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라 그런지 싱숭생숭하네..
나의 학창시절은 가난했다. Imf 이후 나의 부모님은 이리 저리 치이셨다. 아버지의 과장이라는 명함은 어느새 한 사업가의 명함으로, 곱던 어머니의 손은 칼자국에 거칠어만 갔다. 반창고 값을 아끼기 위해 상처에 테이프를 감으시고 버스비 천원을 아끼기 위해 1시간을 매일 걸어다니셨다.
그 이전엔 나는 우리 동네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산 아이였다. 당시 할머니댁에서 생활하던 터라 그리 부유하지 않았던 동네서 친구들 부모님을 적잖이 속썩게 했었을테다. 새로운 게임기가 나오면 구매해 동네 친구들과 즐기곤 했다. 무선 RC카는 한 달 정도 쓰고 창고에 두는 그런 장난감이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돈이란 공기와도 같이 흔하고 좋은 것이었으리라.
억장이 무너지던 날을 기억한다. 여느날 부모님이 잔뜩 취해서 돌아오시더니, 집안 물건들을 마구 던지신다. 3살이던 동생은 마냥 무서워 제자리서 울고만 있었고 나는 할머니 품에서 그 모습들을 모두 지켜봤다. 나에겐 이러한 광경이 너무나도 생소했기에 그저 새로운 종류의 놀이인줄만 알았다. 이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어머니 앞에서 흐트러진 화투패를 가지고 놀자고 조르던 내 모습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이내 아버지는 나를 붙잡아 끌어 안으셨다. 평소에 안기면 맡을 수 있었던 아버지만의 담배냄새, 그리고 몸을 감싸는 시원한 느낌. 그것을 마지막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매년 이사를 다니며 주변을 전전했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는 잦은 부부갈등과 연결되어 나를 괴롭히곤 했다. 아버지는 밤에 나가시느라 낮에는 주무셨는데, 내가 학교를 마치고 올 때쯤에는 선반 위에 항상 2천원이 놓여있었다. 이 2천원을 줄 테니 동생과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나는 그게 마냥 좋았다. 피시방 의자 뒷켠에 동생을 앉혀두고 2시간 게임을 하고 있으면, 아버지의 눈치도 동생이 울 걱정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그 2시간이야 말로 24시간 중 나에게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며 현재까지 살고 있는 집에 정착했다. 10평 남짓한 원룸에 주변은 사창가, 불법도박장이 빼곡히 들어서있었다. 밤이면 집 앞에서 밴 한대에 한껏 노출한 젊은 여성들이 오르내렸고 도박장의 룰렛소리는 문을 닫아도 비집고 들어왔다. 취객들의 노여움이 섞인 눈빛과 고성방가는 밝은 밤길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집을 나가셨다. 전업 주부의 행복한 삶에서 분식집을 전전하는 삶으로의 퇴고는 가뜩이나 성욕이 왕성할 시기의 여성을 이끌기에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이리저리 이유를 대가며 나는 어머니를 이해하려했다. 이처럼 나름 나만의 합당한 이유를 들어가며 현실을 설명하다보니, 신기하게도 고통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간신히 버텼다.
그 후로 아버지와 동생 셋이서 살았다. 한때 유망성을 인정받으며 여러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아오던 아버지는, 끝내 대리운전 기사로 전락했다. 모르는 이들에게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취객을 상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10년 전의 당신은 알고 있었을까.
이에 나는 여느 드라마에서 그래왔듯 일탈을 일삼았다. 술, 담배며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던 컴퓨터 게임은 그저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어린 증오였다. 현실이 더욱 피폐해지니 게임에서 얻은 일탈감은 더욱 달콤했다. 나는 이 달콤함에 눈이 멀어 더욱 더 많은, 그리고 강력한 일탈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버스카드를 충전해야한다고 5천원을 받으면 침이 고였다. 비록 이를 위해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은 고되었지만 이내 피시방에서 해소했다. 그렇게 3년이 흐르니 나는 어느새 고등학교 2학년을 바라보고 있었고 내 눈에 비친 것은 대학 진학을 걱정하기 시작한 한 고등학생과 더 이상 피폐해질 수 없는 한 가장, 그리고 나보다 5살 어린 나였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깊은 회한, 시간의 비가역성, 아버지. 눈 앞에 일렁이는 파도. 밤이 깊어갔다.
살면서 한번이라도 죽을 각오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 성취하지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가 진심으로 든다면 이내 모든 것이 바뀐다. 그렇게 친구 관계를 모두 끊고, 참고서적을 닳도록 외웠다. 친구 관계를 끊으니 몇일동안은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고되었었지만 이내 또다른 관계가 형성된다. 수학 문제집은 8번을 반복해서 풀었더니 문제를 읽다보면 답지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히 떠올랐고 영단어는 닳아진 흑연 위에 덧써가며 외우니 그 멍청한 머리도 조금씩 수용을 하더라.
10시에 마치고 집에 와서 공부를 할때면 귀마개로 집안을 맴도는 룰렛 소리를 막으며 3시에 잠들었다. 졸음이란 놈은 스스로 머리채를 당기고 뺨을 힘껏 몇 대 때리니 그 살기가 무서워 달아났다. 그렇게 스스로 허락한 3시가 되면 이내 기절하듯 쓰러졌다. 그러다 6시 반에 일어나 다시금 아침을 준비하고 버스에서 스스로 만든 영단어장을 꺼냈다. 보통 커피는 각성제 역할을 하는데 이정도되면 자기 전에 먹어야 아침에 덜 피곤하다. 어차피 기절하는 것은 같으니.
이렇게 2년을 보냈다. 반배치고사에서 3과목 한자릿수 점수를 받던 놈은 어느새 전국 단위 1퍼센트 이내는 물론 지역에서 과학 한분야로 1등도 거머쥐었다. 고3때 간간히 만나던 친구와는 어느새 애인으로 발전하였고, 수능을 마친 후 원하던 대학에 잘 진학했다.
이렇게 살아왔던 나도 이제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간의 흐름을 몸소 느낀다. 다만 지금의 삶에 너무 안위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경계해야한다. 아버지는 어금니가 다 빠져서 음식을 못드시고 여전히 그 원룸에서 동생과 생활하고 있는데, 나는 어느새 미국에서 사온 시계며 브랜드 바지며 그래 아버지가 사주신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고나 있다. 이에 모자라 생활비를 다 썼으니 조금만 보내줄 수 있냐는 부탁을 주저하고 있는 내 모습이 정말 한심하기 그지 없다. 다만 지금처럼 새벽에 자지 않고 내 이야기들을 정리하다보니 많은 것들을 반성하게 되고, 안일하게 변화한 내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진다. 내일은 말해보자. 임플란트는 얼마씩 필요하냐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갚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