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 교리 비판 - 성경관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단에 빠지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어떤 장애가 있거나, 가정의 환경이나 교육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거나, 혹은 영적으로 중대한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가족, 또는 자신의 교회 성도들은 절대로 이단에 빠지지 않으므로 별도의 이단교육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목사님의 자녀가 신천지에 빠져서 상담을 의뢰한 적이 있으며, 수십년간 신앙생활을 해왔던 장로가 신천지에 빠진 경우도 직접 목격하였다. 심지어 전도사나 목회자가 이단에 빠진 경우도 보아왔다.
이단은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만이 빠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천지는 성경공부를 하자고 제안을 하며 미혹을 하는데, 평소에 성경공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신천지에 빠질 위험이 없다. 다시 말하여 평소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신천지의 첫 번째 대상이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이단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신천지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에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성경관이며, 성경관을 가르친 후에는 곧 비유풀이를 약 2개월에 걸쳐서 가르치게 되는데, 신천지의 성경공부를 듣는 성도들 중에 약 70%가 신천지에 미혹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다.
성경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초신자들은 신천지의 강의를 듣고 그들의 성경해석이 무엇이 잘못인지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성경구절을 일일이 찾아서 인용하고 해석하며, 처음에는 문제점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잘못 해석한 것이라든지 부분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초신자가 반박하기는 어렵다. 물론 그들은 처음부터 이상한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다.
필자는 평소에 교회에서 성경공부와 정통신학공부를 가르쳤다면, 이단에 빠지는 성도들이 거의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 이단들이 이렇게 성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일년에 몇 번씩 부흥회를 하는 교회는 많지만, 일년에 단 한번도 이단세미나를 하지 않는 교회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이며, 특히 감리교인 필자에게 이단세미나를 요청하는 교회는 90% 이상이 장로교등 다른 교단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자신의 딸을 데리고 와서 상담을 부탁하면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던 목사님이 생각난다. 이제 이단문제는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자녀가 혹은 우리의 부모, 형제가 이단에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이 우리 눈 앞에 현실로 다가 올 수 있다.
1. 신천지가 가르치는 성경관
신천지 교회가 기독교의 성경관과 다르게 가르치는 세가지 방법을 크게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단어를 비유와 짝풀이로 해석하는 방법이며, 이러한 방법의 목적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성경을 조작하여 만들기 위함이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대로 성경해석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오늘 학교에 갔다”라는 구절에서 ‘학교’가 ‘극장’을 뜻한다고 비유한다면 “나는 오늘 극장에 갔다”는 내용으로 바꿀 수가 있다. 만약 신천지 강사가 ‘학교’라는 단어가 ‘극장’으로 비유된 다른 성경구절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들의 해석은 논리적인 해석이 된다.
실제적인 예를 들면, 창세기 1장1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구절에서 ‘하늘’(천)은 목자, ‘땅’(지)은 성도를 비유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목자와 성도를 만드셨다는 뜻이 된다. 즉 창세기 1:1을 “하나님이 기독교를 만드셨다”고 해석하며, 창세기 1장 2절을 기독교가 타락하여 혼돈과 공허, 흑암이 된 것으로 조작하여 해석하는 것이 실제 사용하는 신천지의 수법이다. 또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신천지)을 새로운 목자와 새로운 성도로 해석하여 신천지 교회라고 해석한다. 이런 수법을 사용하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성경을 비유풀이할 수 있게 된다. 당연하게 “내 마음은 호수”라는 비유가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성경에 나오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모두 ‘호수’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둘째는 하나님과 사단의 대결구도, 성령과 악령의 구도, 영계와 육계의 구도, 선과 악의 구도, 빛과 어두움의 구도, 진리와 비진리의 구도,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구도로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해석을 사용하며, 이것을 반복적으로 학습시키면서 후자를 기독교의 타락과 목사들의 범죄를 부각시키면, 그것을 배우는 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증오와 반감이 생기게 된다. 그들은 영이 두가지이며, 씨가 두가지이고, 그릇이 두가지이며, 나무가 두가지, 저울이 두가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해석을 한다. 그리고 전자는 신천지이고, 후자는 기독교라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게 된다.
셋째는 시대마다 적용되는 구원관과 구원자가 다르다고 구별하는 많은 이단들의 방법인데 역시 신천지도 동일한 수법이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구원사역이 완전히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주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신천지는 이러한 구원관을 몇 개의 세대별로 구별하여<배도 - 멸망 - 구원>이라는 순서로 설명한다. 또 이러한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만희 교주를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성경에서 나타나는 용어로 적용시킨다. 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용어는 보혜사, 이긴자, 두 증인, 감람나무, 동방의 의인, 참 목자, 빛 등이다.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계시록의 환상만을 단지 기록한 인물로 간주하고, 이만희를 계시록의 실상을 계시받은 유일한 인물로 부각시키는 사이비 집단의 전용수법인 것이다.
