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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코드 #2 답문

얼마전 대나무 숲에서 네 얘길 봤다. 익명이라고는 하지만 내용이 너와 나의 이야기인데 그걸 내가 모를리가 있을까. 덤덤하게 써내려간 내용이 참 너답구나 싶었다. 우리가 헤어짐을 말한지 오래되었으니 언제나와 같은 담담한 네 말투에 더 이상 상처받지는 않았다.
그냥 네가 생각났다.

우연히 마주쳤을때부터 네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걸 나는 몰랐다. 이제서야 알게되었다. 나는 지금껏 내가 너를 먼저 좋아한줄 알았다. 내가 너를 더 먼저 좋아했다, 라고 말하는 내가 넌 얼마나 웃겼을지. 아니 씁쓸했을지도 모르겠다. 몰라줘서 미안하다.

나는 네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다. 나는 너와 오래갈 줄 알았다. 몇년이고 이 마음이 변하지 않을줄 알았다. 그래서 너와의 친구관계를 먼저 깨뜨렸다. 사실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네가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봐서 네게 고백하는 그 순간에도 손끝이 떨렸다. 네가 놀란 표정을 짓는 그 순간에 나는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그 때에 느꼈다. 아직 연인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도 많은 감정을 쏟아부은 사람이 바로 너라는걸.

네가 미안하다, 라고 말했을 때는 눈물이 고였다. 2년동안의 친구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걱정보다는, 친구관계고 뭐고 너를 더는 못본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내가 먼저 고백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너의 말에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를 받아주는 네가 너무 고마웠다. 눈물이 흘렀고 너는 나를 안아주었다.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의 관계를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너와 지내는 모든 순간동안 행복한 미래를 상상했다. 눈에는 콩깍지가 몇 겹씩 두껍게 씌워졌다. 노래가사처럼 눈을 감은 그 순간에도 네가 그리웠다. 유치하게 누가 더 좋아하네 마네, 하는 장난도 많이 쳤었다.

학교의 기숙사제가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주말마다 주어지는 자유시간 중 절반은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 잔류 신청을 해 남아있었다.

부모님에게까지 비밀로 한 연애는 일년동안 학교에게도 걸리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 걸리지 않을줄 알았다. 주말마다 학교에 남아있는 선생님들이 있음을 뻔히 알았다. 하지만 반년정도 지나니 둘의 긴장이 풀어졌었다. 지금껏 잘 숨겨왔으니 더이상 걸리지 않을줄 알았다. 안일한 마음에 주말내내 너와 같이 있었다. 혹시 몰라 감시카메라가 없는 지하도서실 계단에 둘이 몇시간이고 앉아 깔깔댔다.

연애를 반대하는 학교는 견고하고도 높은 벽이어서 우리가 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양 손을 묶고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너와 헤어진지 벌써 삼개월째다. 나는 그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구역질이 나는 기분이었다. 학교가 너무 미웠다. 그나마 과가 달라서 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아니 사실은 네 얼굴을 못봐서 아쉬웠다. 나는 아직 너를 좋아한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네게 수능이 끝나면 다시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문자를 보내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는 이내 마음을 접는다. 네가 올려놓은 대나무숲의 끝이 내 행복을 빌겠노라고, 첫사랑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거라고 말하던 내용이 눈에 밟히기에.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내게 앞으로 이만한 감정을 쏟아부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수능이 끝나면 꼭 웃는 얼굴로 너를 마주하고 싶다. 더이상 눈물을 보이지는 않을것이다.

내가 수시 1차를 붙은 학교에 네가 지원할 거라는 소리를 건너들었다. 너를 생각하면서 면접을 볼 것이고, 꼭 붙을 것이다. 너와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싶다. 이번에는 학교가 막지 않는 사랑을 하고싶다.
이쪽 분야에서는 꿈의 대학이고, 지원한 우리학교 학생이 많은 건 나도 안다.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착각을 하고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믿어보고 싶다. 네가 대나무숲에 쓴 내용이 사실 진심이 아니라고 믿어보고 싶다. 아직 고등학교를 다니니까, 우리 고등학교 대나무 숲이니까. 첫사랑으로 남기겠다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믿어보고 싶다. 매달리는 내 모습이 추해서 네 기억에 내가 구질구질한 여자로 남는대도 나는 마지막 가능성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것이다.

나는 너라는 남자를 너무 좋아한다.
너무 좋아해서 내 마음을 어디든 털어놓고 싶다. 하지만 후회뿐으로 가득한 이기적인 글을 네가 보는 곳에 털어놓고 싶진 않다. 익명의 힘을 빌려 글을 쓴다.

나는 너를 너무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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