다. 브라이언 싱어는 이 많은 미션들을 서로 물고 물리게 구성해 놓고, 서로의 인과 속에 사건을 해결하는 캐릭터들을 주변에 배치하여 그 누구만의 지구평화가 아니도록 만들었다. 특히, 서로의 능력이 다른 캐릭터에 의해 저지되고, 또는 시너지를 얻게 되는 합, 교, 여의 원리가 훌륭하게 묘사된다. 엑스맨들 자체가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며, 같은 목적이지만 그것을 이루려는 수단 역시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것도 흥미로운 볼거리다.
드라마로 이야기를 풀다보니 액션신은 훨씬 적어졌지만, 나같이 정신없는 광선쇼에 이력이 난 고정팬에겐 1970년대라는 설정이 어쩐지 푸근하기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대통령 암살과 베트남전이라는 정치적 배경을 돌연변이들의 운명과 조화롭게 구성했다는 점 역시 훌륭한 이야기의 덕목인 입체감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탄탄한 구성을 자랑한다. 지구평화라는 것이 곧 미국의 정치상황과 같다는 논리는 여전히 맘에 안 들지만,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현실세계와의 접점을 찾으려는 의도 역시 잘 맞아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이제 새로운 캐릭터와 역사의 이야기를 모두 잘 정돈해 놓은 엑스맨 시리즈는 기존 관객들의 높은 요구를 이쯤이면 모두 수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7년이라는 세월은 시리즈의 팬들에게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곧 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인생도 흘러간 시간에 연연 않고, 미처 돌아보지 못한 것들을 외면한 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각개전투의 시점이다. 각 캐릭터의 속내를 파고드는 캐릭터 시리즈가 지금 이 기세를 훌륭하게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