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사랑을 하고싶었던 적이 있었다. 서로 바라보기만도 해보고, 사소한 다툼 때문에 가슴아프기도 해보는 그런 싸구려 로맨틱 영화에나 나올법한 사랑이. 친구들은 그래서 내가 솔로라며 놀려댔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사랑은 없다는 것을. 잠시동안 너를 만나서 했던 사랑이 그런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넌 나한테 큰 영향을 미친 사랑이었다.
초겨울임에도 유난히 춥던 날 전역을 했고, 스스로에게 고생했다 위로하며 그 겨울을 정신없이 놀았었다. 몇 개월 후 다음 년도 여름 해외봉사를 신청한 건 전역 당시 낭비한 겨울이 아까웠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사실 신청하면서도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류에서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고 난 이후 편안한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갔었고, 최종 합격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놀랐었다.
1박 2일 사전교육을 할 때에 너라는 사람은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출국당일, 심지어 현지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 때 까지 조차도 나는 너라는 사람을 몰랐었다. 처음 해보는 대외활동 이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설레였다. 첫날밤 내가 속한 조가 아닌 다른 조에서 하던 진실게임에 서스럼 없이 같이 참여 했었던 이유는 이러한 설렘에 들떴기 때문이었다.
우연이 겹쳤었다. 게임을 하면 세 번중 한번은 너가 걸렸었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처음 보았지만 많은걸 알 수 있었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된 너는 여중 여고를 나와서 한번도 남자친구가 없었다고 했다. 치아교정을 하고있었지만 3주이내로 교정기를 뺀다고 좋아했었고, 전체 봉사자들 중 가장 막내였다. 몇번의 우연이 겹친 이후, 너는 더이상 말할게 없다며 자신에게 온 차례를 웃으며 넘겼다. 너는 낯을 많이 가렸다. 어둠이 깊어지고 모두가 내일을 준비하러 일어날 때 같이 웃으며 놀던 팀원 중 하나가 '우리 막내에 관심있으면 제가 도와줄게요' 한마디에 다음날 다른 팀원과 봉사 장소를 바꿔 너를 따라갔던 것을 너는 모르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참 고맙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눈치챘던건지 아니면 그냥 던져본 말인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덕에 나도 잘 몰랐던 내 마음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까.
너에게 말을거는 남자팀원들을 보면서 기분이 나빴고, 너가 다른 팀원의 말을 듣고 웃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너가 내말에 호응해주면 기분이 좋았고, 너가 웃어주면 나도 덩달아 웃었다. 우린 학교도 가깝고 같은 k대라며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에 정말 그렇다며 자기 학교로 놀러오라고, 떡볶이가 맛있는 집이 있다며 웃던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날은 속절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마지막 날 술을 한잔 기울이고 너를 불러 바닷가에 앉아서 보름달을 보며 고백을 하기까지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너는 아마 모르겠지. 너도 수줍게 나를 좋아한다고 했을때 얼마나 기뻤는지도 아마 모르겠지. 그 더운 여름날 비행기에서 땀이나게 손을잡고 이어폰을 나눠 들으며 이야기할 때 다음 곡이 이별노래가 나오지 않도록 눈치 못 채게 순서를 바꾸던 설레던 순간들. 몸이 안좋아서 쉬겠다더니 갑자기 택시를타고 우리집에 온 너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던 어리숙한 내모습. 너의 작은 손을 꼭 잡고 나누던 그 이야기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작은 너를 어떻게 안아줘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 하던 내 모습이 답답했을 것 같아. 서로 가장 지친 순간에 기댈 수 있는 곳이 되어주었고, 같은 이유로 지쳐있을 때 만났기에 그렇게 쉽게 헤어진걸까.
미안하다는 말은 갑작스러웠지만 내속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던 너를 보았고, 그랬기에 잡지못했다. 같은 고민 속에서 나는 너를 받아들이기로, 너는 나를 밀어내기로 선택했을 뿐이니까. 많이 듣던 이별 노래 가사들과 다르게 커다란 느낌이 없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 괜찮은 것 같았고, 주위 사람들은 농담을 건내며 위로했다. 그런데 평소처럼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통화를 해야하는 너가 없다는 걸 느끼고 참기힘들만큼 공허함이 몰려와 너무 답답해서 눈물이 났다. 지코가 부르는 목소리가 좋다며 너가 알려준 노래는 내 모습이었고, 하나 둘 듣던 이별노래들이 전부 내 이야기였다. 영화같은 사랑을 바랐기에 세드 무비의 엔딩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들 흔한 이별 얘기가 된걸까.
이제 1년이 지났다. 이제 나는 너를 좋아하거나 하진 않는다. 공허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었고 당시에 듣던 이별 노래는 그저 노래가 좋아서 자주 듣는다. 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잘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써본 건 나중에 정말 우연찮게 너무나도 우연히 너를 마주치고 반갑다며 웃어준 다음 카페에서 웃으며 그때를 회상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런 겨울 날씨에 취해서 그런가 보다. 언젠가 우리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이 추억이 되면, 가끔 안부 한번쯤 물어보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