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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함께 어두운 산길을 걷는 것과 같다.

Elloi |2017.11.04 00:38
조회 368 |추천 2
오늘은 오전 내내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3시반쯤 잠들었는데, 6시반에 일어나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뒤 샤워를 했다.그리고 오전 내내 에너지를 쓰는 일을 하게 되니 뭔가를 먹기는 해야할 것 같아서이것저것 과일을 넣고 갈아서 마셨다.그것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동생이 끓여 둔 떡국 국물만 반 국자 떠서 후루룩 마셨다.음식 냄새를 여전히 몸이 거부하지만, 그래도 뱃속이 조금은 따뜻해진 것 같아서 만족했다.
오늘은 오전 종일 일이 많았다.운전을 할까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고민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한다.비가 오기에 조금 길을 걷고 싶어졌다.여유 있게 집에서 나와 두세 정거장 쯤을 걸었다.먹은 것이 거의 없어서 몸에서 열량을 끌어다 쓰려는지 비가 와서 기온이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났다.조금은 기분이 상쾌해졌다.
어제까지는 그렇게 마음이 힘든 하루를 보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어제까지는 혹시 그가 날 떠난 것을 후회하는 마음에 톡을 보내진 않았을까 싶어핸드폰을 하루에 50번쯤 들여다 본 것 같은데,오늘은 그야말로 일 때문에 오는 연락을 제외하고,그에게 연락이 왔을까 하는 헛된 기대에 부풀어 톡을 보는 일이 10번도 없었다.이제는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걸 스스로 받아들인 것일까.아니면 그냥 단순히 오늘 일이 중요하고 바빴던 탓일까.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볍게 걸어볼까 하고 걷는데몸 상태가 이상했다.눈 앞이 핑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유난히 숨이 찬 것 같기도 하고,물 먹은 빨래마냥 몸이 축축 쳐졌다.집까지 40여 분을 걸으면서 그냥 4일 동안 먹은 것이 거의 없으니 그러리라, 하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 잠을 좀 자둔 후 운동을 하고 내일 일할 거리를 준비할까,아니면 이 기아 상태를 좀 해소시켜줄까 잠시 고민을 했다.어차피 먹히지도 않는거 먹고 잠드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아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고 잠을 청했다.
2시간쯤 잠이 든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원래도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 성욕이 약간 끓는 편이긴 했으나'평소엔 이렇게 심하진 않은데' 라고 생각할 정도로 심했다.한숨을 쉬며 '이 와중에도 그 생각이 나기는 하냐'라고 생각했다.혼자 해결을 해보려다 잘 안되서 관두자 하고는 물이라도 뿌리려고 화장실로 갔다.피가 보였다. 그날이 시작됐다.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그렇게 3일을 죽을 것 같이 힘들어했는데, 그래도 오는 것은 오는구나 싶었다.단순한 '호르몬의 장난'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내가 오늘 컨디션이 너무 저조했던 것도,이 와중에 그 생각이 나냐며 질책을 했던 그 들끓던 욕구도 바로 이 호르몬의 장난이었다.나는 나의 우주를 잃었지만, 그 우주를 잃어도 세상은 돌아간다는걸 새삼 깨닫는다.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그날을 겪고 있는 내 몸이 거의 아무 것도 못먹는 상태까지 견디기는 어려울 것 같아그 상태라도 해소해주려고 먹을 것을 찾았다.사과 몇조각에 요거트라도 먹으려고 요거트를 찾았는데 없었다.문득, 다 먹었으니까 만들어 둔 뒤 거르고 저녁에나 먹을 수 있어라고 아침에 나가기 전에 들었던 동생의 말이 떠오른다.대체할 것이 뭐가 있을까 잠시 고민한 후,사과 작은 3조각과 구운 아몬드 3알, 그리고 우유를 반컵 정도 마셨다.그동안 먹은 것이 너무 없어 줄어들 대로 줄어든 내 위는 그 정도로도 포만감을 느꼈다.
그리고 산에 올랐다.평소에는 일이 늦은 오후에 있거나 집에서 처리가 가능한 일들이기에 낮에 가지만오늘은 조금 늦은 시간에 나가서 어둑어둑했다.
컨디션 자체가 저조하니 힘든 산행이었다.페이스를 유지하며 계속 걸을까, 아니면 천천히 목표한 만큼을 걸을까 잠시 고민했다.천천히 목표한 만큼을 걷기로 한다.산은 해가 빨리 진다고 했던가,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아야 길이 보일 정도로 어둡기도 했고,컨디션이 난조인 상태에서 원래의 페이스를 유지했다가는 중요하게 처리해야할 내일의 일들이 떠올랐던 탓이다.
어둑어둑한 산길에는 산을 오르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없었다.(술 먹고 새벽 3시에 돌아다녀도 안전한, 치안이 매우 괜찮은 동네에 살고 있음에 매우 감사한다.)그저 오로지 나 혼자,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었다.아는 길이라 발 가는대로 걷고는 있지만 주변이 어두우니 다르게 보였다.
산길은 가끔 여러 갈래의 길이 나온다.올라갈 때는 원래의 아는 길 대로 따라서 갔다.그리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내려갈 때 다른 길을 들면 어떡하지.'