2. 성경이 모두 비유인가?
‘성경적’이라는 단어가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성경 구절을 인용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인데, 성경을 인용한다고 하여도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여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단들은 모두 자신들이 성경적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을 잘못 인용하고 있거나 잘못 해석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이단들이 사용하는 ‘속이기 위한 성경해석’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평신도들도 갖기 위해서는 평소에 성경공부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신천지는 예수님이 항상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모든 성경이 비유로 되어있다고 하면서 아래 성경본문을 인용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다 비유라는 뜻이 아니며, 본문이 말하는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를 뜻한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일곱가지 비유가 나오며, 마태복음 13장의 뒷부분에는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마 13:53)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 모든 비유’는 성경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 13장에 있는 일곱가지 천국에 대한 비유를 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심지어 마태복음 13장의 내용도 모두 비유라고 말할 수 없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제자들에게 직접 해석하여 풀어주신다. 이 풀어주시는 내용도 비유란 말인가?
많은 이단들이 성경에 비밀이 비유로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 상당히 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주장을 할 것이다. 그들이 성경을 비유라고 주장하며, 성경이 비밀이 감추어진 책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성경이 기록된 내용과 달리 해석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교주나 목사만이 유일하게 성경의 비밀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들만이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위한 목적이다.
물론 신천지에서는 처음에는 이만희 교주의 이름과 정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신천지 성경센터는 신천지 출입금지 경고문이 부착될 정도로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감춘다. 또 신천지 성경센터에서 성경공부를 배우는 사람들의 반수 이상은 기존 신천지 교인으로서, 그들의 역할은 바람을 잡거나 감시를 하기 위한 것이다.
3. 계시와 비유
성경은 곧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보존하게 하셔서, 우리에게 전달하신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성경이 기록된 이유를 성경에서 살펴보자. 하나님은 왜 성경의 기자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사도요한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요 20:31). 즉 성경을 기록한 이유는 두 가지이며 첫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고 함이며 둘째, 그 이름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으며, 신약성경은 오신 메시야를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장차 심판하러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성경 66권 전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 모두가 그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얻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능히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하나님은 구약에서 선지자, 예언자, 사사, 제사장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였으며, 때로는 천사를 보내기도 하였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직접 인도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그 말씀을 전하셨으며, 그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곧 신약성경이다. 그래서 정통신학은 성경의 완전성과 성취성을 말하며 성경은 특별계시가 된다고 말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 1:1-2) 즉 성경은 그 안에 감추어진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비밀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계시’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뜻이다. 성경에서 ‘계시’(아포칼뤼프시스)는 “드러내다, 밝히다”는 뜻을 갖는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사실을 비밀로 감추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비밀을 알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다음 성경구절들은 ‘계시’가 알게 하려는 뜻이라는 내용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_아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_아 된 것이니” (롬 16:25-26)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 3:9-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 1:1)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엡 3:3-4)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롬 16:25-27) 그러나 성경의 기록과 달리, 이단들은 성경이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비유로 풀어야 하고, 짝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이단들이 이사야 34:16을 인용하여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짝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하여 왔지만, 이사야 34:16의 ‘짝’을 전체적으로 보면 ‘여호와의 책‘이 아니라 ‘짐승의 짝’이라는 것에 대해서 구태여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사 34:16) [공동번역] 야훼의 기록을 찾아내어 읽어보아라.<이런 모든 짐승들이>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리라. 그것들은 직접 야훼의 입에서 떨어진 분부를 받아 그의 입김으로 몰려온 것들이다.
[표준새번역] 주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이 짐승들 가운데서>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의 영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성경]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이 동물들 중에>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되도록 명령하셨고 성령께서 그것들을 함께 모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 신천지, 정명석집단등의 거의 대부분의 이단들은 신구약이 모두 짝이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하여 이사야서 34:16의 짐승의 짝이 성경의 짝이라고 가르치지만, 이사야 본문은 에돔 땅이 황폐하여져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되며, 레위기 11장에서 언급된 부정한 짐승들이 그 땅에서 짝을 이루며 살게 될 것이라는 심판적인 저주의 예언이다. 이사야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온전한 구약성경은 물론 신약성경이 없었으므로 그 구절을 인용하여 “구약과 신약에 짝이 있다”고 설명할 수가 없다.
