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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의 형(神獸之形) 13

Wagi |2004.01.22 03:26
조회 239 |추천 0

 

그녀의 이름은 '소접(素蝶)'이었다.


소접… 나의 흰 나비.

흩날리는 이화(梨花) 비처럼 날리고 먼산 새소리 애달프던 날,

하얀 나비는 춤을 추었다.

소매자락 가득 바람을 안고 치마폭 가득 흰꽃을 받으며

붉은 입술 깨물어 그리 춤을 추었다.

그 날의 그녀는 그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날아가는 새마저 그녀를 위해 머물러 노래했다.

무뚝뚝한 나무들까지도 그녀를 위해 몸을 기울여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햇살 아래 그녀는 참으로 곱기만 했다.

 

과거공부를 하기 위해 산사를 찾았던 나는 우연히 발견한 그녀의 자태에 넋을 잃었다.

필시 저것은 화정(花精)이거나 나비의 화신일 게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어 매일 그 자리에 나가

그녀의 춤을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맑은 심성을 읽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서로를 품었다.

그윽한 향내가 풍기는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좋았다.

눈처럼 하얀 그녀의 살결에 취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운명이고 숙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듯 했다.

인적 드문 산속은 우리의 세계였다.

그녀는 산의 모든 것에게 사랑받았고 나를 사랑했다.

풀밭은 우리에겐 비단금침이었고 산짐승들은 우리의 친구들이었다.

그 세상에서 그녀와 나는 지극히 행복했다.

소접은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고아로, 할머니라 부르는 무당과 함께 살았다.

나는 절에서 빠져나와 언제고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우리에게 신분이 무엇이며 지위가 무슨 필요란 말인가.
나는 그녀만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했고 그녀도 그리 말해주었다.

우리는 그 행복이 영원할 줄로만 믿었다.

어느 달이 곱던 밤, 소접은 밤이슬에 젖은 날개를 파르라니 떨며 나를 찾아왔다.

처음 보는 그녀의 눈물은 푸른 달빛을 받아 시리게만 보였다.

 

"서방님, 어찌 하옵니까. 소녀는 어찌 하옵니까."

 

신조차 없이 고운 발 가득 내어 온 생채기에 나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매달리는 그녀의 무게에 나의 마음은 더 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찼다.

 

"무슨 일인가. 소접, 말을 해 보게. 말을 해 보아."

 

화급히 그녀를 안아 방으로 들였다.

다행히 나의 방은 산사와 한참 떨어져 있었기에 나는 칠복이놈의 눈을 피해 그녀를 맞았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서도 무어라 말은 못 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혹여 소리가 새어 내가 곤란할까봐 입술을 깨물며 오열했다.

답답하고 속이 상해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게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 날아갈 듯 큰절을 했다.

 

"왜 그러는 겐가. 대체 무슨 일인가."
"서방님, 소녀는 이제 서방님을 뵈올 수가 없나이다.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거두고 찬찬히 나의 낯을 뜯어보았다.

하나라도 놓칠까 세세히 살피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억에 새겨넣을 듯 그리 간절하였다.

그 모양이 너무도 애절해 나의 눈에도 눈물이 났다.

대장부 태어나 세번 운다하나 나에게는 어떤 때보다도 그녀의 그 얼굴이 슬프고 아팠다.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급한 마음에 호통을 치니 그녀는 눈물젖은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아니 된다, 저것은 산 자의 얼굴이 아니다.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그런 빛이다.
순간적으로 나의 머리속에 그러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무게가 없는듯 쉽게 내 품안으로 딸려들어온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불안한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 부드럽게 속삭였다.

 

"말을 하게. 답답하구면. 왜 볼 수가 없다는 겐가.

내 비록 자네를 정실로 들이지는 못하나

성도로 돌아갈 때 반드시 데려가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나.

정실을 따로 들이더라도 내 평생 자네만을 정인으로 여긴다 하였거늘

내 언약이 그리도 못 미더운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소녀처럼 천한 것을 그리 생각해 주시니 소녀가 어찌 다른 마음을 품으리까."
"그렇다면 어찌 그러는가. 말을 해 보게나."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나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자세를 단정히 했다.

 

"서방님께서는 이년을 잊으시옵소서.

귀히 되실 서방님께 소녀가 누가 된다면 소녀는 죽어서도 그 죄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옵니다."
"정녕 내가 화를 내어야 하겠는가?

어찌 된 영문인지 소상히 밝히지 못할까!"

 

소접은 발치에 엎드려 울기만 했다.

