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많아졌다. 이젠 게임을 중간에 끄지 않아도 된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당구를 쳐도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다.
여유로워진 만큼 통장 잔고도 넉넉해졌다.
첫사랑이었고, 첫 애인이었다. 한여름에도 찰싹 붙어 다닐 만큼 좋았다.
좋은 만큼 오래 만났다.
그러나 3년에 가까운 만남이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없던 일이 될 수가 있는지.
아마도 시간이 문제였다. 계산해 보면 만나지 않은 시간이 만났던 시간보다 더 길 것이다.
3년의 시간 중에서.
연인 사이에 시간을 갖자는 말은 절대 관계를 다시 좋게 바꾸어보려는 노력이 아니다.
당장 서로의 얼굴을 보면 욕지거리가 나오니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거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자신도 없어 그저 감정이 식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다 서로가 없는 시간에 익숙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다.
차이는 괴로움도 차는 죄책감도 없다. 그러기로 했던 것처럼 등을 돌린다.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 혼자가 되고 나서 간만에 친한 형을 만났다.
어디서 들었는지, 위안이랍시고 하는 말이 남자는 와인이라고 한다.
와인이 무르익어야 좋은 안주가 곁들여지는 법이란다.
학생 때는 연애 한 번 못해 봤는데, 정작 나이를 먹으니 더 예쁘고 어린 여자가
우습게 넘어오더라. 너도 그런 여자는 잊고 네 일 열심히 하면 훨씬 좋은 여자 만난다.
나이는 상관없다. 나이먹으면 유리한 건 남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형이 이런 말을 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안본 새 허언증이 도졌나.
와인도 와인 나름이지. 아무 포도나 가져다 푹푹 썩힌다고 고급 라벨이 붙을 리 만무하다.
형은 자신의 등짝에 붙은, 고양이가 그려진 팔천 원짜리 라벨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내 뒤에 붙은 라벨은 얼마일지 생각해 본다. 애초에 와인이기는 할까.
신호등 표시가 붙은 국산맥주라도 되면 다행인데.
한 게임 더 치자는 형을 뒤로 하고 나왔다. 막상 끝도 없이 치려니 별로 재미가 없다.
사실, 형이 너무 잘 친다.
다음 날은 친구를 만나 잔뜩 마시고 놀기로 했다.
홍합탕 하나 시키니 소주가 술술 넘어간다. 몇 병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취기가 금방 올라온다.
술을 깨려 노래방에 들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기억나는 이별 노래는 죄다 불렀다.
부르다 보면 이게 노래인지, 아니면 비명인지 알 수가 없다. 얼마나 불렀는지 목이 나갔다.
너무 늦었지 싶어 얼른 집에 갔다. 침대에 파묻혀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열두 시다.
왜 이렇게 빨리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밤을 새서 놀 기세였는데.
눈 한번 깜빡이고 나니 날이 밝다. 일곱 시 십분. 버릇처럼 핸드폰을 열어 번호를 찾는다.
왜 번호가 없지 하고 뒤적거리다 정말 미쳤나 싶어 핸드폰을 던져 버렸다.
이제 그녀는 내가 전화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일어날 것이다.
술을 잔뜩 먹었는데도 너무 일찍 일어났다. 주말이니 마음 놓고 게임이라도 즐기면 된다.
스팀에서 괜찮은 게임을 하나 골라 하루 안에 끝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집중이 안 된다. 뭔가 왔을까 핸드폰을 열어보기를 열 몇 번, 결국 1장도 채 끝내지 못하고
꺼 버렸다. 그렇게나 원했던 것들이 막상 손 안에 주어지자 영 맘에 차지 않았다.
무엇 하나 즐겁지 않다.
아마도 나는, 그녀에게 맞추고 살았던 시간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별이 끝나지 않는다. 어젯밤에 하림 노래를 불러서 그런지 아직도 멜로디를 머금고 있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누굴 만난다 해도..
이별하는 건 사랑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그만큼 더 아플 것도 같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