또한 신천지는 성경이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근거로 아래 성경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3-15) 본문만 부분적으로 읽어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기록한 것처럼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마 13장 15절 바로 뒤 16절에는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18절부터 예수님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직접 풀어서 해석하여 주신다. 즉 성경은 비유로서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게 하고 듣게 하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 13:13-15 본문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9-10) 본문의 뜻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그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이사야 본문은 타락하고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비판하는 내용이며,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구원의 멧세지를 전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며,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셨던 분이시고, 암탉이 새끼를 날개 밑으로 모으려고 하는 것으로 비유한 적(마 23:37, 눅 13:34)도 있듯이, 하나님은 계속 이스라엘에게 선지자와 사사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사 6:9절 본문 앞 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았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숯불로 정결하게 하면서 그를 파송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은 오랫동안 반복하여 그 선지자와 사사들에게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패역함을 주지시켜 왔다. 이사야서 본문이 사도행전에서 바울에게도 인용되는데, 그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비판하면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밝히고 드러내시는 구원의 멧세지가 된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5-28) 그래서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기록된 책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13장 13-15절 뒤에 있는 34-35절을 보면,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언급되는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3:34-35) 이 “입을 열어서 비유로 말한 것”에 대해서 신천지는 시 78:2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신천지는 시 78:2을 정반대의 뜻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시 78:2-3) 즉 신천지는 시 78:2을 인용하면서 성경이 감추어진 비밀을 발표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신천지의 주장과 달리, 시 78:2의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숨은 뜻을 밝혀준다”고 번역하고 있다. 즉 “비밀한 말을 발표한다”는 것은 비밀을 감추인 그대로 발표한다는 것이 아니라, 곧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밝히고 드러낸다는 뜻이다. [공동번역] 내가 역사에서 교훈을 뽑아내어 그 숨은 뜻을 밝혀 주리라.
[표준새번역] 내가 입을 열어서 비유로 말하며, 숨겨진 옛 비밀을 밝혀 주겠다.
[현대인의성경] 내가 비유를 들어 옛날부터 감추어진 것을 말하겠다. ‘비유’라는 단어는 ‘파라볼레’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는데, ‘파라’는 ‘옆에’라는 뜻이며 ‘볼레’는 ‘발로’라는 단어의 파생어로서 ‘던지다, 놓다’라는 뜻으로 ‘옆에 던져놓다’는 의미이다. 즉 ‘파라볼레’라는 단어의 의미는 ‘평행, 병렬’(parable) 이라는 뜻으로, 그 원래의 개념은 “어떤 사물의 옆에 나란히 던져 놓음으로서 서로 비교하게 하여 그 의미를 깨닫게 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비유의 목적은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알게 하는 것에 있다.
특히 마 13장 성경본문에서는 4가지 밭에 대한 비유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일일이 풀어서 해석을 하여준다. 다시 말하여 성경은 비유를 감춘 것이 아니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친히 비유를 풀어서 해석한 것까지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0-12) 신천지는 너희(you)와 저희(they)를 구별하여, 마치 ‘너희’(you)를 ‘신천지’로 ‘저희’(they)를 '기독교'로 이원론적인 적용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책인가? 성경은 감추기 위한 비밀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자들은<누구든지>그 뜻을 깨닫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책(딤후 3:15)이다. 4가지 밭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좋은 밭’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마 13:23)라고 해석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직접 해석하여 준 것을 기록하지 않았거나, 아무도 그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였다면, 성경은 비유를 감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마13장 뒤에서 비유를 마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말씀을 깨달았다고 답한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마 13:51)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곧 성경이며, 사도들이 전한 ‘예수와 영과 복음’이 곧 기록된 성경이다. 이로써 성경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구원을 얻도록 하는 복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래서 성경은 완전하게 성취된 최종적인 계시가 된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사도바울이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나무라고 있을 때에, 그 기준은 ‘사도들이 전파하지 아니한’ 예수였으며 ‘너희의 받지 아니한’ 영과 복음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곧 성경이 사도들의 전한 기록이다. 이단들은 기록된 성경을 그대로 전하면 안되기 때문에, 성경에는 짝이 있다고 가르쳤고, 성경은 모두 비유로 되어있다고 가르쳐야만 그 성경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천지는 계시록을 가감하는 자를 저주하는 계시록 22:18-19의 경고가 보이지 않는가?
