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십대 후반 여자입니다.
아이디는 아는 언니걸 빌려 사용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고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한번 올려보라고도 하더라고요. 제 아이디를 쓰지 않은 건 혹시라도 누군가 알아볼까봐 걱정이 들어 못 쓰겠더라고요. 회사에서도 판을 보는 동료들이 있거든요. 괜한 노파심이 드네요..
저와 남자친구는 만난지 2년이 조금 넘었고, 두살 연상이에요. 같은 회사 다른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데 규모가 있는 회사라서 층도 다르고 업무영역도 달라서 마주칠 일이 적어요. 사귀게 된 계기는 남자친구가 저한테 호감을 갖게 되어 사귀게 됐다는 것만해도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 믿습니다. 사내커플이면 둘 다 알려져봤자 좋을 게 없는 걸 알기 때문에 조용히 만나고 있었습니다.
남자친구가 일기를 쓴다는 걸 알게 된 건 여행을 가서였습니다. 하루를 정리하기 위해 잠들기 전 일기를 쓴대요. 오랜 습관이기 때문에 여행다닐 때도 웬만하면 가지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일기를 쓰는 게 놀랄 일은 아니죠. 그런데 남자친구는 일기에 모든 걸 적는게 문제였습니다. 그야말로 적나라하게요. 일기장이 내보여지게 되면 큰일나겠구나 싶을 정도로 낱낱이 적더라고요.
올해 여름에 같이 4박 5일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사귄 첫 해에는 일정이 맞지 않았고 그동안은 당일 여행이나 길어도 1박 정도의 여행밖에 못 갔었어요. 남자친구는 잠들기 전에 일기를 썼고 가방에 다시 넣어놨어요. 그래서 저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데 있지 않았으니까요.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일기를 쓸 때는 저도 잠자코 있었습니다.
휴가 내내 즐겁게 지냈습니다. 마지막 날 숙소에서 둘이 맛집에서 사온 음식하고 간식 다 펼쳐놓고 술 한잔 했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남자친구보다 술을 조금 더 잘 마시는 게 운이 좋은 거란 생각도 드네요. 더위도 잘 타는 사람이라 여행 내내 땀도 엄청 흘렸는데 술이 들어가니까 먼저 곯아 떨어지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타지에서는 피곤해도 잠이 잘 안들어서 알딸딸하긴 해도 눕고 싶진 않더라고요. 아쉽기도 했고요.
남자친구가 잠든 모습 보다가 그야말로 불현듯, 일기장 생각이 나더라구요. 술을 마셔서 대담해졌던 것도 있었어요. 또 내가 모르는 모습을 알고 싶은 호기심도 커졌었고, 아무튼 나쁜 짓인 걸 알지만 살짝만 훔쳐보자는 심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차라리 보지 말걸 하고 후회하는 부분이에요.
우선은 휴가 중에 있었던 일들을 세세하게 적었더라고요. 다녀왔던 곳, 먹은 음식부터 감상도 적어놨고 제가 했던 말들, 그때 자기가 느꼈던 기분 등등. 기억도 안나는 것까지 다 적었더군요. 그때까진 꼼꼼한 사람의 더 세세한 면을 알게 됐다는 단순한 느낌뿐이었습니다.
대충 훑으면서 넘겨 보는데 갑자기 시선을 확 잡아 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저랑 잠자리할 때 이야기를 적어놨더라고요...제가 했던 말, 표정, 입고 있던 옷 같은 것도 적혀 있고 감촉, 기분 변화도 적혀있었습니다. 부끄럽긴 했어요. 뭘 이런 걸 적나 싶었죠.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하고 나서 감상평같은 걸 썼더라고요. 시작은 좋았는데 끝은 그렇지 못했다느니 조절을 잘 하고 있었는데 제가 먼저 흥분해버리는 바람에 자기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 말도 있었어요.
저랑 데이트를 하면서 잠자리를 가진 날은 어김없이 그에 관한 내용을 써놓은 것 같았어요. 저도 그걸 일일히 대조해가면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읽을수록 수치심이 커졌습니다.
이런 걸 일기장에 적는 사람이 있나 싶었어요. 꼼꼼하다고 해도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오랫동안 해오던 운동을 올해 초에 관뒀는데, 그것을 두고 '00이가 운동을 관둬서인지 삽입할 때 느낌이 전과 같지 않다' 이렇게 써놨던 대목이었어요. 전체적으로 탄력도 떨어진 것 같고 아쉽다면서요. 정말 머리가 핑글핑글 돌더라고요. 운동 다시 시작안할거냐고 물었던 게 이것 때문인가 싶기도 하네요..
