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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

꿀곰 |2014.09.20 01:12
조회 32 |추천 0
그해 겨울은 여느때 겨울만큼 추웠지만
마음이 가난하여 더욱 추웠다.
세수를 하러 가려 하숙집 방문을 열자
문 앞 마당에서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하얀 입김을 뱉으며 신발을 신으려 보니
신발 옆에 무언가 놓여있었다.


포장을 뜯자
검정색 가죽 장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죽은 지구에서 가장 매끈한 것 같았고
안쪽의 털은 작은 토끼의 등처럼 보드랍고 폭신하였다.
단아한 광택과 매끈한 디자인의 장갑은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귀해 보였다.
그 추운 새벽에 누가 이걸 살그머니 두고 갔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가 구두살 돈을 아끼고
밥값을 모으고 머리 자를 돈을 아껴
장갑을 마련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허나 나는 고작 스물 한 살,
이천원짜리 장갑이 어울릴 나이였고
그 정도의 무게가 맞을 사람이었다.
하여 장갑도, 마음도 내게는 과분한 것이었다.


뒷굽이 닳은 그의 구두를 볼 때마다
그 돈으로 저걸 고치지,
차라리 새 구두를 사지, 라고 생각했고
보기싫게 길어진 그의 머리를 볼 때마다
그냥 머리를 자르지 그랬어,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편을 내가 더 좋아할거란 생각을 못할만큼
그가 영악하지 않아서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어떤 날 아침에는 내 신발 위에
새벽에 쓴 애틋한 편지가 놓여있었고
어떤 날 가방을 열어보면
신보 나왔네,라고 스치듯 말한 CD가 숨겨져 있었다.
CD 두장 살 여력은 없어
그는 이것을 듣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먹먹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모든 것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걸 그가 알까.



1년 전, 나는 누군가와
장갑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살면서 손이 시린 적이 별로 없었던 나였지만
괜히 장갑을 받고 싶었다.
장갑끼면 손잡기 어려워, 라는 그의 말에
그 때마다 벗으면 되지, 라고 내가 투정을 부리자
내 손을 장갑으로 써, 라며 그가 웃었지만


다음해 겨울 우리는 남남이었다.


방문 앞에 놓인 장갑을 보자
텅빈 가슴으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받고 싶던 것을 이렇게 받고 보니
나는 장갑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가 사준 장갑을 받고 싶은 거였구나,
나를 아껴줄 사람이 필요한게 아니라
그가 필요한 거구나 싶었다.
내가 원하는 이가 아니라면
강물같은 아낌도 무의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점점 느려지는 것 같았고
박동 하나하나가 가슴을 꾹꾹 눌러왔다.



벼랑 끝의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무한의 아낌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어보였는데
정작 영화에 나올법한 아낌이 쏟아져도
고마움 이상의 감정이 일지 않았다.
여자들이 동경하는 아낌받는 로맨스에서
대체로 간과되는 부분은
그 아낌을 누구로부터 받고 싶은가, 이다.



힘든 시간을 보낸 그와 마침표를 찍던 날,
그는 언제나처럼 선량한 눈으로
마지막으로 한번만 안아보자, 라며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야멸차게 돌아섰다.
침전된 그의 만감이 밀려오기 전에
나는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고
돌아서 걷는 마음에는
아쉬움보다 홀가분함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고맙다는 얘기를 제대로 건넨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별것 아닌 나란 사람을 그토록 아껴주었음이 고마웠고
나의 야멸찼던 마지막이 두고두고 미안하였지만
그를 알고 지내는 이후의 시간에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종지부를 찍은 관계에는
모르고 사는 것이 나은 일이 있고
침전된대로 두는 것이 나은 감정도 있는 법이다.



다만 나는 그 장갑을 15년동안 썼다.
20대를 지나 가죽장갑이 어울리는 나이가 될 때까지
다른 장갑을 사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단 하나의 감사의 표시였다.
어느날 문득 그 장갑을 잃어버렸음을 알았을 때,
숟가락으로 감자껍질을 벗기는듯
가슴이 서걱서걱 쓰라렸지만
한편으로는
오래된 빚을 청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어 마음이 조금 홀가분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잔인하다.
예의바르고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이더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잔인할 수 있다.
하여
사랑도 중요하지만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
귀한 사랑은
그 사랑을 귀하게 여길 이에게 쏟아져야 한다.
관계라는 미묘한 것에서
내가 규정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은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 뿐일 것이다.




받아줄 자리 없는 사랑은
겨울 아침에 흩어지는 하얀 입김처럼 무상하다.
소중한 마음조차 무심하게 버려진다.
그리되어도 좋을 사랑이라는 게 있겠는가.
그리됨이 아프지 않을 사랑이라는게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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