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우리 오빠에게만이 아니라 여동생이 있는 오빠들에게, 누나가 있는 남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여기 이렇게 글을 남겨.
오빠는 내가 젠더 이슈를 꺼낼 때마다 말해, 너는 너무 예민하게 군다고. 피해망상이라고. sns에 찌들어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 강남역 화장실 살인 사건을 아느냐 물었을 때도 그렇게 말했지. 문제가 있는 개인이 개인을 살해한 사건은 말 그대로 개인의 슬픔일 뿐이라고. 살아남았다 해시태그에 대해서도 말했어. 오빠는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말들을 모두 믿지 말라고 말했고. 난 무서워서 말하지 못했어. 나 오늘 버스에서 죽을 뻔 했다고.
자리가 텅텅 비어있었으니까 노약자 석에 앉았고, 오늘 하루 너무 피곤해서 머리를 기댄 채로 졸았어. 집 앞 정류장 두 정거장 전에 깼는데, 일어나려니까 머릿가죽이 너무 아픈 거야. 난 머리카락이 뭐에 걸린 줄 알았어. 돌아보니까 할아버지인지 아저씨인지 어중간한 나잇대의 남자가 내 머리카락을 버스 좌석 손잡이 위로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손잡이랑 같이 쥐고 있었어. 실수일 거라고? 일어나려다 비명을 질렀는데 빤히 쳐다보면서 놓지 않는 건 실수가 아닐 거야, 그렇지? 놓아달라고 소리 질러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어. 소름이 끼치고 무서워서 들고 있던 핸드폰도 지갑도 놓치고 달달 떠는데 뒷좌석 쪽에 앉아있던 고등학생 둘이 일어나면서 할아버지 뭐하시냐고 소리지르니까 그제서야 내 머리카락 놓고 허둥지둥 내리더라. 버스에 타고있던 남고생 둘하고, 아주머니 한 분하고, 버스 기사 아저씨가 나만 쳐다보고 있었어. 너무 무서워서 핸드폰이고 지갑이고 줍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 고등학생 둘이 나 내릴 때까지 부축해주더라.
내가 이 말을 나라고 하지 않고 해시태그에서 봤다며 오빠한테 말했다면 비웃으면서 헛소리 믿지 말라고 했겠지? 난 똑똑히 들었어 그 할아버지 일어나면서 나보고 신발년이라고 했어. 만약에 버스 안이 아니고 길거리였다면, 버스에 그 남고생 둘이 타지 않았다면, 기사 아저씨도 매정한 분이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그건 본 적 있어? 방송에서 몰래카메라로 길거리에서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서 내 마누라라고, 여친이라고, 딸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거? 반응이 어땠게? 만약 내가 길거리에서 갑자기 머리채를 잡혔다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딸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꺼지라고 위협하며 나를 끌고 가기라도 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난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 다시는 그 버스 못 탈 것 같아. 나는 다시는 버스에서 졸지 못할 것 같아.
오빠는 만석 버스의 노약자 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아도 머리채를 잡히지 않아. 신발년 소리를 듣지 않아. 집에 와서 생각했어. 내가 남자였다면 굳이 잡기도 힘든 짧은 머리를 그렇게 움켜쥐고 욕했을까? 그 사람에게 나는 대항하지 못하는, 쉬운 화풀이 대상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오빠는 젠더 이슈를 젠더 이슈로 받아들이지 않아. 내가 여성이라 겪는 사소한 것들을, 공포를 이해하지 못해. 왜냐하면 오빠는 이런 일을 당할 가능성이 없거든. 오빠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밤에 뒤에서 나는 발소리에 겁 먹고 전화를 거는 시늉을 한 적이 없고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화장실에서 나사를 확인해 본 적이 없고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 누군가 내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상상해 본 적이 두려워해 본 적이 없어.
