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 her>에서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져 목소리뿐인 운영체제와 섹스를 하는 남자 테오도르가 등장한다. 이름처럼 섬세한 취향을 지닌 이 남자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최첨단 운영체제의 공세에 몸까지 허락하고 만다. 이런 쉬운 남자 같으니. 꽤나 거북한 장면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진 않았다. 우선 섹스의 절정에서 화면을 암흑으로 처리하여 더러운 기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결정적으로 섹스상대인 운영체제의 목소리가 스칼렛 요한슨 버전으로 세팅되었기 때문에 나의 상상력은 굴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 덕분에 치밀한 육체성이 절정의 순간 현현하게 살아나더라. 우리는 그가 OS를 구매해 처음 여성의 목소리로 스칼렛 요한슨 버전으로 설정하는 순간부터 목소리 이면에 육체파인 그녀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본다. 그래서 이혼한 독거남의 자위행위 장면이 스칼렛 요한슨과의 야릇한 하룻밤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쥬세패 토르나토레 감독의 <베스트 오퍼>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예술품 감정사인 버질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삶을 즐기는 골드싱글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유능한 감정사로서 유머러스하게 고가의 경매품을 처리하는 장면에서 유머러스한 말투와 프로페셔널한 진행은 버질이라는 캐릭터를 완전하게 정의한다. 그는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에서도 자신이 가진 이미지를 잃지 않는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를 즐기는 버질은 그 순간에서 조차 결벽증과 근엄한 표정을 무기로 자신을 노출하지 않는다. 그에게 일은 인생의 모든 것 그 자체이자, 혼자 산다는 것 또한 두렵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겐 가족이 없이 홀로 늙는 남자의 삶에 직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버질은 까다로운 성격으로 친구도 거의 없지만, 엄청난 재력으로 늘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산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버질은 혼자 사는 남자들이 늘 그렇듯 컬렉션에 집착한다. 좀 지질한 버전의 노인네였으면 아시아 포르노 잡지나 모으고 있겠지만, 돈 많고 지적인 버질은 자신의 예술적 취향과 어울리는 여인들의 인물화를 방 한가득 수집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명화들에 둘러싸여 죽어버린 욕정을 시험하는 영화의 장면은 이 영화를 정의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명화 속 여인들은 마치 현현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역동적인 부감으로 내려찍는 시야 아래 버질은 영혼까지 해방되는 것처럼 전율한다. 한 폭의 그림은 어느 인간이 특정한 의미를 부여함에 따라 현현한 육체성을 가진다. 영화 <그녀>가 운영체제가 세팅된 목소리를 통해 어느 유명배우의 육체를 빌려왔다면, 명화 속의 그녀들은 시간이라는 겹겹이 쌓인 아우라Aura를 통해 생명력을 얻고 한 노인의 죽어버린 욕망에 숨을 불어 넣는다.
내게 이 두 영화가 한 가지 사고 아래서 묶인 것은 물론 혼자 사는 남자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난 나와 다른 싱글남들이 혼자서 뭘 하고 사는지 늘 관심이 많다. 점점 혼자서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영화에서 그들을 훔쳐보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두 사람은 혼자서 사는 것을 즐기는 양반들이다. 안정된 직업과 풍부한 예술적 소양, 혼자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수단이 분명한 싱글이다. 각자 관심을 두는 분야는 다르지만 오늘 퇴근한 후 아 뭘 해야지 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인 것이다. 이렇게 혼자 사는 남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그리고 무너짐은 분명히 사랑이라는 존재일 것이다.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은 그녀를 만나는 것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성욕을 분출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얘기지만, 마음을 공유하고 나를 위하는 여성을 향한 그리움이 어찌 한순간의 쾌락으로 해소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운영체제와 대화하고, 명화 속 여성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동물이라고 하는데, 모든 갈등은 부대끼는 것에서 나온다. 특히 사랑하는 여성이 생기면 평소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관념들이 무너지고, 결국 실패에 다다랐을 때 황폐하게 남은 잔해들은 복구 불가능한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최근 혼자 사는 남자를 다룬 영화들은 외로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대상을 여성이 아닌 유사한 대체물로 손쉽게 소비하는 것이다. 최근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20세기 미술사를 정리하는 컨셉으로 기획된 르누아르부터 데미안 허스트까지 전을 관람했다. 얇은 미술사에 대한 지식을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현대 미술사의 흐름을 점검해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이 전시회를 보며 느꼈던 사실은 세월의 흐름과 특정 분파에 상관없이 미술가들은 늘 에로틱한 여인의 육체를 그림 속에 포개어 넣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팝아트든 추상화든 자신의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워 넣는 에로틱한 여인의 육체들이 그림 속에 범람하고 있다. 혼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혼자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예술적인 영감을 발현하기 위해 노력했을테지만, 결국 여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떨쳐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민 많은 철학자 니체는 늘 인간의 육체성을 경탄했다고 한다. 몸이 바로 우리자신이고, 영혼이나 정신은 그저 육체언어의 상형문자로 격하시켰다. 철학자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이 인간의 육체에 귀속된다는 결론을 짓기까지 그가 지녔던 고민들의 고함이 내 귓등에까지 들려온다. 그런 결론을 짓기까지 외로운 밤들이 수없이 그를 스쳐갔을 것이다. 버질과 테오도르가 그랬던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