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의 온기
문득 창문 너머를 보았다.
살을 에는 한풍과 함께 눈발이 나부꼈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창문 너머의 너를 보았다.
네가 눈밭 위에 평온히 누워 잿빛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흰 색 침대 시트에 누워 검은색 벽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너무 추워 보여서, 나는 입고 있던 온기를 나누어 주려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 딱딱하게 굳은 눈송이가 집 안으로 밀려들었다.
주황색 빛이 너를 향해 질주했다.
너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눈밭을 헤쳤다.
소복하게 쌓여 있던 눈밭이 너의 손길로 인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품을 벌렸다.
들어오렴. 들어 와.
눈발과 함께 나의 손짓이 나부끼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네가 말했다.
들어가렴, 들어 가.
다시는 나오지 마라.
영원히 따뜻한 불빛 속에 살며 남을 구원하려 하지 마라.
네가 갖고 있던 화기마저 잃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게 설령 나일지라도.
구원하려 들지 마라.
웅덩이 무덤
빗물 고인 웅덩이 사이를 걷고 있었다
도시의 찬연한 불빛이 모두 웅덩이로 모여드는 듯싶더라.
그것을 보고 있자니 네가 생각났다
그 웅덩이 중 한 개 정도는 너의 눈물의 잔해가 아닐까
두 개 정도는 네 슬픔의 산물이 아닐까
세 개 정도는 우리의 마지막에서 비롯된 악惡 함이 아닐까
찰박 찰박
웅덩이와 나의 발이 맞닿았다
너도 어디선가 이 웅덩이를 밟고 있을까
아, 이 웅덩이는 너의 눈물이로구나 하고 비로소 느끼고 있을까
웅덩이를 밟는 그 순간에라도 나를 상기하고 있을까
빗물 고인 웅덩이라도 되고파
그것으로 하여금 네가 나를 기억할 수 있다면
각자의 사정
화가는 붓을 든다.
작가는 연필을 든다.
무언가는 사랑을 든다.
붓과 연필이 가벼운 데 반해
사랑은 몹시 무겁다
그래서 무언가는 사랑을 버거워한다
무언가는 알고 있을까
사랑만큼 가벼운 추상적인 물질은 없다는 걸
그저 네 실상이 추레하여 사랑에게 그 모든 무게를 부여한 것은 아닐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나 있느냐
그 중함을 너에게로 다시 가져가거라
그렇다면 사랑이 더없이 가벼이 느껴질 것이다
어느 겨울날의 한탄
서리가 앉았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서리꽃이 피어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아직 겨울이 오기에는 먼 것 같은데
이미 겨울이 와버린 듯합니다.
당신이 서있는 그곳은 어때요?
서리가 앉았습니까.
당신이 지키고 있는 그 마음은 어때요?
내려앉았습니까.
놓으시려거든 확 놓아버리세요.
내가 손을 뻗어 잔해를 주워 담을 수 없게.
다시는 미련 같은 것 품어두고 아파하지 않게.
사계의 연정
겨울이다
당신은 내내 춥다고 하였지마는
결코 나를 끌어안지는 않았다
봄이다
당신은 꽃잎을 덥석 물었지마는
내게 사랑을 묻지는 않았다
여름이다
당신은 쏟아지는 태양 볕에 고통스러워하였지마는
길게 늘어뜨린 나의 그늘에서 쉬지는 아니하였다
가을이다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춤추고 싶다던 당신은
왜 당신 탓에 떨어지고 있는 나를 보지 못했을까
다시 겨울이다
당신은 또 춥다고 유난이다
이제는 품에 좀 안겨주라
그렇지 아니하면 이 쌀쌀한 겨울에 나또한 쌀쌀한 시체가 되어버릴 것 같다
여인숙
편지 한 귀퉁이
모자란 공간
다 채울 수는 없을 나의 마음
다 비울 수는 없을 너의 마음
마음 한 귀퉁이
꽉 차버린 공간
다 차버린 나의 마음
다 비워버린 너의 마음
방이라도 한 칸 내어주겠느냐
너는 이미 비웠으니 어디든 내어줄 수 있을 것 아니냐
나는 아직 꽉 차버린 탓에 누구도 들일 수가 없어 괴롭다
하루만
딱 하루만 묵고 사라지리라 약조하마
그래야지만 내가 다음에 그 귀퉁이를 찾았을 때
남겨진 나의 잔상을 보고서 행복할 것 같다
그것으로나마 행복할 것 같다
무제
눈발 흩날리는 겨울밤
묵을 곳이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
한풍은 살을 에고 밤하늘은 그를 어둠으로 끌어안아 감춘다.
