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한국침략의 선봉장 이토히로부미가 애국지사 안중근에게 암살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현장에서 품 속의 태극기를 휘날리며 "코리아 우라!"를 외치다 체포된다
안 의사는 시종일관 당당했으며 재판과정에서도 결코 비굴하거나 굴종하지 않았고
당당히 대한의 군인으로서 죽었다
이 장쾌한 의거에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은 장렬한 뜻이 천추에 빛나리라(壯烈千秋) 고 휘필을 남기며 그를 찬양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조국 조선, 대한제국의 조정에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의 다급한 급보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일본 천황 폐하에게 직접 전보하기를,
“바로 오늘 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이 하얼빈(哈爾賓)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가 똑같은 마음으로 지극한 뜻을 표시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순종 2년 10월 26일
순종이 직접 조령을 내려 이르기를
“태자 태사 이토오 히로부미는 뛰어난 기질에 세상을 구제할 지략을 지녔고,
자신의 한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찍이 평화로운 큰 국면을 이룩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으며
더우기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주의를 돌렸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왕래하면서 위태롭고 어려운 국면을 부지하고 수습하여 나갔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큰 계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뜻밖의 변고가 생겨 놀라운 기별이 문득 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놀랍고 아픈 마음 끝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토의 장례식에 의친왕 이강을 보내는 것은 물론 장례비용도 궁내부에서 담당했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려 이토를 높게 기렸다.
궁중은 마치 상갓집과 같았다.
통감부 문서 7권 26~28쪽에는 고종이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10월 27일. [중략] 이날 태황제는 말했다.
“이토를 잃음으로 동양의 인걸을 잃었다. 우리나라에 이토는 충실정의를 가지고 임해,
뼈를 장백산에 묻어 한국의 문명 발달에 진력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일본에 정치가가 많다고 해도 이토와 같이 세계의 대세를 보고, 동양의 평화를 염원한 자는 없다.
이토는 실로 우리나라의 자비로운 아버지(자부)와 같다.
그 자비로운 아버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 같은 국민이 있다고 하면,
사물의 이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토의 진의를 잘 모르는 해외 유랑자일 것이다.”
자비로운 아버지랜다. 이토에 대한 고종의 찬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09년 일본 잡지에 실린 그의 추모사는 이토를 향한 절절한 사랑을 느끼게 한다
잘 먹고 잘 살았다 한다 ^^
처음에는 반발이 심했는데 왕실 보존하고 어찌됫든 바꿀수 없다는걸 알고 그냥 체념한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