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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수천년간 기근과 고통을 준 종교는 ?

쯧쯧쯧 |2015.09.11 04:10
조회 199 |추천 1
 

 

한반도를 거지국가로 수천년을 만든 불교라는 미개국의 왕자를 믿는 종교


불쌍한 국민의 돈을 거둬 불교에 주는 현실

문화재청에서는 지난 2007년부터 지역별(산간오지․폐사지)로 많이 산재되어 있는 취약 문화재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풀베기, 잡초제거 등 문화재를 상시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특별 관리비’를 편성해 지자체에 교부하고 있다.
편성 현황을 보면 매년 30억 안팎의 일정한 수준으로 2012년 현재까지 6년간 총 163억이 지급됐는데 문화재청은 특별 관리비의 집행 내역은 물론, 지자체의 분기별 보고 외에 문화재의 관리 보고서나 특이사항, 관람환경 개선 등에 대한 피드백을 전혀 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 담당자는 “문화재청에서는 특별관리비를 단지 지자체에 내려 줄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을 안 하고 있다“라는 답변까지 늘어놨다.

국민의 혈세가 “특별관리비”라는 특별함에 둔갑되어 방만하게 집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문화재에 얼마가 집행되었는지’, ‘상시인력이 겸직을 하고 있지 않은지’, ‘문화재 관리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등 전혀 확인을 못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직무유기이며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고려를 멸망시킨 불교


후고구려의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칭했다.
무리한 천도와 전쟁으로 세금을 자주 거둬갔다.
또 의심이 많아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이는 등 점점 난폭해졌다.

결국 궁예를 내쫒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의 주인이 되었다.

당시에도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백성의 노동력과 돈이 많이 들어가는 연등회, 팔관회 같은 불교행사를 삼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성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시대 묘청대사가 풍수지리를 들어서 서경천도를 주장한다.
그러나 서경의 대화궁에 벼락이 떨어지고 반대세력 때문에 취소된다.
묘청은 인종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강바닥에 기름채운 떡을 놓아 강물 빛깔이 용의 침이라고, 서경천도를 해야 한다고, 속이다가 발각된다.
묘청승려는 반란을 일으키다가 죽는다.

불교의 정치 섭렵으로 무신의 난 이후 고려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몽골이 쳐들어왔고, 고려정치에 간섭하게 되었다.

이후 몽골은 계속해서 침입해왔고 죽이고 잡아갔다.

공민왕은 신돈이라는 승려에게 나랏 일을 맡겼다.
승려가 임금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청렴결백하던 신돈도 권력의 맛을 보자 타락하기 시작했다.
자기와 뜻이 다른 신하는 누명씌워 귀양을 보냈고 술과 여자에 빠져들어갔다.
신돈에게 문제가 생기자 공민왕은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고 신돈승려는 반란을 하려다 죽는다.

 

현종때의 불교의 타락

현종은 22년동안 재위한 인물인데 당시의 승려들은 불사를 빙자하여 각종 비리를 저질렀는데18년에는 양주 청윤사의 스님이 쌀 360여 석으로 밀주를 만들다 처벌을 받는가 하면, 처자와 함께 사는 승려들도 많아서 이들을 징발하여 중광사에서 노동을 시키기도 하였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76

 

문종때의 불교의 타락

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흥왕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동 10년에 내린 교서를 보면 노역을 회피할 목적으로 출가해서 금리사업 및 농축업을 하는 승려들은 모두 환속하고, 사원 내에서는 계행이 청정한 자들만이 안주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이것은 이미 당시에 불교계의 곳곳에 타락의 징후가 만연되어 있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왕의 칙명은 다음과 같다.
"지금 노역을 피하는 무리들이 사문이라 칭탁하면서 고리대금을 하거나 논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워서 생계를 꾸리는 자들이 있노라. 긴 소매는 술먹고 벌거진 얼굴을 가리기에 급급하고, 물건을 사고 파는가 하면, 여염집에 출입하면서 민간인과 싸움을 벌여 피를 흘리게 하는 일도 있도다 . "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 78

 

