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흐림, 공기는 맑음.
여느때와 다름없는 날들이었다. 미묘했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음을 때렸다. 달리는 자동차들, 그리고 하나둘씩 몸을 드러낸 우산들이 눈 앞에서 울렁였다. 똑같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세상 속에 몸을 묻었다. 짙은 하늘, 그 아래로 자욱하게 들어 찬 습기가 눅눅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완성하지 못한 나의 무언가를 볼수록 나오는 한숨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다. 어차피 완성하지 못한 거 아무렇게나 해 버려. 실타래처럼 꼬여갔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다. 가능성 없는 내 미래를 재어 보았다. 음, 이대로만 가면 죽지는 않겠네. 죽지 않으면, 그 다음은? 맴돌다, 서성이다, 하염없이 눈을 감을 뿐이다. 생각이 많을수록 빨리 죽는다던데 이러다가 죽어버리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허전함에 허망함이 가득했다. 지금이, 몇시지?
답답한 속을 풀어보려 우산을 집어들고 세상을 메운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금은 괜찮아질까. 기대했던 마음을 산산조각 내듯 여전히 나는 형편없었다. 나를 맞이하는 것은 따뜻한 어떤 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그리고 눅눅한, 무거운, 어떤 것이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에 김이 서렸다. 그것은 가벼워 금방 날아가 버렸다. 주저앉아 땅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응시했다. 더러운 부유물. 가볍지도 않아. 그저 가라앉아서 '더럽다' 는 느낌만을 주는 그 부유물들이 자리에 고여 나를 마주했다. 너는, 가벼운가, 아니면, 무거운가. 나에게 묻는 그 목소리가 선명했다. 나는, 가벼운가, 아니면, 무거운가. 스스로 되물었다.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저 왔다가 가 버리는 소나기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나의 모습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꿈틀대며 생겨나는 형상은 초라했다. 그래, 이게 내가 나를 보는 모습.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어딜까.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구렁텅이를 결국에는 외면했다. 그래, 난 늘 이래. 무엇 하나 마주하고 끝까지 도전할 용기도 뭣도 없으면서 일은 늘 벌어지는 게 이제는 익숙하다. 하다 못해 새싹도 목적을 가지고 몸을 틔우건만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생명을 틔웠을까. 느릿하게 지나가는 빗방울이 보였다. 너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니. 무엇을 위해, 그래, 무엇을 위해.
싹이 노랗다, 는 말은 잔인한 것 같다. 아직 채 몸을 키울 발돋움을 했을 뿐인데 노랗다는 평가를 받은 새싹은 얼마나 가슴이 미어질까. 아직 제대로 된 시작을 하지도 못했음에도 끝난 것마냥 늘어져야만 하는 그 언질이 얼마나 차가울까. 냉랭하다. 너는 안 돼, 라는 말이 나는 왜 이렇게 슬플까. 그래, 나도 알아. 나도 내가 안 되는 것, 알아. 굳이 다시 일깨워줄 필요 없잖아. 너 미워.
나는 세상을 향해 커다란 꿈을 틔울 거에요! 어릴 때의 열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누가 지웠어? 누가 내 열정을 지웠어? 세상이야? 이 나라야? 부모? 선생? 아니면, 나 자신? 나 자신이라고 말하지마. 그럼, 너무 괴롭잖아. 자기 합리화. 여전하구나.
나 원래 이래요. 해도 안 되는 걸 어떡해요. 나에 대해 뭘 알아? 나도 나 할 나름대로 하고 있어. 스트레스를 받아도 내가 받아.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넣을 수 있다면 인생을 하수구로 구겨 넣고 싶어요. 날 왜 이렇게 낳았어요?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데, 이딴식으로밖에 못하는 난데, 왜, 나를, 낳았어요?
부정했다.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난 이것밖에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부정해도 눈 앞에 닥쳐오는 현실은 '넌 그것밖에 안 돼' 였다. 좌절감, 자조적인 웃음, 그리고 절망, 포기. 갈 곳도 없는데 정처없이 걸었다. 이 길의 끝은 어딜까. 점점 거세지는 비바람에 몸을 맡겼다.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있잖아, 나는 정말 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대통령도 되고 싶었고, 의사도 되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이것 보세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이에요. 세상을 향해 나의 모든 것을 내뿜어주고 싶었어요.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 자랑하고 싶었어요. 나도 그랬어요. 어릴 때 난 당연히 카이스트 들어갈 줄 알았다? 웃기지? 나도 웃겨. 무얼 보고, 그리고 무얼 믿고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자연스럽게 해 댔었는지, 너무, 웃겨.
희망의 불씨를 틔워주세요. 딸랑딸랑. 울리는 구세군을 바라보았다. 나 하나도 잘 다루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있어. 두텁게 떨어지는 빗속을 걸어가며 구세군을 지나쳤다. 참 할 일도 없다. 사람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시린 세상에서 살아가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기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절실하다. 어쩔 수가 없다. 그게 내가 세상에서 배운 생존하는 방식. 삶은 서바이벌이니까. 입술을 오므리고 가락을 뽑아냈다. 휘이, 휘이. 울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발걸음도 따라 경쾌했다. 무겁게 내려앉는 공기가 쳐졌다. 아아, 좀 도우라고. 간만에 현실 부정 좀 해 보려니까는.
작은 벌레 한 마리는 코웃음을 칠 존재다. 작은 벌레 한 마리 팔 위에 얹히면 손바닥으로 때려 죽여도 되고, 손가락으로 튕겨 저 멀리 날려버려도 된다. 작은 벌레 한 마리의 존재쯤이야. 글쎄? 무시했다가는 큰 코 다칠텐데? 작은 고추가 더 맵다는 말 못 들어봤어?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네 몸을 갉아먹기 시작할거야. 손가락 끝부터 혈관을 타고 꾸물꾸물 기어갈 거야. 네 척추를 기어올라갈거야. 그리고 네 뇌를 잠식해 나갈 거야. 뭐가 두려워? 그저, 작은 벌레 한 마리일 뿐인데. 그치?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발닦개에 발을 슥슥 문질렀다. 더러워진 신발에 흔적을 남긴 빗방울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작은 빗방울 몇 개. 너도 나를 갉아먹을 거니? 문득 두려워진 마음에 만날 사람도 없는데 화장실로 뛰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온 몸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온 몸에 스며든 것 같다, 더러운 게, 무거운 게. 빗방울의 향기가 여전히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매달려있었다. 그걸 발견한 나는 잠시 머뭇대다가 샤워기로 훑어내 버렸다.
새하얀 시트 위는 대조적이었다. 몸을 던졌다. 나른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 너무 고생했어. 오늘 수고했어. 말하려 해도 멈칫한다. 내가, 오늘 한 게 뭐가 있지? 뭘 하기는 했었나?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합리화, 그리고 이러저러한 잡생각으로 가득했던 하루를 되새김질한다. 잊어버려. 뇌가 명령했다. 이런 건 또 말 잘 듣지. 편안해진 마음을 가득 안고 완벽하게 눈을 감았다. 뭔가 찝찝하긴 한데, 뭔지 알아내고 싶은 욕구가 없다. 우와, 넌 참 여전하구나. 한결같아. 응. 그걸 이제 알았어?
몸을 일으켰다. 비가 멎었다. 구름도 점차 걷혀 간다. 우두커니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예전과 똑같은 그 모습 그대로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내다 보이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름답지 못한, 한결같은 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난 여전히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 못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