셎운이야
초상화 한 장을 남기고 그 사람이 사라진뒤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와 처음 말을 나눈 건 고등학교 1학년의
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여름으로 가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요만큼도 믿지 않았었다.
태어나 자란 저택에는 지겨울 정도로
많은 문이 있었지만, 그 문을 하나하나
열어 바깥 풍경을 확인하는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했었다.
저택에 있는 한, 꽁꽁 얼어붙은 겨울은
계속될 것이고 나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을테니.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여는 건 그 밖으로 나올때 뿐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죄수와 같은 생활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2준33면ㄴ과 만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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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 당일.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복도에 붙은 반 배치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붉은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맑고 환한 눈으로 1학년 아이들의 이름을 읽어내리고 있다.
하얀 이마에 드리워진 앞머리는 자연스런 검정색이었고 교복은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늘씬했지만 몸집이 작은 인형같은 그를 보고 난 걸음을 멈추고 전율했다.
훌륭하다.
이건 천연기념물이야.
이렇게 고풍스런 미소년은 그리 흔히 찾아볼 수 없다.
외국의 피가 섞인 뚜렷한 이목구비와 넓은 어깨,
그리고 밝은 갈색 머리.
나는 옛날부터 그런 자신과 대비되는 가녀린 남자에게 약했다.
여보라는 듯 튀어나온 근육과 탄탄한 다리보다는 이런 평평한 체형에 낭만과 정취를 느낀다.
아, 벗기고 싶다.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교복 아래 감춰진 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피부 색깔은? 살결은?
분명 쓸데없는 장식을 벗겨내면 아름다움이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날거다.
여자들 사이에 던져놔도 독보적일 하얀 피부와 그와 상반되는 부드러운 흑발의 절묘함을 떠올리고 황홀해하며 나는 일단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내 어깨가 그의 목에 닿을 정도로 접근했지만 상대는 눈치 채지 못한 채 즐거운 표정으로 명단을 바라보고 있다.
옆모습도 귀여운데. 목소리는 어떨까?
싱글거리며 바라보고 있는데, 소년이 갑자기 오한이 든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알아챈걸까. 무서운 무언가를 보듯 굳은 얼굴을 돌리더니 바로 옆에 있는 나를 올려다보고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
눈을 동그랗게 뜬 그 얼굴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나는 싹싹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자 소년이 안도한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너도 8반이니? 내 동생도 올해 여기 입학했는데.“
명찰을 보니 2학년이다.
살짝 당황한 것 같았지만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내 상상을 전혀 배신하지 않았다.
아아, 목소리까지 예쁘네.
“아뇨. 1반인데요.“
“...? 그럼 왜 8반 명단 보고 있어?“
“명단이 아니라 선배를 보고 있었어요.“
“뭐?“
다시 눈이 동그래진다.
“전 5ㅅㅔ후ㄴ이에요.“
“아, 난 김2준24면ㄴ이야. 근데 날 보고 있었다니... 무슨 뜻이야?“
“제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으면 해서요. 어때요?“
“나를?“
“첫눈에 반했어요.“
눈을 가늘게 뜨며 달콤하고 열띤 눈빛으로 바라보자 김4준ㄴ5면의 뺨이 달아올랐다. 기대했던 반응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음, 내가... 모델? 아, 하지만 잠깐이라면.“
“꼭 선배 누드를 그리고 싶어요.“
“응?“
그리 싫지않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던 김3준4며ㄴ의 얼굴이 그 순간 얼어붙었다.
그는 미지의 생물체를 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김5준7며ㄴ의 턱을 손으로 건드리며 싱긋 웃었다.
“응? 부탁할게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선배 모습을 보여줘요. 몸 구석구석까지 남김 없이 그려 줄 테니까.“
조금 전 까지 달아올랐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리더니 김5준ㅇ면은 겁을 먹은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거거거절할게!“
온몸으로 외치더니 김3준ㄴ몀은 내 손을 뿌리치고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교사 현관 안으로 도망쳤다.
이런, 내가 너무 솔직했나? 변태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초조해 하는 얼굴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기회는 앞으로도 있을 테니까. 싫어하는 그를 설득하는건 분명 무척 즐거운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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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김7줌몀을 생각하며 복도에서 혼자 웃고 있는데 재수 없게도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나를 노려보며 말씀하셨다.
“그 천박한 얼굴하고는... 이 집안 사내놈이 현관에서 낄낄대기나 하고.“
“이제 오셨어요,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말대로 허리를 곧게 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룹의 총수로, 백번 찔러도 안 죽을 것 같은 할아버지는 눈에 낀 돋보기 안경을 번뜩이며 오른 쪽 눈을 추하게 찌푸리고 불쾌하다는 듯 내 머리를 쳐다보셨다.
“그 머리도 입학식 날까지는 짧게 치고 검게 물들이라고 말했을텐데.“
고양이털같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목덜미위까지 기르고 있다.
할아버지는 이 머리카락을 무척 싫어하신다.
혼혈이었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머리카락이니까.
아버지와 내연사이였던것이 들통나 할어버지께 내쫓긴 어머니는 십여년전에 남편과 아들을 두고 친정인 스웨덴으로 떠났다.
“이제 와 검게 염색해봤자 더 눈에 띌거에요. 친척들뿐만 아니라 회사 사람들까지 저에 대해 다 알잖아요. 걱정마세요. 이사장이신 할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은 없을겁니다.
오케스트라부에도 오늘 가입했고요.“
할아버지는 아직도 불만스레 노려보고 계셨다. 노인네들은 참 성가시다니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누르며 웃었다.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할아버지에게 복수하듯 화려한 갈색머리칼을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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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에서는 아무도 할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다.
사실은 미술부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오케스트라부에 들어가기를 원하셨다.
당신 자신도, 아버지도 모두 오케스트라부의 지휘자를 맡았으니 후계자인 너도 그래야만 한다. 그림은 허락할 수 없고 화가가 되고 싶다는 건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이다.
대신 나는 대강당 맨 꼭대기 층의 아틀리에를 받았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려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다.
내 일인데도 내 마음대로 결정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할아버지의 명령대로였고 그런 생활이 견딜 수 없이 답답했다. 착한 아이가 되는 대가로 아틀리에를 받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곳은 아름다운 감옥이었다.
빨리 자유로워지고 싶어.
목이 찢어질 정도로 외치고 싶었다.
왜 나는 겨우 열일곱인 걸까.
하루라도, 일분 일초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싶다.
할아버지의 절대적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폭풍같은 힘이 있었으면.
답답한 우리 속에서 교과서에 적힌 글자를 그저 머리에 쑤셔 넣는 것에 불과한 수업을 3년이나 받아야 하다니, 전부 부질 없는 짓이다.
나는 더 넓은 세상에서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
가슴속에서 가시에 싸인 덩어리가 여기저기 부딪히며 살갗을 벗기는 듯 괴로웠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난 그 사람을 떠올린 순간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분명 환한 눈을 가지고 있었지.
마치 새롭게 시작된 학교생활이 빛으로 가득 찼음을 확신하는 듯 희망에 가득 찬 시원한 표정으로 열심히 신입생들의 이름을 보고 있었다.
그 사람 주변만 맑고 평온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싶다. 그 사람을ㅡ. 김5준8며ㄴ을.
거슬리는 부분 말해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