 

그 가냘픈 몸 속에 어찌 그리 많은 눈물이 있단 말인가.

나는 기가 막히고 답답하여 그대로 한숨만 내쉬었다.

 

"소녀는 곧 죽을 목숨이옵니다."

 

뭐라?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어디 병이라도 걸린겐가?

어서 가세, 한양에 내가 아는 용한 의원이 있네.

진맥을 받고 치료를 받으면 죽을 병이 어디 있겠는가. 어서 일어나게."
"아니옵니다. 소녀 무탈하옵니다."
"허면 죽을 목숨이란 게 무슨 말인가?"
"소녀는… 소녀는… 이달 보름이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그 모양이 하도 처량하여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흔들어 내역을 알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소녀는 이달 보름에 산 제물로 바쳐진다 하옵니다. 할머니께서 오늘 그리 하시더이다.

십년도 전에 정해진 일이옵니다. 소녀 그리 알고 살아왔사옵니다.

하오니 소녀는 이제 다른 길이 없사옵니다."
"제물이라니! 무슨 제물을 사람으로 바친단 말인가! 내 당장 이 놈들을!"
"아니 되옵니다! 참으시옵소서."

 

흥분한 나는 벽에 걸린 칼을 뽑아들고 달려가려 하였다.

 

내 이 놈들을 모조리 도륙내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듯 했다.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에서 이 어찌 가당키나 한 소린가!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내가 내 정인을 빼앗길 듯 싶으냐.

당장 현감에게 달려가 이 소행을 낱낱이 고하고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리라.

 

소접은 다리를 붙들고 매달렸다.

차마 그녀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어 나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무지렁이들을 죽일 필요까지야 없겠지.

현감에게 고해 조용히 수습하면 될 일을.

 

"고작 그런 일로 그리 마음을 졸였느냐.

걱정마라. 내 현감에게 이 일을 고할 것이니 너는 돌아가지 말고 이곳에 있거라."
"서방님께선 모르시옵니다. 현감나리께서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옵니다."
"현감이 어찌하지 못하다니? 그런 방자한 말이 어디 있느냐?"
"마을에 내려가 보셨는지요."

 

조용한 어조로 그녀가 내게 물었다.
기억 속의 마을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간혹 마주치는 자들도 경계의 기색을 띄고 있었다.

그 지나친 배척에 불쾌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가보았지. 헌데 왜?"
"이상한 점이 없더이까."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지나치게 휑한 마을이나 산을 낀 작은 곳이니 그럴 수도 있다.

뒤로는 산, 앞으로는 강이니 부러 들르지 않는 이상은

산을 넘을 길도 없는 마을에 타지인들이 무슨 용무가 있겠는가.

 

"글쎄, 특별히 이상한 것은…"

 

말을 하다 말고 칠복이 놈이 갸웃거리던 것이 생각났다.

 

"마을 안 이곳저곳에 기둥이 있더군."
"결계(結界)를 이루는 일종의 진(陣)이옵니다."

 

태연한 소접의 대답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결계? 진?

 

"진이라?"
"그러하옵니다. 진이옵니다."
"진을 펼 줄 아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소접은 기가 막혀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마을도 전엔 꽤나 크고 북적거렸다 하더이다.

헌데 언젠가부터 하나둘씩 아이들이 사라졌다 하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뿐 아니라 장정들까지 사라졌다지요."
"어찌 그리된 겐가?"
"마을은 저주받았다는 소문으로 흉흉해졌고

간혹 요물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하옵니다.

두려움에 현감에게 몰려갔지만 현감나으리께서는 민심을 동요시킨다 하여

오히려 그들에게 장을 쳐서 쫓았지요."
"그건 당연한 일일세. 세상에 요물이 어디 있는가.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약한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야."
"처음엔 현감나으리께옵서도 그리 믿으셨지요.

그러나 어느날 현청에까지 요물이 출몰하였고

그날 현감나으리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하옵니다."
"뭐라? 현감이 사라져?"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이야기였다.

요물이라니… 세상 천지 어느 곳에 요물이 산단 말인가.

 

"그리하여 마을의 반수 이상이 사라지거나 도망쳤다지요.

반도 안 남은 마을사람들은 집안에만 숨어 살았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이 없어졌다 들었습니다.

