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의 항일 의병장 신돌석 장군.
申乭石 신돌석 (1878 - 1908)
대한제국 시기 항일의병운동의 평민출신 의병장.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서 출생.
당시 기준으로는 영해(寧海)도호부 지역이었다. 영덕군 축산면에 신돌석 장군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길을 잊어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폐허를 탄식하노라. 잠시 추풍 속에 앉아 감회에 젖네.
- 27세에 읆은 시 -
구한말 조선의 의병장. 중인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사람이었으며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
마침 호랑이띠이시다.
어린 시절부터 건강하고 용감하기로 소문이 났고, 거리가 되는 시내를 단번에 뛰어 건널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 한다. 야사에 따르면, 일제가 전선을 잇는 작업을 하는 중 단숨에 총을 가진 왜병들을 때려눕힌 뒤 전신주 여러개를 뽑아서 패대기치고 사라졌다든지...
물론 그 당시의 전신주는 지금의
돌이나 금속이 아닌 나무였긴 하지만
의병장으로서의 용맹함을 알리기위해 쓰여진 일화로 보이니 이런걸 진지하게 믿지는 말자.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대항해, 평민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농민중심 병력은 산악지역에서 주로 유격전을 펼치며, 지세에 능하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보였다.
참고로 그가 처음 의병에 참여한 시기는 나이 19세로 1896년, 을미사변 다음해가 되겠다. 따라서 갑자기 평민의병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전공을 인정받아 을사조약
(1905년) 때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의병장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신출귀몰한 그의 작전에, 일본군은 크게 경계했으며 회유책이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포획하려 했다.
전공도 후덜덜해서 울진 앞바다에서 일본군 군함 9척을 침몰시킨적도 있다.
최후는 그의 부하이기도 했고, 또한 고종사촌이기도 한 김상렬 형제의 손에 살해당했다. 당연한 거겠지만, 이 두 놈은 조선인.
활발한 의병활동을 펼쳤으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1907년)때는 양반의병장 중심의 창의군에서 명목 제외 당했다. 의병장의 중심이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양반들이었기 때문.
그전까지 의병에 평민이 참여할 수 있었지만,
의병장만큼은 무조건 양반이어야 했다. 양반은 장교 계급.
한 학교 국사선생에 말을 따르면
신돌석과 그의 부하가 같은 복장을 입고 여러 곳에서 게릴라 작전을
펼쳐 이런 얘기가 돌았다카더라.
곽재우
겨우 9척이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신돌석이 의병이고 의병이면 일단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받아도 과연 정규군인 일본군보다 더 잘 받을 가능성도 없고 이때
9척은 정박중이었지만 그래도 군선은 군선이다.
얼마나 있었을지는 모르니 그 배들 밖이나
안에 누군가는 지키고 있을텐데 그렇게 되면 산속처럼 숨어서 공격할수도 없으니
정면승부를 해야한다.
즉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비정규군 VS훈련 잘 받은 정규군끼리
전투를 벌이게 되는것이며
9척 정도 되면 정말 적다 해도 수백명 정도는 있을 가능성이 크며 상대는 신돌석이다
현상금까지 걸며 잡으려는 사람이 활약하는 동네인데 정신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즉 9척이란 숫자가 적긴 하지만 대비를 하고 있을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배를 수장시켜버린 꽤 대단한 승리다.
웃기는 건 목을 베서 가져가니 정작 일본군은 살아있는 신돌석을 잡아오랬지 죽은 신돌석은 필요없다면서 보상 일체를 해주지 않았다는 거다. 배신자들에게 딱 걸맞는 대접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비극적인 야사가 하나 있다 고종사촌 형제가 신돌석에게 술과 고기를 극진히 대접하고, 쿨쿨 잘 자고 있을 때 공격했는데,
이때 공격받은 신돌석은 이렇게 외쳤다
"형님, 형님, 누가 나를 찔렀소?"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형제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
신돌석선생은 가족들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명년의 재기를 위해 여러 곳의
동지들을 찾아 다니던 중, 11월 중순 영덕 눌곡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선생은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을 만나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과 함께 선생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만취하게 한 뒤, 깊은 잠에 빠진 선생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들은 선생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자신보다도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살해되어,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네이버지식인
-영덕 서포터즈 이형성 선생님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