4. 결론
“무궁화는 꽃이다”
“우리나라의 국화는 무궁화이다”
이 두가지는 모두 사실을 말하는 명제다. 그렇다고 하여 “꽃은 우리나라의 국화이다”라는 삼단논법이 사실이 되지는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꽃이 모두 우리나라의 국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어처구니가 없는 이단들의 성경공부에 속아 넘어가고 세뇌가 되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이며, 둘째, 그들이 기독교라는 가면을 썼기 때문이며, 셋째, 반복적인 주입식 학습으로 세뇌를 시킨다는 것이다. 신천지에서는 이러한 주입식 학습을 위하여 자주 시험도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황당한 비유풀이에 미혹되는 성도들이 많다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반 성도들이 너무나 성경공부를 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는 곧 교회의 책임이며, 교회에서는 성경공부를 가르치지 않으며, 특히 정통신학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통신학 자체에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통신학은 구원을 가르치는 손가락이 될 것이며, 울타리가 되어진다. 성경적인 정통신학은 교회와 신앙의 표준이 되어지며, 양들이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고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신천지는 이러한 비유풀이를 통하여 이만희 교주를 보혜사, 대언자, 이긴 자, 두 증인, 두 감람나무, 사도 요한격, 참 목자, 사명자, 백마, 재림예수의 영을 받은 육체, 동방의 의인, 만유의 주재, 빛, 성육신으로 오신 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삼위일체의 세 보좌가 있는 몸, 생명나무, 새 예루살렘, 새 이름 등등.... 이라고 성경의 용어들을 적용시켜 신격화하여 부른다. 결론적으로 오직 이만희 교주를 통하여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이비 집단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성경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록한 책이며, 구원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66권이 말하는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멧세지를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 이 성경과 다른 내용을 가르치는 곳은 이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나니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느니라” (행 4:12) 출처/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19 [베드로후서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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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가 교인들을 미혹하는 방법은 가장 먼저 일대일의 큐티 혹은 성경공부를 제안하는 것이다. 친구나 친지, 혹은 같은 교회의 교인 등 지인이 찾아와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제안하거나 혹은 서점이나 기도원 등 우연을 가장하여 접촉하는 경우도 있다. 성경공부를 하게 되면, 일대일의 과정을 거쳐 상대방을 탐색한 후에 성경센터로 불리는 신학원으로 넘기게 된다. “목사(혹은 선교사, 전도사)가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유혹한다.
신천지의 성경공부 중에서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비유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물론 비유도 있고, 실제도 있으며, 그 분별의 기준은 이성적인 상식이 될 것이다. 이미 앞의 (1)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느 특정한 단어를 상식적,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신천지에서 가르치는 짜맞추는 비유풀이 공식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 이러한 비유풀이를 하기 위하여 그들은 ‘성경은 모두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고 가르치는 예비단계가 필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10장은 성도를 양이라고 비유하고 그 목자는 예수님으로 비유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성경본문으로 양의 다리는 무엇을 비유하고, 양의 눈은 무엇을 비유하며, 양의 털은 무엇을 비유한다고 주장하였을 때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천지에서는 ‘씨’는 말씀이고, ‘밭’은 사람의 마음 혹은 교회라고 한다. 만약 “나는 오늘 밭에서 씨를 뿌렸다”라는 구절이 있다면 신천지의 비유풀이 공식에 의하면 “나는 오늘 교회에서 말씀을 뿌렸다”는 내용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공부를 배운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을 감추어진 영적 비밀을 푸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실제적으로 신천지의 비유풀이는 <씨 = 말씀>, <밭 = 사람의 마음 혹은 교회>, <나무 = 사람>, <가지 = 제자>, <잎 = 전도자>, <열매 = 말씀과 성도>, <새 = 영>, <양식 = 말씀>, <누룩 = 교훈>, <그릇 = 사람의 마음>으로 비유풀이를 가르친다. 또 <하늘 = 장막 혹은 목자>, <땅 = 육체 혹은 성도>, <해 = 목자>, <달 = 전도자>, <별 = 성도>라고 가르치며, <바다 = 세상>, <어부 = 전도자>, <그물 = 말씀>, <고기 = 성도>, <배 = 교회>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풀이를 기억시키기 위하여 노래로 만들어 암송하게 하거나 시험을 보기도 한다.
신천지에서는 처음에 일대일로 만나서 성경관을 가르치게 된다. 그 장소는 학교 강의실이 될 수도 있고, 커피숍이 될 수도 있으며, 혹은 어느 특정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한명의 성도를 성경공부로 포섭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바람잡이 조연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경센터로 불리는 신학원으로 넘기게 되는데 처음 2개월 동안은 비유풀이를 집중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대표적인 비유풀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말하면 아래와 같이 배우면 그곳은 신천지라고 보면 된다.
