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29년 2월 경남 진주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열여섯살되던 1944년 6월경에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일본에 갔다.
선생이 가고 난 뒤 엄마는 안된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으나, 그때는 선생이 말하면 거역하지 못할 형편이라 가게 되었다. 우리반에서 반장과 나 2명이 갔다. 반장이었던 친구는 반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였고 집도 부자였다.
진주에서 모인 사람은 50명이었다. 마산에서 또 50명이 기차를 탔고, 부산에 가보니 다른 곳에서 50명이 와 있어서 모두 150명이 되었다.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아침에 출발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후 다시 기차를 타고 도야마현(富士縣)의 후지코시(不二越) 비행기공장으로 갔다.
공장에서는 가슴에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고 박은, 누르스름한 옷과 모자를 주었다. 근무시간은 12시간이었으며 낮일, 밤일을 일주일씩 교대로 했다.
월급은 저금해준다는 말을 들은 듯하나 구경한 적은 없다. 공장에 있을 때는 일도 힘들었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참을 수 없었다.
도야마현에서는 밥과 된장국, 단무지가 고작이었고 밥도 아주 조금밖에 주지 않았다. 밥을 아껴 먹으려고 한알씩한알씩 세며 먹기도 하고, 세 숟가락에 다 먹어치우기도 했다.
점심으로는 조그만 삼각형 콩떡 3개를 나누어주었는데 배가 너무 고파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다 먹어치우기 일쑤였다. 밤일을 할 때는 일이 끝나고 기숙사에 오면 아침을 주고는 저녁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생활이 고되고 하도 배가 고프니까 어떤 전라도 아이는 정신이 돌아버렸다. 풀을 뜯어 먹고 죽은 여자도 있었다.
겨울에 밤일하면서 일본 사람들은 식사를 하였다. 우리들은 초저녁에 중식으로 먹을 콩떡을 먹어치우고 식사시간에는 용광로 옆에서 울면서 쪼그리고 잔 기억이 난다.
밤이었다. 철조망을 쳐들고 나와 전에 도망쳤다. 그런데 공장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군인에게 잡히고 말았다.
친구와는 죽으나 사나 손을 꼭 잡고 가자고 했는데 잡혀서 트럭에 타고보니 나뿐이었다.
운전병 옆에 앉아서 가는데, 그 헌병이 중간에 차를 세우고 날 내리라고 해서 내렸더니 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천지를 모르게 깜깜했다.
거기서 그 군인이 나를 덮쳤다. 남자를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무서워서 반항도 못했다.
다시 차를 타고가 부대에 도착했다. 그 부대 뒤에 천막 같은 집이 있었다. 거기에는 이미 여자가 다섯 사람 정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아무말도 않고 그냥 날 쳐다보기만 했다.
한 사흘쯤 있다가 그 헌병이 와서 다시 건드렸다. 그리고 나서 다른 군인들이 오기 시작했다. 거기서는 하루에 10명 이내로 사람을 받았다.
낮에 오는 군인은 없었고 토요일 오후부터 많이 왔다. 군인들에 비해 여자들의 수가 적어서 쉬는 날은 없었다. 무섭고 밑이 따갑고 아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군인들이 이름을 부르면 여자들이 담요을 들고 군인을 따라 주욱 나가야 했다. 깜깜한 야산에서 몇 사람인지도 모르는 군인들에게 당하곤 했다.
너무 당해서 밑이 아파서 걸음을 못 걸으니까 데리고 간 군인들이 끌다시피하여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 그때의 비참한 느낌이란 정말 말로 다 못한다.
거기서 얼마간 있다가 부대가 이동하였다. 두번째 장소로는 하루도 안 걸려 간 것 같다. 부대는 아주 넓어서 납작하고 지붕이 평평한 건물이 여러 군데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집도 지붕이 납작했고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에 복도가 있고 방이 여러 개 있었다.
부대는 컸지만 군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하루 대여섯명 정도 상대했다. 돈이나 표 같은 것은 없었고, 그때 군인들이 콘돔을 썼는지 어떻게 했는지 전혀 몰랐고 콘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요새 와서야 알게 되었다.
난 아파서 그저 드러누워 있는 것이 좋아 가까운 바깥으로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밑이 아파서 걸음도 똑바로 걷기 힘들었다. 난 토요일이 되는 것이 죽기보다 무서웠다. 정말 어디로 도망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가 일본 군인에게 끌려 갔을 때는 초경이 있기도 전이었다. 마지막 장소에 있을 때 피가 살짝 비친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에 바로 임신이 된 것이다.
해방이 된 후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옆의 아주머니가 죽지 못하게 계속 옆에서 따라다니며 지켰다.
집에 가니 어머니가 애까지 딸린 그 꼴로 집에 못 들어온다고 하였다. 아이는 어찌어찌 고아원에 맡기게 되었으나,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거기 갔다와서 특히 몸이 아프다. 젊었을 때는 다달이 월경을 할 때마다 이틀씩은 방을 헤매고 다녔다. 하도 아파서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자꾸 하혈을 했다. 너무 아프고 심해서 이것만 끊어지면 발가벗고 춤이라도 추겠다고 했다. 병원에선 자궁내막염, 나팔관 이상이라고 했다.
방광 이상은 20년이 넘었다. 오줌도 이상하고 누워도 찝찝하고 몸이 퉁퉁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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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근로 정신대 피해자이자 위안부 피해자인 강덕경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과를 하면서도한국에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