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잘 지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이제 너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지막 말을 남겨.
연애라고는 경험도 전무하고 관심도 없고. 고백을 받아도 그걸 감당하지 못해서 늘 거절만 해왔던 나. 사실 여느 아이들처럼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설렘을 덥석 잡아물고 성급하게 연애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어. 그래서 굳이 연애를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학생 연애는 유치할 거라고만 생각해 쭉 피해왔지. 그 흔한 짝사랑 한 번 안 해봤어. 이성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거든. 신기할 정도로. 그래서 난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긴 한건가,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렇게 17년을 흔히 말하는 모태솔로로 지냈어. 막연하게 고등학교 3년도 지난 시간과 같이 지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 때, 너를 만났어.
너는, 솔직히 말해 잘생겼었어. 사실 내 취향대로 생긴 건 아니었지만, 넌 보편적으로 잘생긴 아이였지. 키도 180이었고. 친하게 지냈고, 실제로 잘생겼다고 생각도 했지만 너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어.
네가 날 좋아하기 시작하기 전까진.
사실 잘생긴 애들은 소위 말하는 여미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어. 실제로 내 주위의 많은 남자애들이 그랬고. 그래서 나한테 장난치고 자꾸 눈이 마주치고 그러는 거, 그냥 다른 남자애들처럼 여미짓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별 생각없이 가볍게 대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넌 나한테만 장난을 쳤고, 내 교실만 찾아왔고, 내 머리만 쓰다듬더라.
그러다 네가 친구들에게 내 얘기를 많이 한다는 걸 듣게 됐어. 시도 때도 없이 내가 귀엽다 하고, 보고싶다 하고, 예쁘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지. 하지만 정작 내 앞에서는 그 얼굴 가득히 수줍음만을 담고, 예쁘다 귀엽다는 말 한마디 못했어, 넌.
그래서 네가 눈에 들어왔던 걸지도 몰라.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도 넌 내 시야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어. 어딜 가도, 어딜 봐도 넌 늘 내 주변에 있더라. 그냥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나를 바라보는 네 눈을 마주쳤어. 네가 날 바라보는게 느껴졌지, 항상. 쉬는시간이면 넌 늘 나를 찾아왔고, 수시로 먹을 것을 내게 갖다주었어. 내가 한 말들을 하나하나 기억했고 내게 일어난 일들을 제일 먼저 알고 있더라.
행복했어. 사랑받는다는게 그렇게 행복한 일인지 몰랐어. 누군가에게 1순위가 된다는게, 항상 누군가의 관심범위에 있는다는게 그렇게 설레는 일인지 처음 알았어. 처음에는 친구들의 놀림에 극구 부인하던 나도 점점 마음을 열었고, 이젠 나를 바라보던 너를 마주보고 서게 되었지.
특별했던 날. 너와 내가 학교가 아닌 곳에서 처음 만났던 날. 너는 내게 수줍게 고백을 했고,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바보같은 말과 함께 난 네게 기댔지. 그렇게 너와 나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어.
처음이었어. 모든게. 특별한 사이가 되자는 말에 그렇게 하자고 대답하고 싶었던 거, 네가 처음이었어. 함께 있으면 세상 모든게 아름다워 보이는 기분, 너와 있으면서 처음 느꼈어. 그렇게 꼭 손을 잡아본 사람, 온 마음 다해 꼭 껴안은 사람, 내 입술을 내어준 사람 모두 네가 처음이었어. 그래, 첫사랑이었지.
나를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렸던 너. 짧은 치마 바지 하나 못 입게 하고 남자인 친구들과 이야기만 해도 그렇게 질투를 하던 너. 그렇게 질투하고 나면 너무 많이 좋아해서 질투도 많은가보다고, 이해해달라고 내 기분을 풀어주던 너.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정말 소중한 것을 다루듯 살금살금 날 쓰다듬던 너. 글쓰기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나를 위해 편지쓰기에 재미를 붙였다던 너. 처음에는 너에 대한 내 감정이, 나를 이렇게나 좋아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고마움을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했었는데, 아니더라. 나 진짜 너 많이 좋아하고 있었어.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우리의 마지막. 그렇게 예뻤던 너고, 그렇게 날 좋아해줬던 넌데. 어떻게 넌 그렇게 날 믿지 못했던 걸까. 나에게 단 한마디도 없이 그렇게 쉽게 날 정리할 수 있었던 걸까. 처음 하루이틀은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어. 그 다음에는 온 세상이 너였고, 그 다음에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어. 수없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네 사진을 보면, 페북에 활동중인 네 이름을 마주치면, 정성껏 쌓아왔던 "괜찮아"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지.
그렇게 시간이 흘렀어. 절대로 괜찮아지지 않을줄 알았는데, 역시 시간이 약이라고. 결국엔 다 괜찮아지더라. 얼마전 친구랑 같이 네가 준 편지들이랑 같이 찍은 사진들 다 조각조각 찢어서 버렸어. 반지도 가위로 잘라지더라. 두동강내서 같이 버렸어. 이제 진짜 너를 보내줄 준비가 됐나봐.
솔직히, 모든 오해가 풀려서 네가 나한테 죽을만큼 미안해했으면 좋겠어. 죽을만큼 힘들어했으면 좋겠고, 날 놓친걸 후회했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지난시간, 너 진짜 나한테 잘해줬어. 덕분에 행복했고, 즐거웠어. 그러니까 이번 한번만 용서해줄게.
너와 함께한 백일 남짓한 시간, 좋은 꿈이었다고 생각할게. 꿈길은 아름다웠고, 향기로웠고. 이젠 깰 시간이 됐나봐. 꿈을 깨고 난 얼마동안은 꿈 내용이 머리에서 맴돌지만, 시간이 지나면 꿈을 꿨는지조차 모르게 되잖아. 이제 그 때가 온 것 같아. 한꺼풀씩 네가 벗겨져 갔고, 이젠 그 마지막 조각만이 남았어.
자, 그 마지막 조각까지 바람에 띄웠어. 잘 가. 이제 진짜 너가 다 지워졌어. 홀가분해.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때는 각자 더 행복한 사랑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안녕
잘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