1. 씨를 뿌리는 자의 비유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일곱 개가 나온다. 신천지에서 비유풀이를 할 때에 가장 먼저 가르치는 내용이 마태복음 13장이다. 소위 단어풀이를 가르치기 위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마 13장의 첫 비유인 본문은 4가지의 밭을 말하고 있다. (1) 길 가 (2) 흙이 얇은 돌밭 (3) 가시떨기 위 (4) 좋은 땅의 4가지인데 이 4가지 밭은 씨가 뿌려진 4가지 밭의 형태를 말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4가지 종류의 사람의 마음 상태를 뜻한다. 마 13장18-23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풀어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본문이 예수님의 말씀이므로 예수님의 해석이 가장 정답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한다. 예수님의 직접 해석하신 풀이를 들어보자
마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마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는 씨가 뿌려진 곳의 4가지 종류에 대한 비유를 풀어주시는데, 이 4가지 종류의 ‘밭’은 말씀을 수용하는 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르친다. 가장 중요한 결론에 해당되는 ‘좋은 땅’의 경우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우리들에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라는 멧세지이며, 이것은 ‘천국의 수용적 조건’으로서의 ‘말씀’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해석으로 볼 때에, ‘씨’는 ‘말씀’은 뜻하며, 4가지 종류의 ‘밭’은 ‘마음’을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신천지의 비유풀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단들도 처음부터 이상한 주장을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천지가 해석하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7가지의 천국비유를 모든 ‘씨’가 다 말씀이고 모든 ‘밭’이 다 사람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가 된다. 그것은 다분히 고의성과 조작 해석의 의도가 있으며, 마태복음 13장의 본문에 해당되는 첫 번째 비유의 구절만을 볼 때에, 본문에서 언급되는 ‘씨’는 ‘말씀’이며 ‘밭’은 ‘마음’이 옳다.
2.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 13: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로서 소위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이다. 이 성경본문 역시 예수님이 마 13:36 이하에서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비유를 해석하여 주므로 일부러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다른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본문에서 ‘밭’은 ‘마음’도 아니며 ‘교회’도 아니라, ‘세상’을 뜻한다고 예수님이 직접 해석하여 주셨다는 것은 중요하다. 신천지는 계속 ‘밭’이 ‘마음 혹은 교회’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해석은 예수님이 직접 풀어주신 해석과 다르며 ‘밭’은 ‘세상’이 되어야만 한다
성경에서 ‘씨’라는 단어는 문자적일 수도 있고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씨에 대한 경우를 생각나는대로 정리하여 보자면, 식물의 씨앗(창 1:11-12), 말씀(마 13:23), 생명(고전 15:36), 후손(요 7:42), 성령(요일 3:9), 하나님의 아들(마 13:38), 아주 작은 것(마 13:32)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비유를 어느 한가지 단어의 뜻만으로 비유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주장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또 ‘제 밭에 뿌린 사람’의 구절에서 ‘제 밭’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소유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이 ‘밭’은 ‘마음이나 교회’라고 해석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라 온 세상이 예수님의 소유이며, 또한 본문에서 ‘씨’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성도, 즉 ‘천국의 아들들’을 말하며, 씨는 추수 때까지 자라나서 비로소 곡식을 맺게 되는데, 그 씨는 처음부터 교회 안에서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13장에 대한 본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풀어주셨다.
마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마 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본문에서 씨는 말씀이 아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풀이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밭은 세상이라고 예수님이 설명하여 주셨으며, 좋은 씨와 가라지의 씨 모두 교회 안에서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뿌려지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교회를 위해서만 보내주신 것이 아니며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가라지에 대해서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본문에서 ‘잘 때’라고 하는 시간은 ‘아무도 모르게’라는 의미일 것이다. 원수는 사탄을 뜻하는 것이 당연하며, 곡식이 뿌려져 있는 밭에 가라지의 씨를 덧뿌리고 간 것이다. ‘덧 뿌리고 갔다’는 것은 이미 뿌린 씨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즉 두 개의 씨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고, 가라지의 씨는 원수에 의하여 몰래 덧뿌려진 것이다.