저번에 수원역에서 여대생이 피살당했을 때, 오빠는 저런 일 당하지 않으려면 너도 술처먹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어. 나는 술처먹고 돌아다니지 않았어.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오빠가 내게 그 말을 했을 때 내가 그랬지, 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내가 술을 먹다 취해 길에서 잠든다고 해도 그 어느 누구도 내 몸에 손을 대어서도 칼을 대어서도 안 돼.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랬던 거야. 오빠는 내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자지 않으면, 밤 늦게 돌아다니지 않으면, 하이힐을 신고 이어폰을 꽂은 채 다니지 않으면 그런 험한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단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한산한 버스를 탔을 뿐이었어. 오빠와는 달리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협 당하거나 심지어는 살해당할 수도 있는 사람인 거야.
내가 남자가 무서워서 결혼을 못 하겠다, 남자를 사귀질 못 하겠다 하면 오빠는 일반화하지 말라며 나를 몰아붙여. 오빠는 '내가 가해자라면?'하고 생각하지 않거든. 하지만 나는 여성 살해가 발생할 때마다 데이트 폭력이 발생할 때마다 '내가 피해자라면.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5월 18일 새벽 1시에, 내가 거기 갔다면.' 그 생각을 해. 오빠는 어쩌면 영원히 나를 이해하지 못해.
아빠가 그랬어. 오빠에게, 만약 내가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가 나를 때린다면, 법이고 뭐고 죽여버려야한다고. 죽도록 패야한다고. 그 이전에 내가 나를 때릴 남자를 만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줄 수는 없는 거야?
내가 인터넷 기사 댓글들이 무섭다고 말했을 때 오빠는 말했어 그건 극소수의 또라이들일 뿐이라고. 그래 극소수의 또라이들일 뿐이야. 만약 그게 성인 남성들 50명 중 한 명이라고 해보자. 내가 출근 시간 지하철을 타면 그 칸 안에 성인 남성 50명 남짓이 타겠지. 나는 그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이 중 어느 한 명이 한 순간 칼을 꺼내 나를 찌를지는 아무도 몰라. 내 옆에 서 있을 아주머니를 찌를 수도 반대편에 앉은 여고생을 찌를 수도 있어. 비약이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맞아 나는 겁쟁이야.
그런데 오빠, 오빠 친구들 중에 단 한 명도 직장 동료들 중에 단 한 명도 그런 댓글을 남기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 내가 오빠에게 바라는 건 그거 뿐이야. 나는 오빠가 나를 지켜주길 바라지 않아. 오빠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오빠가 나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안 해. 하지만 오빠는 한 사람을 위축시킬 수 있어. 그런 말을 하고 그런 댓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거 잘못됐다, 왜 그런 말을 하냐 따질 수 있어. 오빠가 그러면 오빠의 친구도 그 사람에게 그러게, 너 왜 그러냐 할 수 있어.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게 잘못됐다고 눈초리 받기를 바래. 위축되기를 바래. 그게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그만두지는 않더라도 남들 앞에서 입 밖에 내면 몰매맞는구나, 하고 입을 닫게 만들어 줄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이 아 저러면 몰매맞는구나 하지 말아야지 할 수 있어.
내가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여자가 감히 남자한테 대들면 안 된대. 내가 그런 말을 하면, 비웃음과 함께 칼 맞을 뿐이야. 그 사람은 나를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아. 대등한 혹은 우위에 있는 사람이 제지해줘야 해.
난 오빠만큼 남을 잘 설득하지도 못하고 말을 논리적으로 할 줄도 몰라. 그래서 이렇게 케케묵은 일들까지 마음 속에 삭히고 삭히다가 주절주절거릴 뿐이야. 난 알아 이것조차 오빠에게 비웃음 당할까봐, 오빠가 읽지도 않고 버릴까봐 보내지 못할 거라는 거.
하지만 나 아직도 기억해. 어렸을 때, 동화책에 손가락을 베였을 때, 정작 아픈 건 나였는데 서럽게 운 건 오빠였어. 오빠 잘못도 아닌데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엉엉 울었어. 오빠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나뿐인 여동생이잖아. 오빠 여동생이 하루하루 사는 게 무섭지 않은 나라가 되게 해 줘. 내가 바라는 건 오빠가 생각하는 여성 상위 시대가 아니야. 그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