그렇게 헤매고 헤매다가
끝내 외로움에 사무쳐 눈밭 위로 풀썩 쓰러진 나그네
그 나그네의 이름이 혹여
사랑이었던가.
증오의 변화
그립더이다.
날 매몰차게 버리고 간 당신.
보고프더이다.
내게서 등 돌렸던 당신.
돌고 도는 것이 사랑이라고는 하나
평생 미워할 줄로만 알았던 당신이
이러한 마음으로 다시 찾아오다니
애달프면서도 고맙더이다.
당신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질 않아 괴로웠던 참에
실상으로나마 다시 찾아와 주어 얼마나 고맙던지
허나 곧 떠날 그대이시니 그리움만 주겠습니다.
마음 같은 것 다시는 주지 않겠다, 약조하였으니까요
그리움만 떠안고 돌아가시는 길
그 길에 꽃이 가득 나부끼기를
사랑을 내게 맡겨두고 등 돌리시는 길.
그 길에 피가 가득하기를
그 피가 나의 눈물의 일부라는 것을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어요.
무덤에서의 편지
사람은 아플 때 가장 견고해진다
나는 네가 아팠으면 좋겠다
견고해졌으면 좋겠다
눈발 휘날리는 산중턱
나의 둥근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아
구슬피 울던 네가
더욱 아팠으면
더더욱 견고해졌으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랑한다
나약한 나에게 사랑을 드밀던
너를 우직한 마음으로 사랑한다
이 편지 한 귀퉁이에 적어 보낸다.
네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사랑 섞인 바람으로 너를 죽였다.
눈발 휘날리는 산중턱에
네가 아프기를, 견고해지기를 바랐던 나의 무덤 하나
내가 안녕하기를, 살아나기를 바랐던 너의 무덤 하나
아픈 이들은 흙무덤에 갇혀 견고함을 이룬다
독백
오랜만에 연필을 잡는다
쓸 것이 없어 쓰인 것이 없다
백지 한 장 남겨두고 너를 잡는다
이번엔 쓸 것이 많아 쓰인 것이 없다
너는 부풀어가고 있다
나는 이미 터졌다
잔해만이 남은 황량한 마음 한구석
너라도 와서 채워라
풍선처럼 부풀다, 부풀다 못해
펑, 하고 터져버렸다
그러니까 네가 와서 바람이 되어주련
바람 빠진 풍선에 입김이라도 불어 주련
네 숨결 하나면 죽은 풍선도
관 뚜껑 열고 일어설 것이다
몇 년 만에 연필을 잡는다
쓸 것이 없어 쓰인 것이 없다
터져버린 너의 잔해를 줍는다
이번엔 쓸 것이 많아 울 것이 없다
사랑을 찾습니다
흔히들 사랑은 가까운 곳에 있다, 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의아하다
몇 년 동안이나 찾아 헤맸는데도
머리칼 한 올 찾을 수 없는 나의 연정이여
잡히는 이 없는 술래잡기를 하는 기분이다
이제 좀 보이는구나 싶어 손을 뻗으면
허영처럼 사라지는 그대여
당신은 안개가 아니다
그렇게 쉬이 사라지지 마라
보는 이 없는 연극을 홀로 이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홀로 대본을 외고
홀로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우짖고
이 연극의 결말이 어찌될지는 나도 모른다
무대 밖 커튼 뒤에 숨어 있는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불과 조연일 따름이다
길잡이 없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지도라도 한 장 내어주련
이 드넓은 세상에서
너라는 지도 한 장 없이 여정을 이어가는
나라는 작은 방랑자가 가엾지도 않으냐
사랑은 가까운 곳에 있다
길고 긴 술래잡기 끝에
무섭도록 외로웠던 연극 끝에
끝이 보이지 않던 여행 끝에
기어코 깨달았다
사랑은 이 마음에 있다
먼 곳에서 찾지 않아도
머리칼 한 올 보이지 않아 마음 졸여도
결국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사랑은 먼 곳이 아닌
바로 이 하찮은 마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