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영원한 형벌
오늘날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를 부정하는 두 가지 형태의 주장들이 있는데, 하나는 보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전멸주의이다. 보편주의자들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은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전멸주의의 교리는 인간은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으나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은 불멸성을 탈취당하게 되고 완전히 전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건적 불멸성”이라고 알려진 것은 사람은 죽도록 창조되었으며 신자들은 은혜의 선물로서 불멸성을 받게 되고 사후에 축복상태 속에서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형태의 완전 소멸론은 모두 악한 자의 소멸을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영벌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16세기 중엽 의 소시니안파(the Socinians)들도 불신자들은 결국 소멸되어 버릴 것이라고 가르쳤다. 제칠일 안식교와 여호와 증인들은 소멸이란 악한 자, 사단, 귀신들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우리는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지옥에 대한 언급을 찾아낼 수 있다. 지옥의 형벌들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여러 다양한 표상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자적으로 이러한 표상들을 취한다면, 이러한 표상들은 서로 모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어떻게 지옥이 동시에 암흑도 되고 불도 될 수 있단 말인가? 표상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상징들보다 더 좋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자 모두가 유다가 당한 고통들을 겪어야만 하지는 않는다. 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들이 받아야 할 만큼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끝으로 지옥의 장소성에 관해 말해 본다면, 중세기에는 일반적으료 생각하기를 하늘은 지구 위의 저 공중 어느 한 곳에 있을 것이며 지옥은 그 아래 어느 곳, 아마도 지구의 깊은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현대적 천문학을 알고 있는 20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식의 사고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재 우주체계에는 위도 아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히 2:2);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만일 저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여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제20장 새로운 땅
새 땅이란 현재의 땅과는 전혀 다른 땅인가 아니면 현재의 땅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사야 65:17과 요한계시록 21:3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전우주를 지칭하는 성경적 표현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우주는 완전히 소멸되고 현재의 우주와는 전혀 별개의 새로운 우주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우주는 현재의 우주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되 오직 새롭게 되고 정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루터교 신학자들은 전자를 택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하여 마태복음 24:29, 베드로후서 3:32에 호소하고 있다. 분명히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들이 현재의 땅이 파괴될 때 발생할 것인데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은 죄와 불완전으로 오염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음에 열거할 4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완전히 소멸한다는 입장보다 우주가 새롭게 된다는 의견을 받아 들인다. 첫째, 베드로후서 3:33과 요한계시록 21:1을 살펴볼 때, 새 우주의 참신 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neos가 아니라 kainos임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neos는 시간과 기원에 있어서 전혀 새 것이라는 뜻인데 반해 kainos의 뜻은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ouranon kainon kai gan kainan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이란 의미는 현재의 하늘과 땅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우주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와 동질이되 영화롭게 갱신된 우주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 소멸이론보다도 갱신이론을 주장하는 두번째 이유는 로마서 8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에 근거를 둔다. 창조의 세계가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는 창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20-21절). 바울의 요점은 장차 종말에 현재의 창조세계가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세번째 이유는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양자간에는 엄연히 연속성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인종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러한 유추적 방법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혀 다른 종류가 아니라 놀랍게도 새롭게 변한 현재의 땅이다.
갱신이론을 받아들이는 네번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주를 완전 소멸시키셔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단이 승리를 쟁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단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의 창조세계는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으며 하나님도 병든 우주를 어떻게 다루실 수 없어서 결국 완전히 소멸하시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단은 이러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사단의 결정적 패배의 클라이막스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그토록 부패시키려고 힘썼던 바로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사단의 악한 음모 의 결과들을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실 바로 그때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우리가 들어갈 세상은 다른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이 하늘, 이 땅이다. 그러나 새롭게 된 세상이다. 구속의 장면이 펼쳐질 장소는 바로 이 삼림들, 이 들판들, 이 도시들, 저 거리들, 이 사람들 속에서이다. 비록 현재는 전쟁터와 같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완성의 때를 향해 소리지르며 다투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나 그때에는 이상의 모든 장소와 배경들은 승리의 들판이요 추수의 밭들이며 그 밭들에 눈물로 뿌려졌던 씨앗들이 영원한 곡식단들이 되어 창고에 들여질 것이다.”(에드워드 투르네이)
새 땅에 관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이사야 65:37-25와 66:22-23, 베드로후서 3:33; 요한계시록 21:3-4 등이다. 베드로의 관점을 보면, 비록 현재의 땅이 다 “타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될 새 하늘을 창조하실 터이니 우리는 이를 소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 하늘은 악과 불의는 모두 제거되고 의로움만이 존재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 중에서 새 땅에 관해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21:1-4일 것이다. kainos(새로운)라는 단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움”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상에서 요한이 본 세계는 지금의 것과는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우주가 영화롭고 새롭게 된 상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절에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땅 위에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곳이 바로 하늘이기에, 장차 올 영원한 삶의 영역에는 현재처럼 하늘과 땅이 나누어진 상태가 아니며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마치 새 땅에서 사는 것처럼 새 하늘에서도 계속해서 살 것이니 새 땅은 새 하늘에 대한 포괄적 대명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은 은혜 언약의 골자를 이루는 핵심 약속이라 할 수 있다(참조. 창 17:7; 출 19:5-6; 렘 31:33; 겔 34:30; 고후 6:16; 히 8:30; 벧전 2:9-10).
그러므로 새 땅에 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과 용기를,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이 세상 속에서 낙관적으로 살게끔 한다. 비록 악이 이 세상에 횡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무한한 안위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충만하게 노출시키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노력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값진 것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현재의 봉사를 통해서 새 땅의 건설을 위한 자재들이 이미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들이 번역되기도 하며 많은 종족과 나라들이 복음화되기도 하며 신자들이 새롭게 되고 문화가 변혁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위해 현재 이곳에서 행해진 일들이 장차 영원세계에서 그 충만한 진가의 빛을 발할 것이다.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역사가 끝날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중앙에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양”이 있다.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