또 서로 불이 붙어 관계를 가질 뻔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콘돔이 준비가 안 된 상태라서 제가 관계를 맺기 직전에 거절했어요. 사실 저도 한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이 시작되면 계속 그런 방심한 상태가 유지될 것 같아서 거절했어요. 그거에 관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저를 때려서라도 강제로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서로 좋아서 하는 건 데 뭘 그렇게 따지고 재는지 짜증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새벽 네시까지 잠도 안자고 웬만큼 다 읽었습니다. 가족들에 관한 내용도 있었는데 아버님은 저를 탐탁치 않아하셨나봐요. 기왕이면 공무원을 만나길 바라셨나보더군요. 몰랐던 부분이었습니다. 어디 부서 신입사원이 예뻐서 구경다녀왔는데 정말 예쁘더라, 엉덩이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도 써놨더군요. 침대에선 어떨지 한번 해보고 싶다, 는 내용도 있었는데 생략하고 싶네요 정말.
이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일기장을 버려버릴까, 당장 깨워서 따질까 하다가 당시에는 충격도 크고 어떻게 해야할지 멍해져서 잠자코 있었습니다. 대신 저랑 잠자리 했던 내용, 뭔가 성적인 내용이 적힌 일기는 보이는대로 찢어서 제가 챙겼습니다. 전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보이는 대로 일단 챙겼어요.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했어요. 남자친구 알았을 겁니다. 일기장이 뜯어져있는거 모를 사람이 아니죠. 그런데 아무 말 안하더라고요. 아마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 건지 짐작하고 있겠죠.
헤어져야 하나, 따져 물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조용히 대화를 했습니다. 자기로서는 나쁜 마음을 가진 게 아니라서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한다더군요. 자신은 그렇게 적는 걸로 어려서부터 스트레스를 풀었다면서, 오랜 습관이지 악의를 품은 건 아니라더군요. 자기도 제가 일기장을 훔쳐본 게 너무 기분이 나쁘지만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면서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걸 절제하고 인내할 줄 알면 되는 거라면서요. 또 일기장은 자신이 잘 보관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어요. 맞는 말입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고 나쁜 생각을 품어도 실행하지 않고 인내하고 절제하니까 성인인거겠죠. 저도 싫은 사람 속으로 욕하고 심하면 죽어버렸으면 하고 앙심을 품을 때도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저는 그러고 마는 것이고 남자친구는 적는 거겠죠...
훔쳐 읽은 제가 먼저 잘못한 거 압니다. 그래서 감당을 해야하는 몫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설득하려다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일단은 시간을 갖자고하더군요.
저와 만나는 동안 썼던 일기장을 갖다달라고 해서 검열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속마음을 알게 되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제가 너무 깊숙한 영역을 주제 넘게 침범했나 싶어 자책감도 들어요. 이래저래 찜찜함이 너무 크고 혼란스럽습니다. 정말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일인 걸까요? 사람이니까 위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음흉해질 수 있는 거 이해해야 하나요?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적어놓는 걸 이해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요...?
남자친구는 다시 잘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저는 마음이 회복이 되질 않습니다. 애정문제가 아니라 제가 받은 충격에 대한 회복을 의미해요. 남자친구와는 일기장에 적힐까봐 두려워서 마음대로 하지도 못할텐데, 다시 잘해보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저는 일기장에 남아있을 저에 대한 기록이 너무 찝찝합니다. 차라리 제가 보는 앞에서 불태워주었으면 좋겠어요. 사진이나 영상도 아닌데 뭘 그러냐, 유난스럽게 볼 사람도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더 외설스럽게 느껴집니다. 가끔 잠이 안올 때는 혹시 영상도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더 큰 의심에 빠져요. 성적 대상이 될 수 있어도 성적 도구가 될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저를 괴롭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유난스러운가요?
남자친구가 일기에 자기 생각을 고스란히 적은 건 죄가 아니죠. 오히려 훔쳐 본 제가 죄인이겠죠. 그래서 남자친구한테도 더이상의 비난이나 원망을 하진 않습니다.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이 너무 어지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현재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조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