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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노비폐지에 대한 생각.jpg

콜로라도 |2017.06.15 02:15
조회 4,306 |추천 7

 

 정조임금

 

 

홍재전서 


노비인((奴婢引) 


정조 이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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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의 신첩 제도가 바로 노비의 시작인데, 


그 역이 자기 한 몸에 한정되어 보수를 주고 고용하는 정도였다. 


기자가 우리나라로 와서 팔조지교를 선포했을 때 도둑질한 자를 


노비로 삼는다고 했고, 


삼한으로부터 시작되어 역대로 전해 오는 법으로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관에 속한 자는 공천이라 하고 


사가에 속한 자는 사천이라 하여 


관에 직책을 두어 그것에 관한 일을 다스리고 


공세를 정하여 징수했던 것이다.



(중략)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존재가 노비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기자의 팔조지교는 그것이 악을 징계하자는 일시적 조처에 불과했던 것인데, 


역대로 그것을 변혁하지 않고 그대로 인습해 왔기 때문에 대를 물려 가면서 


남의 천대와 멸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식구와 나이를 헤아려서 사고팔고 하니 짐승이나 다를 바 없고,


아들 손자로 전해 가면서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지니 토지나 매한가지며, 


오랑캐 비슷하게 반드시 어미를 우선하고, 


아비 성을 따르지 않고 노(奴)자로 성을 삼는다.


양반과는 혼인도 할 수가 없고 이웃에서도 사람 축에 끼워 주지 않으니, 


높고 두꺼운 하늘과 땅 사이에 갈 곳 없는 자와 같다. 


아!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그렇게 만들 이치가 있을 것인가. 


약간의 인정을 베푼 열성조의 사랑으로 인해 비록 몸은 보존하고 


살 곳 정해 살고는 있지만 그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은 한이 없다.


내가 국정에 바쁜 여가를 이용하여 


두 쪽 다 똑같이 편리한 방법이 없을까를 고심하다가, 


우선 노비 규정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대신 고용의 법을 만들어서


대물림은 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한하도록 조처를 취하고, 


그에 관한 방략을 먼저 정하여 대금을 주고 드나들게 하는 데도 


다 일정한 수를 제한하도록 하는 것으로 


뜻을 같이한 한두 신하들과 함께 그 영을 발표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오로지 명분만을 숭상하는 편인데, 


만약 양민과 천민을 한데 섞어서 반벌이 분명하지 못할 경우 


상대를 무시하고 덤빌 자가 틀림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어미는 남의 부림을 받는데 


자식은 도리어 주인에게 항거한다거나, 


작은 역과 보에 부릴 하인이 없다거나, 


궁한 선비 집에 땔감을 마련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 가지 폐단은 없어지지만 


한 가지 폐단이 다시 생길 염려가 있으므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추쇄관을 혁파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늘의 명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단지 작은 절목 내의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이 평민과 섞여 사는 것과 본분을 지키는 일이 


어그러지지 않고 병행될 수만 있다면 단연코 결행할 것이다!


지금 공의 주고를 인하여 이와 같이 내 뜻을 약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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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정조 임금의 저서 홍재전서 노비인(노비에 대한 생각을 밝힘.) 中

 

 

정조대왕은 우선 관노비부터 해방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사노비까지 해방시킬 구상을 했지만


급작스럽게 붕어하시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순조임금이 등극하고 정조의 복심인 윤행임이 승정원 도승지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정조임금이 남긴 유지라며 1801년 정순왕후의 재가를 받아 관노비를 해방시킨다.

 

사노비는 양반들의 결사반대로 흐지부지 되었다가 1895년 갑오경장때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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