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생활이 넉넉한 편이었다. 우리 소유의 논밭도 있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부모 안 보는 데서 공부해 똑똑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로 살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양군의 우리 마을에는 일본 사람들 앞잡이 노릇을 하는50대 정도의 아저씨가 살았다. 어느날 그 아저씨가 나에게 말하기를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공부시켜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승락을 했다. 그러나 부모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호되게 매맞을 것 같아 숨겼다.
며칠 후 저녁녘에 그 아저씨가 찾아와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나오라고 해서 부모 몰래 나갔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짐 싣는 트럭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트럭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그후 우리 동네 아저씨는 나를 일본인 순사 다나까에게 넘겨주고 가면서 나를 공부시켜줄테니 말 잘 들으라고 했다. 그곳에는 나말고도 조선인 여자 4명이 더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학생복을 입은 이도 있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들어갔다. 가는 동안 약 두차례에 걸쳐 대여섯명의 우리 같은 조선인 여자들을 또 태웠다.
기차에 같이 타고 갔던 우리들은 모두 만주에 있는 군위안소에 배치되었다. 위안소에는 30명 가량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키가 작은 군인은 우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지독하게 굴었다. 특히 위안부들이 일본인 군인들과 싸우거나 군인을 상대하지 않으려 하면 심하게 때렸다. 위안소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위안소 주변에는 부대가 있었다. 위안부 한 사람이 1개의 방을 사용했다. 처음에 위안소에 도착하자 성병이 있는지 처녀인지 등을 검사했다.
낮에는 병원일을 하고 밤에는 군의관이 나에게 자러 왔다. 여자에게 정조가 중요하다고 듣고 자랐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내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몇달 후에는 간호부일을 그만두고 위안부 노릇을 시켰다. 군인들이 많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월경중에도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군인을 받아야 했다. 군인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들어오면 붙잡고 실컷 울기라도 하겠는데 3년 동안 조선인 군인은 한번도 못 보았다. 다른 위안부들 중에는 조선인을 보았다는 이도 있었다.
나는 다른 위안부들보다 군인을 적게 받는 편이어서 자주 혼났다. 군인이 적은 평일은 10명 내외를 상대했고, 토·일요일은 40-50명을 상대해야 했다. 돈은 한푼도 받지 못했다. 군인들이 와서 따로 돈을 주고 간 적도 없었다.
군인들 중에는 사면발이라는 성병이 있는 사람이 많아대부분의 위안부들이 이에 옮았다. 군인들은 문 밖에 줄을 서 있다가 차례대로 들어왔는데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들어와서 반드시 콘돔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콘돔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군인도 있었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어떤 군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받아주지 않는다고 술을 먹고 와서 칼을 뽑아 들고 행패를 부렸다.
술 먹고 위안소에 들어와 칼을 다다미에 꽂아놓고 성행위를 하는 사람이 많아 방바닥에는 칼자국이 많이 났다. 이는 자기 하고픈 대로 실컷하게 해달라는 위협이었다.
어떤 군인은 내 옷을 다 찢고 발가벗겨 때리고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서 신발겋게 달구어진 인두 모양의 불쑤시개를 가지고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지졌다.
해만 지면 부모 생각에 가슴이 저미었다. 공부가 뭐길래 공부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이곳에 와서 이 신세가 되었나 생각하며 절망하였다. 엄마 생각에 마음에 병이 나서 몸져 눕기도 했었다. 보초병들이 늘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갈 계획을 짤까봐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위안부들끼리도 서로 잘 몰랐다.
위안소에 있을 때 나는 임질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606호 주사도 맞고 약도 발라 나았다.
내가 위안소에 간 지 3년만인 스무살에 종전이 되었다.고향집에 돌아가니 죽은 사람이 살아왔다고 깜짝 놀래며 나더러 귀신이 아니냐고 했다. 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려고 성화였으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위안부였는데 누구와 결혼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이 괴로와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어 고향에 돌아온 지 1년만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나와서는 이모집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지냈다. 내가 위안부였던 것을 알아볼까봐 두려워 자꾸 옮겨 다녔다.
현재는 동생의 손주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지금 사는 방은 반지하에 있는 방으로 보증금 150만원에 월 7만원씩 내고 산다.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문필기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