땅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이들은

그저 하루하루 숨죽이고 무사히 넘기는 것만을 빌고 또 빌었다 하옵니다."
"하면 그것이 정말로 요물의 탓이었던가?"
"진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 진과 무슨 상관인가?"
"열두해 전 마을에 도사님 한분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괴이한 기운이 있도다, 하시고

그날로 하늘에 제를 올리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이 마을은 경계의 문이 있는 곳이라 하시고

그 문의 봉인이 느슨하여 요물들이 그 문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이 마을뿐 아니라 온 세상이 요물로 가득 차리라 하셨사옵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그분께 대책을 강구하니

그분께서 임시로 진을 펼쳐 더 이상 요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겠다 약조하시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의 일이니

일시의 방편은 되나 이후의 일은 장담하기 힘들다 하시더랍니다.

그리하면 어찌 해야 그 문을 봉인하겠습니까 하니

그분께서 눈을 감고 잠시 천간을 짚으시더니

이 마을에 요물의 힘을 지닌 아이가 있다고 대답하시어

마을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사옵니다.

정말로 그러한 아이가 있다 하니 도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불쌍하나 이 세상을 위해서는 그 아이로 문을 삼으리라 하시고

그 아이가 열여덟이 되는 해, 다시 오시리라 말씀하시고

그 자리를 홀연히 떠나셨다 하옵니다."

 

눈물기 싹 지우고 진지하게 말을 하는 소접이 낯설었다.

말을 하는 소접의 입에서 무서운 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그만 하라 말하였으나

그 소리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아니할 정도로 작았다.

 

"소녀가 어찌 이곳으로 팔려온 줄 아시옵니까?"

 

그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어이해 소접은 나를 그리 슬픈 눈으로 보았을까.

 

"소녀는 요물의 자식입옵니다.

내 어머니는 요물에게 겁탈당해 저를 가졌다 하옵니다.

죽으려 해도 죽어지지 않았다 하더이다.

높은 데서 굴러도 보고 약도 먹어보고 배를 그리 때렸는데도 모질게도 붙어 있더랍니다.

나중엔 그것도 자식이라 애틋한 정이 생겼다 하더이다.

여섯달만에 사람들에게 들켜 죽게 되었을 때

그래도 저만은 살리고 싶어 했다 그리 들었사옵니다."

 

요물의 자식? 소접이?

 

나는 소접을 보았다.

하얀 얼굴, 붉은 입술, 까만 머리카락…

춤을 추던 그날의 소접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니, 그리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 않은가.

처음 보았던 날, 세상사람같지 않게 아름다우니

필시 저것이 정령이리라고 그리 믿었지 않았던가.

요물이면 어떻게 정령이면 어떤가.

내가 그녀를 모르나. 그동안의 소접이 바로 나의 소접인 것을.

 

"그러하옵니다. 소녀가 바로 그 문을 봉인할 아이이옵니다.

소녀는 사람과 달리 짐승과 말을 하고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사옵니다.

소녀는 사람보다 훨씬 빨리 달리고 몇장의 허공을 격하여 날아오를 수도 있사옵니다."

 

무언가 체념한 듯한 눈빛으로 쓸쓸히 고하는 소접의 모습에

나는 두려움보다 연민을 느꼈다.

 

눈앞에서 자네가 요괴로 변하여도 어쩌면 나는 놀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어찌 이러한가. 자네가 요물이라 하여도 어찌 내 눈에는 이리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겐가.

 

"이리 오게. 그리 혼자 떨지 말고 이리 오게."

 

내 품으로 안겨들며 소접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나의 목에 매달리며 그녀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으되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소접이 무엇이건 나의 아내요, 나의 정인이다.

그녀가 무엇이건 나는 이제 그녀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을.

 

"무섭지 않으시옵니까. 소녀가 소름끼치지 않으시옵니까.

소녀가 언제 요괴로 변해 서방님의 심장을 낚을지도 모르는데 어찌 이리 태연하십니까."

 

 

그날밤 소접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얼굴도 모르는 어미의 이야기를 하며 울었고

자신이 어미를 죽인 죄인이라 가슴을 쳤다.

제물로 키워질 때에도 어미 생각을 하면 당연하다고 그리 믿고 자랐다 한다.

그러던 것이 나를 만나 처음으로 삶에 욕심을 냈다고.

나와 헤어지기가 싫어 살고 싶었다고.

 

참으로 불쌍한 사람. 가엽고 안 된 사람.

어찌 사람으로 태어나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살았단 말인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올 수 있었더란 말인가.

 

"나는 그리 못 하네. 자네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네."
"하오나 그리하면 세상은 요물들의 차지가 될 것이옵니다."
"그깟 세상이 다 무언가. 내게 자네가 없으면 세상이 무슨 소용인가.

