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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으로서의 상담사-05

카운코 |2017.11.23 20:17
조회 175 |추천 1

이직한 후에는 짧은 평화가 왔다.

들어간 곳이 전화만 받으면 되는 곳이기 때문에 상사와 얽힐 일이 없었다.

나는 근무하고 보고서만 올리면 되고, 그냥 내 상담만 잘 하면 되었다.

 

하지만 아뿔싸. 매체상담이라는 건 얼굴보고 하는 상담과는 차원이 다른, 별세계의 상담이다.

아무리 대면상담을 잘 해도, 매체상담을 잘 하는 건 또 다르다.

대면상담(얼굴보고 하는 상담)이 진짜 상담이면 매체상담은 고객센터같은 이미지다. 실제로 그런 상담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상담사로서 상담은 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랏돈 주는 대가로 상담사한테 바라는 것은

 

1. 언제나 친절하게 고객님께 응대하고(설령 상대가 청소년이어도 절대 말을 놓으면 안 된다. '님'자를 빼먹어도 안 된다. 고객님은 반말하셔도 경고만 좀 주고 만다. 어떻게 대처할 방법은 없다. 대처방법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선생님이 참으세요~)

2. 고객님의 편을 언제나 들어드리되 센터가 책임질 발언을 하면 안 된다. 이 2번 때문에 무수한 애매모호한 상담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2번은 꼭 상담이 아니라 다른 어느 기관도 똑같다. 상담은 원래 굉장히 프라이빗한 것이다. 둘만의 장소에서, 개인적인 공간을 만들어서 진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시간에는 흉악범죄의 고백 이외의 대부분이 허용된다. 하지만 공공기관이 되어버리면서 이 선이 흐려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상담의 본질이 흔들려버리게 된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책임 못질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어휴, 그 사람이 너무했네! 라는 단순한 말조차 쉽게 할 수가 없다. 왜? 이 사람이 그 사람한테 가서 봐봐! 여기 센터에서도 그 사람이 너무했다잖아! 라고 말해버리면 센터의 이름으로 그 발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게 되는 것이다. 뭐 이런 거지같은. 그러니 제가 화가 나요 안 나요! 그사람 진짜 못됐지 않아요?? 하고 화가 나서 말을 해도 "아...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내담자님이 참 화가 난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그 사람을 직접 본 것은 아니니 못됐는지 판단해 드리기는 어려운 점 이해 부탁드려요." 하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듣는 사람은 속터지고, 짜증나서, 진상부리다가, 포기하고, 안 이용하게 된다. 하지만 센터의 이름이 걸리니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해야 하고...그러다보니 자꾸만 매뉴얼이 두꺼워진다. 상담은 그 순간순간 미묘한 감정을 포착하면서 탐색해가야 하는데 그냥 전화응답기처럼 틀에 박힌 대답만 하게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3. 연계 연계 연계. 무조건 연계다. 특히 전화, 문자, 카톡, 사이버같은 매체상담은 연계가 핵심이자 꽃이다. 그냥 얘기좀 하러 들어왔어요, 해도 연계는 꼭 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매체상담은 위기상담으로 만들어진 거라서 이런 매뉴얼이 있다. 그 말인즉 매체상담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최대한 대면상담 연계를 많이 해 주는 것이 해결에 빨리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선을 딱 긋고 119같이 급할때만 돕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밥먹었어요 오늘은 빵먹었어요 하는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떨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래서 상담사는 대개 심심이에 빙의해야 한다.

4. 민원이 하나도 들어오면 안된다. 이게 사람 환장하는 부분이다. 위에 말한대로 상담을 내 맘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센터를 보호하고 매뉴얼을 지키면서 공감을 최대한 해 주고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면서 연계까지 완벽하게 이어지는 상담이 몇 번이나 있겠나. 게다가 내담자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니 눈앞에서 대화를 나누는것 처럼 쉽지도 않다. 당연히 백 퍼센트 만족시킬 수가 없다. 전화번호만 안내해 주는 114조차 뭔가 민원이 생기는데 사람의 마음 이야기로 접근하는데 모든 사람이 다 만족할 수는 없다. 대면상담에서조차 드랍(내담자가 관두고 싶어해서 조기종결)은 어쩔 수 없는거다, 하는데 매체상담에서는 민원을 한 건도 들어오면 안 된다는 식으로 닦달을 한다. 100명이 있으면 100명의 마음이 다 다르고 만족도도 다를 수 있는 건데, 상담이 아니라 고객만족서비스를 해도 불만족스러운 한명이 안 생길 수는 없다. 상담과 서비스의 경계에 걸쳐있어서 더 미친다. 내가 지금 상담을 해야 하나 이 사람 비위를 맞춰야 하나. 비위를 맞추려니 제약이 너무 많아서 말을 편하게 할 수도 없고, 네네만 하면 해결 안 된다고 화내고, 미쳐버린다. 이 와중에 민원 들어오면 무조건 상담자가 잘못했다. 나는 아니지만 무릎꿇고 사과하라는 곳도 있었다. 상담자는 기본적으로 내담자가 좋아지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무릎꿇고 사과할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그러나 센터는 상담자 개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못하겠으면 그만두라고 한다. 매우 쿨하시다.

 

상담자가 따뜻하고 수용적이고 공감적인 사람인 건 상담실 안에서만이다. 직장에서는 일반 직장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상담자로서의 자아와 직장인으로서의 자아 둘 다를 요구하니 더하다. 이랬다저랬다, 아수라백작이 따로 없다. 그래서 센터의 윗선으로 올라갈수록 또라이도가 수직상승한다는 말도 있다. 일하는 상담자들, 굉장히 연구하고싶어하는 연구주제다. 또라이라서 이 바닥에서 살아남아서 저기까지 올라간 건지 살아남으려다보니 또라이가 된건지.

아, 특정 센터와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았다. 내 얘기 아니냐고 울컥하면 그건 당신이 찔려서 그런 거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른다.

 

물론 오랫동안 하시는 분들도 많다. 그런 분들은 정말 존경한다. 이 분들은 성인이다. 실제로 매체상담 오래 하셨다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후광이 비친다. 무슨 얘기를 해도 허허허.. 아이고 저런... 허허허.. 해탈의 경지다. 덩달아 나까지 차분해지는 효과까지 있다. 그냥 원래 성격이 여유로워서 잘 하시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을 센터들은 원한다. 무슨 말을 해도 허허허...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어도 허허허.. 부당한 일을 요구해도 허허허... 그러려니 하지요... 이런 분들이 아닌, 나같은 원리원칙주의자들이나 완벽주의자들이 센터상담실에 가면 홧병으로 드러눕는다. 상담사의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건 먼저 자기자신의 발견인데, 그 자기자신의 발견 충분히 하고 진로를 선택하기를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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