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있을 이야기지만, 난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한 땐 정말 가난해서 가정에 위기가 닥쳐온 적도 있었다. 쭉 가난해온 것과 갑자기 가난해진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 충격의 여파는 상당이 오래가고, 복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시간들이 흘러간다.
갑자기 가난해지면 집이 좁아지고, 가구를 버리게 된다. 손때 뭍은 가구와 물건들이 버려지면 마음이 황폐해진다. 마음이 추워지고, 늘 목이 마른 기분이 든다. 가난의 행태는 내가 알기론 거의 다들 비슷하다. 모두가 아는 실수를 해서 전형적인 방법으로 가난해지는데, 그렇다보니 어디서 말하기도 민망하다. 다들 그 정도 경험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이제 가난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나의 가난에 대해 말하게 된 걸 보면 난 스스로 날 대견하다고 여긴다. 아마도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는 사라졌다.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난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사라졌다. 가난한 시절엔 없는 것을 있게 만들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현실에 적응했지만, 이제는 손에 잡힌 것을 바라보며 마음을 든든히 다독인다.
어릴 땐 정말 가난하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했다. 남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내 젊음을 무기삼아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한정되어 있었고, 시간이라는 봇짐엔 아직 꺼내지 않은 따근한 도시락이 있었다. 가끔 그 시절 친구들과 가난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모험담 얘기하듯 어려웠던 순간들을 펼쳐놓기도 하지만, 대부분 거짓말이었다. 그저 훗날 훨훨 비상할 내 미래를 돋보기에 하기 위한 장식물처럼 가난을 대했다. 봇짐 속의 미래는 비밀, 니들이 접근하지도 못할 근사한 미래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가난은 존재하고 있을까. 없어진 줄 알았는데 더더욱 크게 존재하고 있었다. 실제 가난했던 그때보다 더 가난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느낄 수 있고, 만져지기까지 한다. 왜냐면 가난이 미덕이 아닌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제 가난은 부끄러움이고, 밝혀봤자 좋을 것 없는 흉이다. 가난이 있던 시절에 만났던 사람은 이제 가난을 부끄러워하며 나를 멀리한다. 더 윤택한 삶을 위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것을 붙잡을 수 없는 건 개선의 여지가 없는 현실 때문이다. 슬픈 일이지만, 자존심상 슬픈 내색을 하지 못했다.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최근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는 제목처럼 가난했던 하룻강아지가 돈의 맛을 알고 월 스트리트의 늑대가 되는 이야기다. 역시 이 늑대의 초창기는 가난했다. 어린 아내와 미래를 기약하며 돈을 쫒았다. 그리고 돈을 왕창 벌 수 있는 미래가 되자 가난을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난을 모험담으로 삼고, 이제는 부자위인이 되어서 관객과 자신의 직원들에게 돈을 버는 강의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기만 하면 사기를 치든 살인을 하든 결국 위인이 된다는 늑대의 논리다. 이 영화 자체가 돈을 탐하는 늑대의 야만성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오로지 돈이 목적인 세상에서 돈을 부정하게 버는 것이 나쁜 짓일 수 없다. 그를 막으려는 FBI와 경쟁회사의 임원들 역시 그보다 돈을 못 버는 루저일 뿐이다.
영화는 야만적인 벌이 행위를 마치 락 음악을 듣는 것처럼 유쾌하고, 질펀한 놀이쯤으로 펼쳐놓는다. 특히 섹스와 돈의 매칭은 끝없는 소비와 쾌락의 진열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난 이 영화가 펼쳐 보이는 난장판이 꽤 유쾌하다고 느꼈지만,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돈을 벌기 위해 펼쳤던 모든 악행이 하나의 미담쯤으로 치부되는 이 섣부른 결론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는 의문 때문이다. 영화의 늑대는 끝에 가서 자신의 악행을 처벌받지만, 그것은 단순한 실수로 치부될 쯤 그의 도덕적 타락을 욕하는 영화적 시선은 견지하지 않는다. 이것이 정확한 현재의 돈에 대한 영화의 태도이자, 세상의 기준점으로 봐도 무방한 것은 콕콕 박혀오는 대사 속에 내가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네 같은 소리지만, 차라리 가난한 것은 싫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때가 좋았던 것 같다. 맘속으로는 가난이 싫지만, 겉으로는 인생의 방향을 논하며 욕구를 숨기는 것이 훨씬 타당한 젊음이었다. 하지만 가난이 부끄러운 지금은 가난을 비난하는 것이 일반화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숨 쉬고 살지만, 이제는 가난한 미래를 거부하며 빛이 나는 윤택함을 선망하기 주저치 않는다. 돈이 없는 데이트에도 개의치 않고, 상대가 데이트 비용을 내도 고마워했던 시절은 갔다. 세상을 좀 안다고 자부하는 젊음들은 이제 가난을 삶을 이룩하는 통과의례로 여기지 않는다. 그저 현실의 참혹한 추태로 말하고, 등을 보이고 떠난다.
그것은 스스로 삶을 변혁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상대를 옥죄어 타인을 통한 신분 상승만이 자신의 살길이기 때문에 유독 더 가난을 비웃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에 쨍쨍대는 태양 아래서도 조금만 더 가면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집이 있을 거라며 위로하는 시간을 낭비라고 여기는 세태에서 가난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다. 지금 이 시간에서 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한때는 우리의 그런 시절이 정말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은 차단되어져 버렸다.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란 낭비이자 몰락이다.
시대를 욕하고 싶지는 않다. 젊음이 변질했다고 말하긴 더더욱 싫다. 그저 일요일 아침 동네를 나서며 시원한 바람이 반바지 안으로 들어올 때의 기분을 사랑하면 그 뿐이다. 옆으로 지나가는 흰색 외제차를 상상하는 것보단, 내 안으로 들어온 바람이 바깥으로 스쳐 지나갈 때 나의 상상력은 날 부유하게끔 한다. 난 당신의 편견에서만 가난하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 장건재 감독의 <잠 못 드는 밤>은 젊은 부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이 부부의 현실적인 고민들을 영화의 주 소재로 삼는다. 그들은 상상한다. 직장에 짤리게 되면 어쩌지? 아이를 낳게 되면 어떻게 감당하지? 쉬는 날에 쭈쭈바를 먹으면서도 그 불안은 쉼 없이 부부의 상상력을 괴롭힌다. 그들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눈을 감으면 덥쳐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하기엔 벅찬 현실의 문제들이 산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건, 결국엔 서로 의지하며 문제를 해쳐나갈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몸으로 대화하고 눈빛으로 서로를 그리며 사랑한다. 결코 섣부른 불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던져 신뢰를 깨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끈끈한 부대의 연대감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두 배우의 열연도 좋았지만, 젊은 두 부부의 믿을만한 상상력을 더 지지한다. 영화는 작은 아파트 안에서 별다른 사건도 없이 흘러 지나간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 진정 행복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상과 현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들을 괴롭혀도, 결국엔 이 모든 것들이 추억으로 남아 잠 못 드는 여름밤을 환하게 비춰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작은 그들만의 공간에 내 마음을 의탁하니 가난이 발붙일 곳 하나 없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