신천지는 구약의 예레미야 31장27절을 인용하면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의 두 종류의 씨가 뿌려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인용하면서 마태복음 13장의 좋은 씨와 가라지도 두 종류의 씨라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물론 신천지 자신들이 ‘사람의 씨’(하나님의 씨)고 기독교는 ‘짐승의 씨’라고 이원론적인 해석을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엉터리 해석으로서 구약 예레미야의 본문은 두 종류의 씨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천지는 성경을 본문의 뜻과 전혀 다르게 짜맞추는 엉터리 해석을 상습적으로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27-28)
첫째, 마 13장에서는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자의 아들들’이라고 언급되었는데, 예레미야 본문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라고 언급함으로 전혀 다르다.
둘째, 예레미야 본문은 마태복음 본문과 같이 예수님이 뿌린 씨와 원수가 뿌린 씨의 두 종류가 아니라, 둘 다 하나님이 뿌린 씨라고 말하므로 다르다.
셋째, 본문의 뜻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의 두 종류가 서로 다른 씨로 구별되어 이원론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을 둘 다 번성시켜준다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그 씨는 ‘후손, 자손’을 뜻하며,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 가문에서 사람(자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짐승(육축)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모두 동일한 회복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는 의미이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동번역] 앞으로 이런 날이 오리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이나 짐승 할 것 없이 씨를 뿌려 농사짓듯이 불어나게 하리라. 이전에는 자나깨나 이 백성을 뽑고 부수고 허물고 멸하고 해치기만 하였으나, 그만큼 이제는 눈을 똑바로 뜨고 세우며 심어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현대인의성경]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땅에 사람과 짐승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게 할 날이 올 것이다. 내가 그들을 철저하게 뽑고 파괴하며 허물고 엎어 버리며 멸망시키고 재앙으로 쳤던 것처럼 앞으로는 철저하게 그들을 세우고 심을 것이다.
본문에서 ‘씨를 뿌리다’는 동사의 뜻은 ‘번성하게 하다, 퍼뜨리다’는 뜻이며, 신천지와 같이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구별되어 존재한다는 이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본문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엉터리 해석이다. 이스라엘은 원래 농경업을 하는 유목민이었다. 그들에게 축복은 사람의 자손과 함께 육축도 번성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 표현이 상당히 많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슥 2:4)
“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으로 많게 하되 생육이 중다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접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36:11)
예레미야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전혀 다른 내용이다. 또한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며, 즉 하나님나라(천국)의 ‘선택과 유기’를 뜻한다.
(1) 하나님은 세상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의인과 불의한 자에 대해서 공존하도록 허용하신다.
(2) 하나님은 종말적으로 의인을 구원하시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포기하신 땅이 아니라 악과 불의가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가라지는 독보리의 일종으로서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비슷하여 실제로 이삭이 열리기 전까지는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성경은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지를 미리 뽑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곡이 함께 뽑힐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 의미는 첫째, 늦게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까지 잘못 뽑히게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둘째,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권한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으며 셋째, 심판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은 심판은 예수님의 주권이라는 뜻이며, 현세에서 직접적인 심판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유기’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악인을 유기하거나 방치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Justice)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악인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그대로 유기하신다.
제자들은 예수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제안한 것이며, 예수님은 제자들이 직접 뽑겠다는 것을 그대로 두라고 한 것이다. 성경은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라고 말한다.
신천지는 일반 교회에 그들의 교인들을 파송하여 교인들을 미혹하여 빼가는 반윤리적이며 반도덕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데, 이들을 ‘추수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문에서 ‘추수꾼’은 마지막날 심판을 하는 ‘천사’를 뜻한다. 또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 신천지의 추수꾼들이야말로 마지막날 심판을 받을 악한 자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3. 예수님의 비유 -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 13:31-33)
