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시간을 뜬눈으로 지샌 경수는 언제나처럼 어스름한 시간에 푸른 얼굴을 하고 소리 없이 서재에서 나와 말끔히출근 준비를 마쳤다. 새하얀 셔츠에 파란 넥타이를 맨 투명하리 만치 하얀 얼굴의 경수는 도무지 밤을샌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열려있는 서재의 문으로 경수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여주의 벗은등을 응시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여주에게 제 침대는 터무니 없이 컸다.그래서인지 저 새파란 이불이 금방이라도 물로 변해 여주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아마 일말의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라앉을 테지, 너는. 지난 밤의 흔적이여린 등 여기저기에 경수의 입술처럼 붉게 남겨져 있었다. 한 손에 가운을 들고 문틀에 기대어 선 경수가입을 열었다.
“일어났니, 여주야.”
여주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일어났네, 하고 낮게 중얼거린 경수의 목소리가 공기 속으로 푸스스 흩어졌다. 천천히걸음을 옮겨 침대에 무릎을 디뎠다. 우아한 경수의 손이 여주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등을 보인 채로 앉은 여주의 목 뒤에 짧게 입맞춘 경수가 샤워가운을 천천히 입혔다. 그 별 것 아닌 행동에도 그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경수가 뒤에서끌어안듯이 팔을 내어 앞섶에 매듭을 지었다. 날카롭게 아프고 너무도 고단한데도 여주의 몽롱한 눈빛은경수의 단정한 얼굴을 쫓았다. 또다시 다정한 그의 손길은 어제의 잔혹한 그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어서이 모든 것이 여주에게는 어쩐지 신기루처럼 생각되었다.
“씻으러 가자, 여주야.”
여주의 말간 눈동자가 경수를 잠시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순종적인 그 눈망울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욕조에는 따듯한 물이 가득 차있었다. 증기가피어올라 시야가 혼탁했다.
그때, 경수가 여주의 가운 매듭을 풀어내려 손을 뻗었다. 한 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기척 없이 다가온 그의 손에 모든걸 맡길수도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뒷걸음질 친 여주의 눈을 경수가 닿지 않는 손을 뻗은상태 그대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주는 낯선 느낌에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제 행동에 한껏 당황한여주와는 달리 경수는 아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코앞으로 다가온 경수는매듭을 끌러냈다. 여주가 따듯한 물에 들어가자 욕조에 걸터앉은 경수가 깨끗한 천을 물에 적셔 여주의목을 닦아 내렸다. 손이 곡선을 따라 어깨로 내려갈 때였다. 여주가경수의 손을 잡았다. 악몽 같은 어제의 일이 있었다. 여주의행동은 당연한 반사 작용일지도 몰랐다. 여주는 그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 행동에 놀라버린 여주의 손은 애처롭게도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명확히 그를 저지하는 제스처였다. 여주가 겁먹은 눈을 들어올려 경수를 올려다봤다. 경수가 한쪽 눈썹을찡그렸고 순식간에 여주의 두 손을 잡아채 머리위로 결박했다. 사방으로 물이 튀어 올랐다. 욕조 안으로 들어온 그의 잘 차려 입은 정장 바지와 흰 셔츠가 물에 젖었다.파란 넥타이는 물에 젖어 짙은 색으로 늘어졌다. 물이 끼얹어진 경수의 머리카락이 하얀 얼굴에축축하게 들러붙었다. 순간적인 악력에 바로 되살아나는 기억 탓에 여주가 두 눈을 꾹 감았다. 경수가 다시 볼을 내려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저 여주의 볼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뿐이었는데, 때문에 천천히 눈을 뜬 여주는 그제야경수를 제대로 마주볼 수 있었다. 저를 내려다 보는 경수의 투명한 눈동자가 보였고, 경수의 속눈썹을 타고 방울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보였다.
그때 경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물에 젖어 반들거리고있었다.
“네가 나를 거절하면,”
경수는 고개를 숙여 여주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목 언저리에서 웅얼거리는 탓에 뜨거운 숨결이 닿아왔다. 감각이 선명했다.
“화가 나면서, 흥분하게 돼.”
경수가 여주의 목덜미를 더욱 끌어다 안았다.
“네가 울어버리기라도 하면,
……주체 할 수가 없어져.”
흠뻑 젖은 경수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주의 손을 결박하고 있던경수의 단단한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나간 경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