그러다 몸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펜스를 잡고 멈추고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나무 사이사이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몇년을 살아도 몰랐는데, 참 예뻤다.그리고 잠시 나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서울에서도 꽤 잘 사는 편인 집에서 자랐다.동생과 다르게 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고 공부 외에도 이것저것 잘했던 나는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고, 그만큼 투자도 많이 받았다.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그것을 다 잘하려면 피나는 노력을 해야해서였을까나는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부모님도 나에게 그런 모습을 요구했다.그것이 옳은 방법이라 생각하며 32년을 살았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나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옆으로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삶.길을 가다가도 앞 사람을 제치고 내가 앞서 가야만 직성이 풀리고산을 오르다가도 앞에 사람이 있으면 기어코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걸어서 제쳐야하고그것을 세는 것을 재미로 삼아 사는 삶.이 경쟁의 시대에서 내가 살아남고 재미를 느끼는 방법은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다.이것은 내가 공부를 하고 일을 할 때는 참 좋았다.성적은 늘 좋았고, 좋은 학교들을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하고 졸업했고 좋은 직장도 구했다.더 나은 기회가 있어 직장을 그만뒀고 더 좋은 일을 구했다.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전향을 해도 서울의 이 동네에서 이만큼 유지하고 살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나는 그만큼 옆을 돌아보지도, 나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았다.그저 고장난 폭주기관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도 못 볼 정도로.내가 누군가와 경쟁을 해서 이기고 제쳐가며 나의 사회적 포지션은 올라가는데나는 그만큼 공허했고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나의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이 공허함이 남자들에겐 매력이었던걸까, 아니면 그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다는 사랑에 빠진 남자들 특유의 자신감이었을까,남자들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나를 가지고 싶어했고 나는 그중에 맘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만나왔다.나도 한때는 그들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결국 그렇게 못함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은 결국 이별로 이끌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는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그리고 새삼 내가 숫자와 목표에 대한 강박이 너무 심한 것을 깨닫는다.'그래, 오늘은 몸이 안좋으니까, 주변에 사람도 없는데 너무 강박 가지지말고편안하게 오르자' 하고는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오르니 보이는 것이 많았다.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 숲 속을 돌아다니는 아기고양이,힘들 때 쉬어가라고 만들어놓은 벤치.이곳에 오래 살며 한두번을 와본 것이 아니건만, 약간은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목표한 곳에 도착했다.천천히 걷다보니 목표한 곳 이상 더 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너무나 캄캄한 길을 보고 씩 웃으며 '그래, 오늘은 돌아가자.' 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발이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걸어갔으면 되었을 것을,어두컴컴한 앞길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다 갈림길에서 길을 착각하여 잘못 들었다.분명히 내가 걸어온 길은 잘 포장된 길이었는데, 발에 느껴지는 감각은 큼직한 돌이 밟히는 길이어서 길을 잘못 든 것을 알았다.
잠시 멈춰섰다.잠시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짙게 깔린 어둠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발길을 돌려 방금 들어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그리고 왔던 길을 찾았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느꼈다.
사랑이란, 둘이서 함께 어두운 산길을 걷는 것과 같은거구나.함께 손을 잡고 서로에게 의지하여 오르막을 오르기도 하고 내리막길을 가기도 한다.그렇게 가다가 힘들면 벤치에 잠시 앉아서 이야기 하며 쉬어가기도 하고.그러다가 어두운 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이때는 그냥 함께 손을 잡고 마음을 합해 길을 찾으며 길을 가면 된다.이것은 일반적인 연애의 모습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서로가 함께 하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서로가 관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가다 길을 잃고 상대방을 잃을 수도 있다.혹은 갈림길에 서서 여기로 가자, 저기로 가자 의견이 충돌하여 싸우고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럴 때, 누군가들은 나처럼 서로를 찾기 위해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서 갈 수도 있다.그러면 최소한 원점에서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으니까.둘다 그렇게 잘못 들어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서 가다보면 반드시 어느 지점에선 만나게 되어있다.이것을 연애에서는 재회라고 하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그곳으로 가는 또다른 길을 찾으며 헤매다결국 길이 엇갈려 서로를 찾지 못하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산을 내려갈 수도 있다.이것은 이별이 되겠지.
서로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그저 둘다 잘못 왔던 길을 똑같이 그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인데,산길을 걸을 때는 쉬워도 연애에서는 참 어려운 것 같다.
아는 길을 내려오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그렇게 생각하고는 웃어버렸다.왜 그걸 이제서야 알았을까.하지만 지난 3일만큼 그 생각에 젖어 슬프지는 않았다.그리고 어제만큼 그에게 톡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약간 느껴지는 허기에 새로 만든 요거트를 두 스푼 떠먹었다.
오늘은 참 이상한 하루였다.기분이 그렇게 우울하거나 슬프지도, 그렇게 기쁘거나 행복하지도 않았다.내가 했던 일에 대해 자책을 하며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그때 그래서 그랬었구나 하고 수긍을 하게 됐다.그리고 날 떠난 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헤어지자고 말하던 날의 그의 모습을 떠올려도 지난 3일만큼 가슴이 먹먹하지 않았다.그렇게 함께 할 때는 공허했던 마음이었는데, 혼자가 된 지금 그렇게 공허하지도 않은 것 같다.이렇게 일상으로 돌아가고 이성과 냉정을 되찾아가는구나 싶었다.
그와 함께 하며 화가 났을 때 읽어보며 이해할 수 없던 지난 시간 그와 주고 받던 카톡들을이제는 좀더 냉정하고 이성적인 시선에서 담담하게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러다 다시 또 마음이 힘들어지는 날이 있겠지만,오늘은 그저 평온했다. 그리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치 내 마음 속의 커다란 돌멩이를 하나 내려놓은 듯.
추천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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