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서른 세 살 직장인 남자입니다.
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하다가 아직은 이른 새벽,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적어봅니다.
불과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에 이별을 하고 왔습니다.
막상 그 순간에는 실감이 나질 않았는데, 헤어지고 혼자 남겨지자 기분이 이상하네요.
만난지 고작 네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직장 내 선후배 관계라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 전이긴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서로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개인적으로도 친구같이 편안하고 활달한 성격에 책임감도 강한 그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2월 초쯤 고백하고 나서 일주일 후, 그녀도 OK를 하여
서른 세 살의 미련하고도 가슴설레는 연애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일매일이 꿈만 같았습니다.
아마도 최근 몇 년동안 가장 행복했던 2월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서른 세 살의 연애 감정이라 덤덤하고 건조할 줄만 알았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설레는 기분과 하루종일 누군가 곁에 있다는 행복감,
출근 길에 카톡을 주고 받을 때면 드라마 도깨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추운 날에 주말 아침 일찍 만나 밤 늦게까지 놀이공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먼 거리도 손 잡고 함께 떠들면서 걷다보면 시간가는 줄도 몰랐고,
맛있는 음식들을 찾아다니며 먹으러 다니고,
운동을 함께 하기도 하고,
노래방에 가서 세레나데를 불러주기도 하고
매주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얘기하며 즐거운 상상을 하던
여느 이십대 초반의 풋풋한 연애감정과 다르지 않던 그때였네요.
그녀는 술을 아니, 술자리를 좋아했습니다.
사귀기로 한 날 저한테 물어봤어요. 자기는 술자리가 2~3번이나 있는데 만나도 괜찮겠느냐고.
술을 거의 잘 안마시는 저로서는 사실 조금 움찔했지만,
그녀에게 푹 빠져있던 저로서는 당연히 괜찮다고 얘기했죠.
실제로 사귀고나서 그녀는 일주일에 평균 2번 이상의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회식자리 외에도 동기모임, 전 근무지 사람들 모임 등등 그녀의 체력과 인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조금 내키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
그렇지만 전혀 티내지 않았어요. 술 취해서 통화를 해도 귀엽게만 보였고 너그럽게 넘어갔지요.
그렇게 3월 중순이 지나고 말쯤 되자, 좀 서운했던 감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연애 초기부터 연락을 조금 덜 하는 편이었긴 했지만,
그 무렵부터는 카톡을 주고받는 횟수도 매우 적고
아침인사, 점심 맛있게 먹으라는 등의 짧고, 형식적인 내용의 카톡만 오가고 있었어요.
서운하긴 했어도 여전히 많이 좋아하고 있는 저였기에,
긴 장문의 글을 조심스럽게 써서 그녀에게 보냈어요.
고맙게도 그녀는 자신이 너무 미안하다며 한동안은 저에게 매우 신경쓰는 듯 했지만
시간이 좀더 지나자 다시 뜸해지는 걸 느꼈어요.
잔소리처럼 느껴질까봐, 그런 간섭과 구속에 그녀가 멀리 떠나버리기라도 할까봐,
속으로만 삭혀오고 혼자서 끙끙 앓던 날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만나기만 하면 서운한 감정들은 싹 사라지고
즐거운 시간들이었어요... 아무리 봐도 그녀도 그 순간에는 비슷한 감정인듯 즐거워 보였고.
함께 며칠간의 여행도 다녀오고,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지만
서운한 감정도 조금씩 무뎌지며 참아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진지한 대화를 어려워하던 그녀가
어제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씩 낯선 얘기들을 꺼냈습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최근들어서 나의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좋아했고 사랑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애써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그 단점들을 얘기해달라고. 고치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평소에도 자기가 이미 몇번 말했을거라고 해서
내가 둔해서 잘 몰랐으니 지금 이자리에서 얘기해주면 꼭 고치겠다고. 라고 말했더니
생각을 좀더 정리하고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하더니 내가 계속 설득하자
음식을 먹을때 입가에 음식이 묻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고 하네요.
제가 조금 그런 편이었던 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치겠다고 얘기했죠.
그렇지만 그거 외에도 더 있다고.
이별의 느낌을 느껴서였는지 순간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평소 서로의 감정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잘 안하던 그녀가 입을 열기 시작했으니
내친김에 감정에 관한 얘기를 계속했습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서로 못만나도 그리 아쉬워하지 않고
보고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다. 내가 요즘 느끼는 서운한 감정이 맞는 것이냐고.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속에서 제가 어렵게 말했습니다. 그럼 우리.. 이제 그만 만날까?
다시 침묵....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제 말에 다시 침묵..
오랜 침묵끝에,
..미안... 이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희망이라는 바위를 들고 버티다가 순간 떨어뜨린 느낌이랄까,
철렁 하는 느낌과 함께 멍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우리는 그 후로도 한참동안 얘기했습니다.
불문율처럼 하지 않았던 지나간 과거 사귀던 사람들 얘기,
연애 초창기의 좋았던 감정들,
앞으로 직장에서 어떻게 지내야할지 등등
서로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어서,
지나가도 꼭 인사라도 하자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할때도 청첩장도 보내라고,
바보같은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새벽에 나가봐야 하는 그녀였기에 그녀를 옆에 재우고, 저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잠 못 이루는 내게 너무 미안해하던 그녀는 어느새 곤히 잠들어버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자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안아주며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는 올 수 없을 그녀의 자취방을 뒤로한 채 사무실로 왔습니다.
멍한 기분이 아직도 그대로네요.
잠을 한숨 자고나면 좀 나아질까요, 아마도 자고 일어나고나면 느껴질 상실감에
훌쩍대며 울어버릴 것만 같네요. 서른 세 살이나 먹고 말이에요.
시작할때도 꿈을 꾸는 것 같았는데, 이별할 때의 기분도 꼭 그렇습니다.
멍한 이 기분에 잠을 자고 일어나면 행복했던 그때로 깨어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