의종때의 불교의 타락

의종은 기복적 불사를 매우 즐긴 인물이다. 그는 해마다 대규모의 반승법회, 각종 재앙을 물리 치려는 소재도량 등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거짓 출가하는 이, 또는 불문에 의탁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려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각 사찰은 다투어 대형 불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폐해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왕은 즉위 5년(1151) 되던 해 가뭄이 심해서 7일 동안 용왕도랑을 지냈고 보제사에서는 오백나한재를 개최하였다 11년 정원에 나라에 근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태사의 진언에 따라 영통 경천 등 다섯 개 절에서 항상 불사를 시행토록 명령하였다. 또 국청사 · 경천사 · 관정사 · 총지사 등에 직접 행차하여 재앙을 소멸하는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왕의 과다한 불사는 결국 재정의 궁핍을 초래 하였고, 불교 의례의 대형화를 만들어 갔다. 그에 관련된 몇 가지 사료를 뽑아 본다.
14년 보현사에 행차하여 스님들에게 골양을 베풀었는데, 그 때 30근의 은병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5향과 5약을 담아 절에 헌납하였다. 또 왕은 사찰에서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는데, 어느 때는 만취되어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18년(1174)에는 예종의 궁녀 소생인 왕자 각예의 주연에 참석하였다. 그는 법천사에 주지로 있었던 사람이다. 왕 자신이 이렇게 황읍무도한 불사를 치루었기 때문에 신하들도 또한 그런 일을 본받기도 하였다. 즉 개국초에는 엄격히 규제했던 원당을 갖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게 되었다. 내시시랑이었던 길돈중 형제가 관란사를 원당으로 삼은 일, 한정이 인제원을 원당으로 삼은 일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기암· 기화로 절을 장식하는 등 호화형으로 사찰을 꾸미고, 은밀히 자신들의 주연 장소로 삼는 일이 많았다. 따가서 사찰의 사유화 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등 폐해가 극심해가게 된 것이다.
20년(1166) 불탄일에 왕은 연등회를 베풀었다. 밤에는 앞서 말한 각예가 마련한 주연에 참석하였다. 22년 3월에는 서경 관풍전으로 행차하였는데, 하교를 내려 1교6조를 지키도록 하였다.

 

무신의 난을 가져온 불교의 타락

그것은 숭중불사 · 봉순음양 · 귀경사문 · 보호삼보 · 준상선풍 · 구휼민물의 6조이다. 즉 불사를 존숭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일종의 불교 장려 정책 이었다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만년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는 경향을 띄운다. 24년에는 영통사에 행차하여 화엄회를 개설했을 뿐 아니라, 친히 소를 지어 문신들에게 보였으며, 백관은 이를 칭송하였다. 그의 행각은 많은 백성들의 외면을 당하게 되고, 끝내 무신에 의한 정변으로 최후를 맞게 된다.
원래 무신란은 정중부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성품이 원만치 못했기 때문에 이준의 이의방 형제에 의하여 거세된다. 이의방 형제는 어린 명종을 옹립하고 권력을 장악하였 지만, 또 곧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최충헌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고려 정부는 무신에 의하여 운영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국교는 불교였기 때문에 무신정권은 불교계의 협력을 필요로 하였다.

불교계의 싸움에 의해 어지러워진 고려

대체로 선종 계통의 교단은 무신정권과 친화적이었으나 교종의 교단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 때문에 무신정권 수립 이후에 불교계와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어떤 때는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쌍방이 내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을 치룬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정세는 몽고의 병란으로 고려 조정이 와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명종 윈년(1171)에는 덕소를 왕사로 삼았다. 4년 정월 승도틀의 반란이 있자, 귀법사의 승려 백여 명은 성의 북문을 공격하며 당시 무신정권을 옹호하는 입장이던 승록 언선을 죽였다. 이의방이 일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승려들을 학살하였다. 또 중광 · 홍호 · 귀법 · 홍화사 등지의 승려 이천여 명이 동문에 모였을 때, 이의방은 그들과 싸워 벽여 명의 승려를 참살하였다.
그 때 관군도 다수 희생되었으벼, 이의방은 성문을 굳게 닫고 승려들의 출입을 금지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집단적인 항명은 무신정권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교종계는 무신정권에 대해 대립된 입장을 갖고 있었다.
5년 4월 칙명으로 사원에서의 주연과 사치를 금하였다. 이 때부터 금과 은 등으로 불상온 조성하는 사치로운 불사는 다소 진정되기 시작한다. 11년에는 사경원이 불탔다. 전왕의 유언에 따라 은자 대 장경을 사경하던 중, 이』재물을 훔치기 위 하여 방화한 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명종 말기에 이르러 최충헌· 충수의 형제는 무신정권의 대부로 등장히게 된다. 최씨 형제는 집권 초기부터불교에 대한 폐해를 시정하려는 정책을 수립한다. 당시 왕자의 신분으로 승려가 된 이들이 다수 있었는데, 그들이 왕궁에 머물면서 청사에 가담하는 일이 그르다고 하여 모두 본사로 돌려 보낸다. 그 때 강제로 퇴궐을 당한 왕자 승려들은 홍기· 흥추· 흥규 · 홍조· 홍각· 흥태 등 7인이었다 또 왕의 총애를 받던 운미는 강제로 속퇴시켰다. 27년에 최충헌은 흥왕사를 참배하려 했는데,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어 요일과 두경승 등이 암살 계획을 꾸민다고 제보하므로 행차를 멈추었다. 그 해에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신종을 옹립하였다. 이와같이 권좌가 피로 얼룩지고 끝없는 알력이 되풀이 되는 동안에토 불교계에는 별다른 변혁이 없었다. 임금들은 반승만을 되풀이할 뿐이었고, 불사의 대형화 · 사치화 경향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고려의 중기 이후에는 서서히 배불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물론 국교로서의 튼튼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본격적인 움직임은 표면에 들어나지 않는다. 다만 승려들의 타락 · 불교 의례의 폐해 등에 관해서 조심스럽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또 신종 이후에는 북방으로 몽고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사회 분위기는 피해의식과 혼란의식이 가중되어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 84-87
고려는 고종 이후부터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국가 재정의 손실을 가져온 불사