1) 겨자씨의 비유 :
본문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에 대한 세 번째 비유 역시 씨에 대한 비유이다. 본문에서 ‘씨’는 신천지와 같이 ‘말씀’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라는 의미로 비유되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어떤 종류의 겨자는 3m까지 성장한다고 한다. 즉 겨자씨의 비유는 씨가 무엇을 비유하였느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씨보다 아주 작은 씨라는 것이며, 그것이 매우 크게 성장한다는 하나님나라(천국)의 확장성의 개념으로 비유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관용구적인 속담에서 “겨자씨보다 작다”는 의미는 아주 작은 것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특히 신천지는 성경본문이 주는 멧세지에는 관심이 없고, ‘씨’가 무엇을 뜻하고, ‘나무’가 무엇을 비유하고, ‘새’가 무엇을 비유하며, ‘가지’가 무엇을 비유하느냐는 단어풀이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목적은 씨는 ‘말씀’으로, 나무를 ‘사람’으로 비유풀이를 하고, 새를 ‘영’으로, 가지를 ‘전도자’로 비유하며, 앞 구절 비유의 씨가 두 종류가 있다는 경우와 같이, 나무에도 두 종류의 나무가 있다는 결론으로 유도하는데, 기독교의 목자로 비유되는 나무는 사탄의 영이 모이는 곳이고, 이만희로 비유되는 나무는 선한 영이 모이는 진리의 나무라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만들고 있다. 결국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나무)에게 영(새)이 모여든다”라는 황당한 결과로 짜 맞추려는 해석을 만드는 것이다. 신천지가 나무를 사람으로, 새를 영으로 비유풀이를 유도하는 성경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6)
마태복음의 이 본문에서 과연 ‘새’가 ‘영’이라는 뜻일까? 본문은 '새=영'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는 형태를 표현한 것이다. 또 신천지는 아래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나무가 손바닥을 친다고 하였으므로 나무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웃을 수 없는 비유풀이이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사 55:12)
그렇다면 산도 노래를 하니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신천지는 산이 교회라고 비유풀이를 한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비유풀이를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천지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나무라고 비유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와 감람나무하고 비유한 것은 ‘사람=나무’라는 등식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며,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로 비유한 이유는 그 나무의 속성 중에서 포도열매와 감람유라는 결실을 얻기 위한 결과적인 개념으로 비유하기 위함이다. 마치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였으니 사람은 모두 개로 비유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구약성경에는 크게 자란 나무와 그 나무의 가지에 새가 깃든다는 구절이 많이 있다. 구약성경 구절은(단 4:11) 일차적으로 큰 제국과 그 제국에 모여드는 많은 나라들과 민족들을 상징하지만, 종말적으로 천국에 비유되었을 때에는 당연히 메시야 왕국과 그 왕국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특히 에스겔 17장의 본문은 메시야왕국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겔 17:23)
‘깃들이느니라’라는 단어는 ‘카타스케노오’로서 ‘장막’을 가리키는 단어 ‘스케노마’에서 유래되었다. ‘카타’라는 단어는 ‘아래, 밑’을 뜻하며, ‘스케노오’는 ‘살다, 거주하다’로서 “그 아래에서 산다”는 두 단어의 합성어가 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크고 온전한 장막”(히 9:11)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누룩의 비유 :
본문에서 ‘여자’가 누구를 의미하며 ‘누룩’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선문선답식의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 신천지는 ‘여자’를 ‘목자’라고 비유풀이 하는데 이런 식의 비유풀이는 완전히 자의적이며 임의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왜 여자를 목자로 비유하는가? 만약 성경에서 ‘여자’라는 단어를 모두 목자로 비유시켜 해석한다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다. 또한 신천지에서는 ‘누룩’을 ‘심령을 변화시키는 교훈과 말씀’이라고 비유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데”라고 말했을 때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훈과 말씀이 없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되는가? 신천지의 비유풀이 목적은 이만희 교주가 가루 서말에 말씀을 넣었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조작적인 해석으로서, 사이비집단에서 교주를 신격화시키는 전형적인 방법일 뿐이다.
성경에서 누룩은 ‘팽창한다, 확장시킨다’는 개념으로서, 좋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나쁜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은 “옳지 않은 사상이 오염되고 확장하는 것”을 뜻하며, 누가 보아도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누룩은 단지 반죽을 크게 팽창시킨다는 이스트의 개념으로서, 앞에서 기록한 아주 작은 겨자씨에서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비유와 동일한 의미로 보는 ‘확장적인 천국관’이 옳은 해석이 된다.
신천지에서는 ‘가루 서말’이 ‘세 사람’이라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만, ‘가루 서말’ 역시 큰 의미는 갖지 않는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로 비유한 것에 반하여, 가루 서말은 약 22-23리터 정도가 되는 일반적인 가정에서 하루에 필요한 빵을 만들 수 있는 분량으로서, 한 가족 단위의 하루 세끼 분량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라고 말하므로서,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사례를 예로 든 것이다.
