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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귀화인 후손출신 의병장 이야기

언더테이커 |2015.04.07 01:50
조회 882 |추천 1

구한말...일제의 침략에 국운이 기울어져 갈 무렵...

그 몸을 잊고 분연히 일어나 일제에 맞서 싸운 15만의 의병들.

그중 1만여의 의병들은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했다.

그중에서도 지리산 계곡 중 가장 깊고 거친 칠선계곡을 무대로 활동했던

별호 비호장군으로 세상에 그 흔적을 남긴 의병장 석상룡(石祥龍) 장군을

​함양 마천에서 마주하였다.

비호장군, 석상룡 의진은 여러가지로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들은 의병장에서 부터 부대원 하나하나 모두 지리산 산사람,

포수나 화전민 출신이었다. 부대원의 수는 작았으나 지리산 계곡과

능선 하나하나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하는 사람들이고 날래고

용맹하여 명성이 높았다.

1. 석상룡 의병장의 선조 이야기

석상룡 의병장의 출신도 특이하다.

그는 해주 석씨로 중국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13세손,

종손이었다.

중국 명나라의 유민이 지리산 골짜기까지 흘러들어와 살게 된 사연도

나름 유명하다.

조선 중기의 역관 홍순언이 중국땅에서 의로 도와준 여자가

석성의 부인이 되었고 부인에게서 홍순언의 얘기를 익히 들어온 그는

홍순언과 조선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명나라의 고관인 그는 조선 태조의 혈통을 바로 잡고,

또 수년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선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적극적으로 진언하여 조선파병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장기전으로 돌입하며 명의 국력이 쇠락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석성은 그 책임으로 인해 투옥되어

결국은 옥사하게 되는데..그는 죽기 전, 옥중에서 부인과 아들에게

조선으로 망명하도록 유언하여 그 부인과 둘째 아들 천은 조선으로

피했으나 맏아들 담(潭)은 귀양을 가서 수년간 고생한 후 석성이

신원되면서 풀려났다.

담은 명이 기울고 있고 그 가문을 다시 일으킬 길이 없어

후에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조선은 담을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해주 석씨로 사성하면서

황해도에 살게 하였다.

1644년, 명의 멸망후 명의 유민들은 청의 요구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조선에서는 이들을 숨겨 경상도 산음(山陰,지금의 산청)에 살게하였다.

이곳이 산청과 함양의 경계지역인 생초지역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이들 석성의 후손들은 지역관리와 토호들의 횡포에

못이겨 전답을 다 뺐기고 지리산 북쪽의 가장 험한 칠선계곡이 있는

함양 마천 추성리에 자리를 잡게 되어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2. 의병전쟁의 길로 나서다.

1907년 정미늑약으로 국권강탈이 가시화 되던 그 시기, 전국에서

그리고 지리산 자락에서도 의병전쟁의 치열한 불길이 타올랐다.

원래 근근히 먹고 살기에도 바빴고, 모여살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사는

화전민들을 조직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고광순이나

김동신 같은 지리산 의병장들의 활약에 자극 받기도 하였고,

일제가 법령을 발하여 산포수들의 총포를 뺏아 산포수들과 화전민들의

생계를 위협하였다.

일제는 함양 마천 추성리 인근 벽송사와 남원 실상사에 주둔하여

화전민들을 괴롭혔다.

이런 상황에서 화전민 중 그나마 살이가 괜찮았고 또 글을 알았던

석상룡이 나서 함양,산청,남원 지역의 화전민과 산포수들을 모아

창의하였다.

그렇게 구성된 석상룡부대 50여명은 험준한 지리산 자락을 누비며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실상사전투, 성삼재전투, 벽소령전투,

쑥밭재전투등을 거치며 왜의 진영을 급습하여 다수의 왜적을

살상하였다.

치고 빠지는 그의 부대의 활약상이 얼마나 신출귀몰했으면

석상룡 의병장의 별호가 비호장군이었겠는가.

그의 부대는 1910년 국권강탈 이후에도 지리산을 배경으로 활동했는데

결국 1912년 석상룡 장군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그의 의병전쟁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3. 한많은 최후..

1912년 체포 후 그는 5년간 투옥되어 갖은 옥고를 치루었다.

결국 그 모진 고문의 영향으로 1920년, 50세로 순국하였다.

석상룡 의병장의 아우가 되는 채용(彩龍)이 일경의 눈을 피해

그 묘소를 지리산 천왕봉 아래 쑥밭재에 모시고 돌을 깎아

송공비를 세웠다.

그 비문을 보자면

'公의 자는 龍見이라 했고, 세칭 비호장군이라 불렀다.

용력이 뛰어나 국가멸망의 위기에 의병을 일으켜 지리산중에서

왜경을 참(斬)한것이 심히 많았다.

필경에 투옥되어 5년뒤에 나왔으나 옥중 고질로 경신년 10월에

울분을 머금은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적고 있다.

이 비문이 그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명산인 지리산에는 한국전쟁 전후에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 또 무고한 주민들이 피가 흘렀던 곳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아픈 역사 이전에 또 그 위에 나라를 지키고자

지리산에 피를 뿌린 1만 여 의병의 피도 흘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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