충선왕은 불심이 남달랐던 군왕이었는데 그는 상왕이 된 후
연경궁에서 이천 명의 스님들에게 반승을 베풀고 연등
이천개에 불을 밝혀 닷새 동안 연등제를 베풀었다.
그 때 불전에 은병 1백개를 시주하고 선종의 충탄 교종의
효정을 모셔서 설법을 들었다. 왕은 두 스님에게 백금
한 근씩을 각각 하사하고 그 법회에 동참한 이천여 명의
스님들에게 백금 20근을 분배해 주었다. 왕은 또 108만의
연등에 점화하리라는 발원을 하였다. 그래서 하루 이천 명의
중들에게 닷새동안 공양재를 베풀어 1만의 중들을 채우고
또 1만 등을 점화하였다. 이것을 만승회라고 불렀는데 매달 그 만승회를 반복 시행하였다.
그 재정의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른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충선왕은 의종 이래 기복적 불사를 다시 일으킨 대표적 임금이라 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p 102

 

배불론의 발전 과정

고려 후기의 배불론은 일정한 단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즉, 고려 초기에는 불교 행사의 과도한 내용을 비판하는 면이 두드러지고 중기에 이르면 불교와 유교의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의 세속의 도로는 불교가 적합치 않다는 면 등이 강조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면 불교의 교리 자체가 허무적멸이라는 교리 비판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불론의 배경에는 과다한 불사가 주인으로 꼽히겠지만 승려들의 타락 등 현실사도 무시 못할 배불의 명분이 된다.


선근 스님의 간통 사건
공민왕 4년에는 선근이라는 스님이 왕의 총애만을 믿고 매력적인 선비의 처와 간통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사헌부에서 그의 죄를 논증하자 방자하게 군 기록이 고려사(공민왕조)에 나온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105

14년 노국 공주가 죽자 공민완은 비탄에 잠겨 정사를 신돈이라는 노비출신의 파계승에게 맡겼다.
이 때부터 고려의 국정은 겉잡을 수 없이 피폐에 빠지게 되었으며 불교 또한 사양의 길을 면치 못하였다.


당시 불교를 비판하는 정몽주의 상소문
"유교의 가르침은 모두 하루하루의 평상 일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일과 남녀의 구분이 없이 일상사가 바르게 되어야 함을 역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홀로 암혈에 앉아 초식으로 연명하며 공적의 이치를 깨달을 것을 강조하니 어찌 평상의 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고려사)


고려의 멸망
고려 최후의 왕 공양왕의 때에 성균관의 유학자들은 격렬한 배불의 상소문을 올렸다.
성균관 대사성 김자수, 정당문학 정도전, 이조판서 정총 등은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주로 당나라 한유의 배불론을 인용한 것으로서, 불교가 인륜을 망각한 無父無君의 교라는 것이다.
출가를 하면 부모를 여의어야 하고, 국가에 충성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륜의 도를 어기고 무위적멸을 일삼는 불교는 백해 무익이라는 주장이다.
덧붙여서 사탑의 건립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게 되며 그 폐해가 막심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4년에는 일본 조정이 대장경을 헌납하도로고 요청하였다. 그해 7월 드디어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왕위를 선양하였다. 이로서 고려 5백년은 막을 내리고 조선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조선은 국시로 억불숭유를 내세움으로써 전대미문의 불교 탄압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 내용은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을 그대로 인용한 것

교과서에서 말하는 잘못된 고려의 멸망 원인

나라 안
㉠ 공민왕의 개혁 실패
고려 말기에 몽고(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불교의 타락으로 국가가 힘이 없어서 간섭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빠져 있음)
㉡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
옛날 귀족들과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한 신진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정치가 어지러워졌다.(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어렵고 대립 가운대 있으므로 주 원인이 될 수 없음)
나라 밖
㉠ 중국 땅에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새로 명나라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원이던지 명이던지 나라가 약하면 침략을 받고 나라가 강하면 침략하는 법)
㉡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였다.(불교 타락으로 나라가 대항할 힘조차 없었음)

 

절대 잊지말아야할 종교인별 범죄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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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통계청에서 조회하시면 나옵니다.
 
1990 년 부터 2010 년 까지  11 년간의 대한민국 범죄자 수 와 그에 따른 종교
 
총 범죄 수 : 1,986,319
종교별 분류
종교 무 : 1,547,306
불교     :    158,902
기독교  :    131,686
천주교  :     32,619
원불교  :       2,220
천도교  :       1,320
기타종교 : 112,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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