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득 창문 너머를 보았다.살을 에는 한풍과 함께 눈발이 나부꼈다.나는 고개를 쳐들고 창문 너머의 너를 보았다.네가 눈밭 위에 평온히 누워 잿빛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흰 색 침대 시트에 누워 검은색 벽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네가 너무 추워 보여서, 나는 입고 있던 온기를 나누어 주려 창문을 열었다.창문을 열자 딱딱하게 굳은 눈송이가 집 안으로 밀려들었다.
주황색 빛이 너를 향해 질주했다. 너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눈밭을 헤쳤다.소복하게 쌓여 있던 눈밭이 너의 손길로 인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품을 벌렸다.들어 오렴, 들어 와.눈발과 함께 나의 손짓이 나부끼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네가 말했다.들어 가렴, 들어 가. 다시는 나오지 말아.영원히 따뜻한 불빛 속에 살며 남을 구원하려 하지 말아라.네가 갖고 있던 화기마저 잃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게 설령 나일지라도. 구원하려 들지 말아.
2.
빗물 고인 웅덩이 사이를 걷고 있었다도시의 찬연한 불빛이 모두 웅덩이로 모여드는 듯 싶더라그것을 보고 있자니 네가 생각이 났다그 웅덩이 중 한 개 정도는 너의 눈물의 잔해가 아닐까두 개 정도는 네 슬픔의 산물이 아닐까세 개 정도는 우리의 마지막에서 비롯된 악惡 함이 아닐까
찰박 찰박웅덩이와 나의 발이 맞닿았다너도 어디선가 이 웅덩이를 밟고 있을까아, 이 웅덩이는 너의 눈물이로구나 하고 비로소 느끼고 있을까웅덩이를 밟는 그 순간에라도 나를 상기하고 있을까
빗물 고인 웅덩이라도 되고파그것으로 하여금 네가 나를 기억할 수 있다면
3.
화가는 붓을 든다.작가는 연필을 든다.무언가는 사랑을 든다.
붓과 연필이 가벼운 데 반해사랑은 몹시 무겁다그래서 무언가는 사랑을 버거워한다
무언가는 알고 있을까사랑만큼 가벼운 추상적인 물질은 없다는 걸그저 네 실상이 추레하여 사랑에게 그 모든 무게를 부여한 것은 아닐지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나 있느냐그 중함을 너에게로 다시 가져가거라그렇다면 사랑이 더없이 가벼이 느껴질 것이다
4.
서리가 앉았습니다.가는 곳곳마다 서리꽃이 피어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아직 겨울이 오기에는 먼 것 같은데이미 겨울이 와버린 듯합니다.
당신이 서있는 그곳은 어때요?서리가 앉았습니까.당신이 지키고 있는 그 마음은 어때요?내려앉았습니까.
놓으시려거든 확 놓아버리세요.내가 손을 뻗어 잔해를 주워 담을 수 없게.다시는 미련 같은 것 품어두고 아파하지 않게.
5.
겨울이다당신은 내내 춥다고 하였지마는결코 나를 끌어안지는 않았다
봄이다당신은 꽃잎을 덥석 물었지마는내게 사랑을 묻지는 않았다
여름이다당신은 쏟아지는 태양 볕에 고통스러워하였지마는길게 늘어뜨린 나의 그늘에서 쉬지는 아니하였다
가을이다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춤추고 싶다던 당신은왜 당신 탓에 떨어지고 있는 나를 보지 못했을까
다시 겨울이다당신은 또 춥다고 유난이다이제는 품에 좀 안겨주라그렇지 아니하면 이 쌀쌀한 겨울에 나또한 쌀쌀한 시체가 되어버릴 것 같다
6.
편지 한 귀퉁이모자란 공간다 채울 수는 없을 나의 마음다 비울 수는 없을 너의 마음
마음 한 귀퉁이꽉 차버린 공간다 차버린 나의 마음다 비워버린 너의 마음
방이라도 한 칸 내어주겠느냐너는 이미 비웠으니 어디든 내어줄 수 있을 것 아니냐나는 아직 꽉 차버린 탓에 누구도 들일 수가 없어 괴롭다
하루만딱 하루만 묵고 사라지리라 약조하마
그래야지만 내가 다음에 그 귀퉁이를 찾았을 때남겨진 나의 잔상을 보고서 행복할 것 같다그것으로나마 행복할 것 같다
7.
눈발 흩날리는 겨울밤묵을 곳이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한풍은 살을 에고 밤하늘은 그를 어둠으로 끌어안아 감춘다.그렇게 헤매고 헤매다가끝내 외로움에 사무쳐 눈밭 위로 풀썩 쓰러진 나그네그 나그네의 이름이 혹여사랑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