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9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투를 자르고 자식에게 양복을 입힐만큼
개화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9살밖에 안된 그를 선교사에게 맡겨 미국으로 보냈다.
그렇게 네브라스카에 도착한 그는
농사를 짓는 어느 미국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는 청교도 사상을 가진 가정이었다.
그는 미시간 주립대 상과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곧잘 했다.
그러나 그는 편하게 미국인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는
조국을 위한 길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운동소식에 많은 미주지역의 한인들이 모여
시가행진을 했는데 그는 여기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유리병에 숙주나물을 키워 판매하는 방식으로
큰 부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거금을 벌자
그는 한국으로 귀국한다.
당시의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 때문에
가난에 찌들어 있었고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걸 지켜 본 그는 제약회사를 차리기로 작정한다.
버드나무를 상징으로 하는 유한양행의 시작이었다.
그는 "기업은 국가와 국민의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주식을 발행하여 가장 가까이 있는 종업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익을 함께 했다. 주식발행의 목적이 회사 확장이 아니라
종업원들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는 75년부터는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노사분규를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직원이 회사의 주주였던 탓이었다.
그가 은퇴할 때쯤, 그의 아들은 그를 대신해서
회사를 잇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들의 능력을 옆에서 지켜본 그는
아들이 회사를 경영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고는
과감하게 전문 경영인을 외부에서 영입했다.
아들이라고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71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유언장에는
다음과 같은 6가지 사항이 적혀 있었다.
1.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시까지 학자금으로 1만불을 준다.
2. 딸에게는 유한 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 동산이라 하고 학생들이 맘껏 드나들게 해 달라.
3.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 기금>에 기증한다.
4. 아내는 딸이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5.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6. 아무에게 돈 얼마를 받을 것이 있으니 얼마는 감해주고 나머지는 꼭 받아서
재단 기금에 보태라.
그는 1971년 당시 돈으로 36억 상당의 재산을
손녀에게 남긴 학비 1만불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회에 환원하도록 했던 것이다.
살아서 부자였던 사업가 유일한,
그는 조용히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