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퇴근하고 혼자서 영화관을 왔지만 ‘이상하게’ 영화관을 홀로 찾은 남자들이 많았다. 내 양 옆에 자리 잡은 두 남자는 가뜩이나 큰 덩치를 자리에 우겨넣고 자그마한 나를 옥죄어 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꽤 많은 남성들이 아트나인 극장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예술영화관을 찾는 가장 큰 즐거움은 놓치기 쉬운 귀한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희열이 가장 크다. 거기에 보너스로 멀티플렉스와 달리 사람이 적어 여유 있게 영화에 흠뻑 젖을 수 있다는 장점이 더해진다. 헌데 오늘 평일 저녁(사람이 없어야 자명한) 일본의 거장 야마다 요지의 ‘동경가족’ 상영관에는 그 어느 영화보다 많은 남성들이 홀로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이 영화가 무엇 때문에 이 남자들을 찾게 했을까. 오즈 야스지로의 불세출의 걸작 <동경이야기>의 리메이크 작품이기 때문일까. 절대 그럴 리 없지. 조용한 가족영화이자 내용 또한 현대사회에서 가족 간 벌어지는 틈에 대한 늙은 감독의 우려석인 시선이 대부분인 이 영화가 유달리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술 먹기 좋은 목요일 저녁 그들은 무엇을 보고 이 영화관을 찾아왔을까. 하지만 그 비밀은 영화를 보는 중에 쉽게 풀렸다. 이 영화의 배역진을 확인하지 못했던 난 상영 도중 살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외딴 섬에 사는 노부부는 장성한 자식들을 보러 번잡한 도쿄를 찾는다. 자식들은 오랜만에 만난 부모 모시기에 애를 쓰는 것 같지만, 적극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병원 의사인 아들과 미용실 주인 큰딸은 생활이 바빠 부모를 신경 쓰지 못한다. 막내아들도 자기 생활에 치여 부모를 챙길 여력이 없다. 부모가 부담스러운 자식들은 결국 돈을 모아 호화로운 관광호텔에 두 분을 모시기로 한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가족들 간의 아늑한 시간을 꿈꿨던 부모는 실망하고, 갈 곳 없는 처지가 된다. 결국 어머니는 생각 끝에 촐랑대는 막내아들이 생각나 빨래와 청소나 해줄 겸 찾아가기로 한다.
부모님께 걱정만 끼치는 철없는 막내아들 쇼지(츠마부키 사토시)의 집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자 친구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시작된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장면을 보다가 현관에 나타난 그녀가 보이자 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내 옆 좌석의 남성들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그 고요한 들썩임에 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온 것이다. 아오이 유우. 한국의 남성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는 그녀가 이 영화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 예술영화관에도 온난화가 왔다. 영화에 푹 빠져있던 나는 이 오타쿠들과 한 묶음에 섞이게 된 것에 괜스레 불쾌감을 느끼다 다시금 영화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근데 정말 예쁘긴 하드라. 하늘거리는 옷차림과 민낯의 수수한 얼굴에서 나오는 빛이 눈을 떼기 힘들게 만든다. 사실상 지루하고 무거운 이 작품의 후반부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두 청춘스타 츠마부키 사토시와 아오이 유우의 청량한 힘이 큰 보탬을 한다. 더 나은 일본의 미래를 그려보려는 작품의 의도와도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조용한데다 대단한 흡입력을 가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부모와 자식 간 단절된 삶을 사는 현대시대에 먹고 살기 바빠 소원해진 관계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인지하고 사는 내게 가슴의 폐부를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아주 전형적인 이야기를 가진 드라마지만, 이 전형성 속에 섞여 들어간 자식으로서의 부모에 대한 죄송스런 감정이 결코 진부하다고 비아냥댈 수 없는 몰입을 자아낸다. 또한 이 노감독이 결국엔 기성세대와 현재 세대를 구성하는 인물들에게 가진 실망감을 넘어서 미래를 짊어질 20대 청년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것이 느껴져 부담스러운 느낌도 같이 자리 잡는다. 옆자리 남자는 어머니의 죽음에 이르러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흑흑대며 암흑 속을 빠져나갔지만, 난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올 때까지 씁쓸한 마음을 다독이느라 상영 전 먹은 햄버거가 거북스러울 정도였다.
영화는 제작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크랭크인을 20여일 앞두고 3.11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다. 큰 재해는 일본 사회를 침묵으로 빠뜨렸으며, 일본은 자존심이 망가진 고철기계처럼 삐걱댔다. 야마다 요지 감독은 영화의 개봉을 연기하고, 새롭게 각본을 썼다. 그 결과 노부부의 한 지인이 3.11 사태로 부모가 실종되었다는 설정이 추가됐고, 막내아들 쇼지는 대지진 피해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여자 친구 노리코를 만나게 된다는 설정으로 바뀐다. 영화가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와 다른 노선을 가는 지점이 바로 이 재앙 후의 일본이라는 설정이다. 오즈가 순환이라는 알레고리를 강조하며 어쩔 수 없이 변해가는 세월 속의 가정을 그렸다면, 야마다 요지의 연출은 고난과 극복으로 양분되는 일본의 양상을 통해 희망을 찾으려고 발버둥 친다. 현재 일본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피해가지 않고 "어딘가 이 나라는 잘못돼가고 있다"고 한탄하거나, 할머니가 손주에게 "어린 나이에 벌써 포기한다"며 다그치는 장면은 노감독이 품은 젊은 세대들에 대한 다독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의 분위기를 이고 가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다소 무거운 영화의 분위기를 해독시켜준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연주곡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를 자아냈다. 아 내가 참 오랜 시간동안 그의 음악이 스크린 속에서 마주하길 그리워했구나. 어린 시절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품었던 히사이시 조의 감성이 날 뭉클하게 했다. 내 학창시절의 기억을 마주하는 듯 그의 음악이 내 귀에 들어오자 알 수 없는 푸근함 그리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이야기>나, 야마다 요지 감독의 <동경가족>이 결국엔 피폐했던 과거와 아직은 의문투성이인 현재를 넘어서 더 나은 미래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늘 희망적인 음악적 메시지로 주먹을 쥐게 했던 히사이시 조의 연주는 이 영화가 내포하는 다독임의 적절한 메타포로 기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