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훈/종.인] 그 날의 남자는 어디로 갔나요?
"어이, 새내기."
적당한 저음이 듣기 좋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묵직한 철갑이 내 손목을 옥죄는 걸 느끼고야 다시 눈을 떴다. 그가 내 쇠줄을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신발. 이거 안 놔? 잠 좀 자자!"
"자지 마. 새내기야 나 좀 놀아줘."
"미쳤어? 우리 내일 경기야, 이 현실성 없는 새끼야!"
"그러니까 나 좀 놀아줘. 응? "
이 미친 새끼. 종.인은 속으로 욕을 읖조리며 알겠다고 그르렁대듯이 대답했다. 세.훈이 짧게 웃었다. 새내기, 근데 너는 왜 나한테 이름 안 알려줘? 종.인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너는 내 이름을 알텐데. 나도 네 이름이 알고 싶다. 종.인은 아무 말 없었다. 세.훈은 다시 말했다. 뭐, 상관 없어. 네 이름은 나한테 아무 상관 없으니까. 안 알려줘도 돼. 종. 인은 아직도 아무 말 없었다.
"새내기, 자는 거야?"
"..."
"야, 야. 어.. 너 울어?"
"..."
내 말이 싫어서 아무 말 없는지 알았더니 그게 아니였다. 새내기가 울고 있었다. 괜히 한 쪽 맘이 찡했다. 제대로 된 인권 하나 보장 못하는 이 싸움쟁이들의 전투 보호소 안에서 씻은 적 없는 몸에 그 깔끔한 놈을 닿게 하긴 싫었지만 괜히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용기를 냈고 새내기를 안았다. 역시.. 되게 작구나. 이래가지고 어떻게 이길려고... 내가 낮게 읖조렸다. 종.인이 갑자기 울먹거리며 말했다.
"나 싸우기 싫어..."
"..."
"흐윽, 너무 무서운데, 싸우기 싫은데... "
"새내기야."
".. 내 이름 그거 아니야.."
"그럼 뭔데?"
"... 김.종.인."
나는 웃었다. 종.인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있잖아, 내일 경기장에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고 쓰러질 것 같고 무서우면 나를 불러. 내 이름 알지? 오.세.훈이야. 마음속으로라도 좋으니까 크게 불러. 내가 꼭 나타날께.
내가 꼭 지켜줄께.
조용하고 암울한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밤새 종.인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세.훈도 마찬가지였다. 내일 자신의 경기가 있는 건 아니였지만 어제 저녁 펑펑 울던 종.인이 머릿속에 맴돌아서였다. 한 사람을 대상으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건 처음이였다. 종.인의 표정이 펴 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종.인아."
"..."
"나 꼭 불러. 무서우면 꼭 불러. "
"응.."
난 아마 널 만난 순간부터 결심한 걸지도 모른다.
후회는 없다. 후회는 없을 것이다.
"신사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제 24회 전투유흥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와!!!!!!!"
"조금만 침착해 주시겠어요? 자 그럼 먼저 1대전 선수들을 소개시켜 드려야겠죠? 김.종.인, 김혁수 선수 호명했습니다!"
세.훈은 착잡한 표정으로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종.인을 보고 있었다. 김혁수 정도면 자신에게 아무 무리 없는 녀석이다. 하지만 종.인이라면 말은 달라지겠지.
"김.혁.수! 김.혁.수! 김.혁.수! 김.혁수!"
"김.종.인! 김.종.인! 김.종.인! 김.종.인!"
싸움의 고조가 이어지고 있었다. 창을 들고 미친 듯이 겨루는 것을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나라가 이렇게 미치게 되버렸지. 왜, 대체 왜. 그 순간, 여성 관람객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세.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 곳에는 종.인이 김혁.수의 창에 맞기 일보직전이였다.
민호는 달렸다.
"하악..!"
"ㅇ, 오.세.훈...."
괜찮아? 종.인아. 다친 덴 없지. 많이 무서웠지. 하고 싶은 말이 입에 맴돌았다. 그러나 급소를 제대로 찔린 바람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듣기 싫게 컥컥대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대로 경기 도중 아무리 선수라도 난입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돕지 않았다. 관중들은 싸움을 망친 나를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내일 내 경기에 나갔을 때 관중석에서 바늘이 쏟아지겠군, 예상했다. 몸에 점점 힘이 빠졌다.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새내기야..."
"흐윽, 왜 왔어, 이 병신아, 흐으.. 흐으.. 왜 나 대신 죽어, 왜!!!"
오열하는 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잘 들어지지 않는 팔을 들어 종.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싸웠는데도, 부드럽네.
"많이, 좋아해.."
후회는 없다. 나는 종.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내가 지금껏 무엇을 위해 달려왔나 생각했다. 무의미한 인생과 만 14세를 지나자마자 끌려온 전투훈련소와 8년이 넘도록 갇혀 살았던 보호소, 내 피와 땀으로 가득 섞였던 경기장, 날 버리고 갔던 부모님, 그리고.. 1주 전에 만났던 김.종.인.
다음 생에는 꼭 평범하게 만나자, 종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