신천지에서는 이 ‘가루 서말’을 ‘세 사람’으로 해석하며, 계 6:6의 ‘보리 석되’와 관련시켜서 해석한다. 실제로 고등교육 과정에서는 계 6:6의 ‘밀 한되’는 이만희 교주라고 해석하고, ‘보리 석되’는 신천지의 초기 지파장 세 사람을 뜻한다고 해석하였는데, 이 지파장 중에서 윤모씨라고 하는 지파장 한명이 죽자, ‘보리 석되‘는 ’소수의 사람‘ 혹은 ’씨뿌리는 자들‘로 바꾸었다. 이런 해석은 결론적으로 이만희와 초기 신천지 지파장을 성경적인 인물로 신격화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무도 공감할 수도 없는 비유풀이일 뿐이다. 이만희에게 미혹된 신천지 교인들이 정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생각하여 보라, 가루 서말을 세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성경은 겨자씨와 가루 서말의 누룩의 두 가지로 비유하였을까? 마태복음에서 전자의 겨자씨의 경우에 씨를 뿌린 사람은 대표단수인 ‘a man’이 되고, 반죽에 누룩을 넣은 여자는 대표단수인 ‘a woman’으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농사를 짓는 일은 남자의 역할이고, 요리를 하는 일은 여자라는 관점으로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두 가지 비유의 평행구조를 만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비유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된다는 관점이 가장 중요한 멧세지가 되며, 이 비유는 남자와 여자가 하고 있는 일상적이며 현실적인 사건을 통하여 가능한 많은 청중에게 이해를 시키며 호소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진다.
카슨이라고 하는 학자는 이 두 가지 비유에 대해서 전자의 나무 비유는 외향적으로 성장하는 비유를 말하고, 후자의 반죽 비유는 내면적으로 성장하는 비유를 묘사한다고 하였는데, 그 견해가 매우 동감을 준다.
4. 그릇에 대한 비유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 64:8)
그릇에 대한 비유도 신천지는 이상한 의도와 고의적인 목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신천지를 ‘하나님의 그릇’이라고 해석하여 ‘진리를 담고 전하는 사람’으로 보며, 기독교를 ‘사단의 그릇’으로 해석하여 ‘비진리를 담고 전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사야 64:8, 롬 9:20-21에서 언급하는 멧세지는 그릇이 무엇을 담느냐는 내용도 아니고, 두 가지의 그릇으로 구별하자는 것도 아니며,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뜻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역사하시는 주권적인 통치와 권세를 상징한다. 귀하게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은 하나님과 사탄의 그릇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고 사용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0-21)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렘 18:3-6)
신천지는 모든 비유풀이의 목적이 요한계시록을 자신들이 뜻하는대로 해석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즉 계시록의 내용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 영과 육의 구도, 진리와 비진리의 구도, 선과 악의 구도로 만들어서, 신천지를 전자로 조작하고, 기독교를 후자로 조작하기 위한 목적인 것이며, 신천지와 관계되는 인물들을 성경의 인물로 조작하기 위한 초기 예비단계가 바로 비유풀이 성경공부이다. 결과적으로 그 하나님의 보좌에 이만희 교주를 앉히기 위함인 목적이며, 그러한 비유풀이에 의한 계시록의 해석을 ‘실상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록을 쓴 사도요한은 ‘환상계시’만 받고 기록하였으며, 이만희교주에 의하여 실상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신천지는 육은 영을 담기위한 그릇이라고 가르친다. 그 결론적인 주장은 이만희라는 육체에 재림예수의 영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신천지 열두지파장에게는 하늘의 열두사도의 영이 들어오고, 신천지교인이 144,000명이 되면 계시록에 있는 144000명의 영이 들어와서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천지가 주장하는 부활의 개념인데, 이러한 교리를 만들기 위하여 그릇에 대한 비유풀이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토기장이와 질그릇에 대한 성경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강조하는 내용으로서, 신천지가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키거나 변질시키는 단어 비유플이에 지나지 않는다.
신천지에 미혹된 교인들은 신천지의 비유풀이가 어떻게 이렇게 앞뒤로 딱 들어 맞추어지는가? 하고 흥미를 갖고 성경공부를 하게 된다. 이 결과를 얻기 위하여 신천지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는데, 현관에 신천지 출입금지 표어를 입구에 붙이기도 하고, 누가 혹시 “이곳이 신천지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신천지는 이단이지요. 이곳은 신천지가 아니라 성경대로 가르치는 곳입니다”라고 답변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장애인을 위하여 강의를 요약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여 강의를 듣고 그 요점을 요약하게 하는 일까지 하고 있으며, 영어공부나 토익공부 카페를 만들어 성경을 영어로 가르치는 행위도 발견된다. 심지어는 교단과 교파가 많은 장로교라는 명칭으로 위장교회를 운영하는데 전국적으로 백 여곳이 넘는다.
이러한 비유풀이식의 성경해석은 신천지, 정명석집단, 하나님의 교회등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평상시에 성경공부와 정통신학 공부를 가르쳐야만 하며, 이단에 대한 세미나나 예방대책을 성도들에게 사전에 주지시켜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