아니 되네. 나는 자네를 보낼 수가 없네."
"아니 되옵니다. 천한 것이 미련한 생각으로 서방님께 누를 끼치옵니다.

열여덟이 되는 날이 이달 보름이라 생각하니

그만 정신이 아득하고 서방님 존안이 눈에 선하여 뒤도 헤아리지 못해 달려왔으니

소녀가 서방님께 큰 근심을 안겨드리게 되었사옵니다.

소녀는 서방님께서 이리 사랑해 주시는 것만으로 흡족하옵니다.

요물이라 해도 상관치 않으신다 해주시고 이리 괴이시니 소녀는 여한이 없사옵니다."
"그리 말하지 마라. 나는 너를 놓을 수가 없다.

이토록 어여쁜 네가, 이처럼 착한 네가 어찌 요물이란 말이냐.

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다.

자불언괴력난신(子不言怪力亂神)이라 공자께서도 요물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니.

요물난신들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다니 내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오나 소녀가 어찌 하오리까. 도망을 친다 한들 어디로 갈 것입니까.

소녀는 죽음이 두려워 이러는 것이 아니옵니다.

소녀는 다만 서방님과의 별리가 그저 서러울 뿐이옵니다."
"왜 안 된다더냐? 나 또한 너와 이별하고 싶지 않다.

우리 둘의 마음이 같으니 심산유곡 깊은 골짜기에 숨어산다한들 무엇이 아쉬울 것인가."
"참으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녀는 여한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그것은 안 될 일. 귀하신 분께서 차마 못 하실 일이옵니다."
"내 다른 아무 것도 필요없다. 입신양명이 무엇이고 불충불효가 무엇이란 말이냐.

너 죽고 없어지면 나는 살지 못하리니.

내 어리석었다. 다 버리지 못하고 네게 버리기만 강요하였으니…

내가 잘못되었다. 내가 네게 잘못하였다."
"아니옵니다, 정녕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천한 년의 일로 앞길을 버리시다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아니되옵니다."
"그만 하여라.

내 비록 불충불효를 하여도 너만 있으면 된다 하는 내 뜻을 그리 모르느냐.

네 그리 내 속을 헤아리지 못하느냐."

 

똑부러지게 죽겠다고 말하는 그녀가 참으로 야속했다.
나의 말을 못 믿는 걸까, 아니면 나약한 서생이라 의지할 수가 없다는 걸까.

서운한 마음에 오기가 배가 되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무슨 말을 해도 네가 죽는 꼴을 차마 못 보겠다.

나와 약조하여라. 우리는 내일밤 아무도 모르게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니라.

내 칠복이놈을 술을 멱여 재울 터이니

너는 칠복이의 옷을 입고 얼굴에 검댕을 칠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알겠느냐?"
"아니되옵니다. 소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옵니다.

단지 서방님을 위해, 서방님이 계시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눈을 감을 것입니다.

이것은 소녀의 의지이옵니다. 밀려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옵고

서방님을 위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그리 할 수 있사옵니다."

 

놀라 붙드는 그녀를 나는 냉랭하게 외면하였다.

기꺼운 마음으로 죽겠다니, 어찌 그런 말로 사람가슴을 이토록 아프게 치는지,

참으로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부러 고개를 돌려앉아 나는 차갑게 그녀에게 언약을 맺도록 종용했다. 

 

"대답하게. 자네가 내일 이리 온다면 우리는 함께 사는 것이오,

오지 아니한다면 같이 죽기로 하세.

자네 죽기 전에 내 먼저 자네 앞에서 죽어버리겠네.

자네없는 세상을 나는 살지 못하네.

허니 자네 죽는 꼴을 보니 차라리 내 먼저 눈을 감아버리려네."
"서방님… 어찌 이러시옵니까. 소녀더러 어찌 하라 이러시옵니까.

짧은 아녀자의 속으로 그저 한번이라도 더 서방님 얼굴을 머리에 새기려 달려왔사온데

결국 이년이 서방님의 앞길을 망치옵니다. 이년이 죽일년이옵니다. 이년이…"
"다른 말은 다 필요없네. 남은 자의 상심따윈 내 맛보고 싶지 않네.

허니 어찌 하겠는가."

 

소접은 곤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번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더욱 나의 품으로 안겨들며 허락의 뜻을 전해왔다.

그제서야 살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낯을 펴고 활짝 웃었다.

나의 웃음을 본 그녀 역시 오늘 밤 처음으로 웃어보였다.

우리는 그리 얼싸안고 희망으로 부풀어 미래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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