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은 보슬비가 처량하게 내리고 있었다.
흑풍회의 모든 이들은 연병장에 모여 자신의 형제 대산의 마지막 가는길을 배웅하였는데 모두의 눈가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우리의 형제가 죽음을 맞이하여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제풍은 순간 목이 메이는 듯 뒷말을 잇지 못하였고 곧 곳곳에서 울음을 참지못하고 흐느끼는 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렇게 비가 내리던 날 흑풍회의 거한인 대산이 청운산 어느 산 중턱에 묻히게 되었고 그의 묘비명에 누군가가 글을 새겨 놓기 시작하였다.
-한점부끄럼없이 살다 간 거한 이곳에 묻히다-
“스승님, 도대체 그자가 누구입니까.”
제풍의 제자로 보이는 한 사내가 분노로 휩싸인 체 자신의 스승을 쳐다보았다. 한명의 형제를 금방 떠나보내고 온후라 그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눈은 분노에 쌓여있었다.
“그 자가 누구던간에 이번일만큼은 현가놈들을 용서하지 못하겠구나. 무엇보다도 지금은 그 붉은자를
해치워야 할 것이다.”
“스승님, 제가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곳곳에서 제자들은 자신을 보내달라고 웅성거렸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제풍은 곧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정현, 이번에도 네가 선두로 가야하겠구나. 여러명의 조를 짜서 꼭 붉은자를 잡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
번 일이 끝나면 정현은 본국검법을 배울것이니 그리 알거라”
“네?”
정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고는 스승인 제풍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가?”
3일이 지나면 연화와의 약조한 날이 되는데 지금 그가 스승의 명을 따른다면 그녀와의 약조를 어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일만큼 흑풍회에서도 중요한 임무인지라 정현은 난감함으로 인하여 잠시 망설임이 있었다. 잠시뒤 힘들게 결정을 내린 정현이 한숨을 내쉬며 모두에게 말하였다.
“네. 그러하겠습니다.”
청운은 멍하니 앉아서 흘러가는 계곡물을 쳐다보았다. 눈앞에서 한치의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던 대산의 모습과 신기와도 같은 검술을 행하던 붉은자의 모습이 교차되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흑풍회로 들어온 7년동안 그는 다시한번 두려움이라는걸 맛보게 되었다. 그 옛날 현영에게 피해 도망다닐때의 두려움이 또다시 생각나자 자기도 모르게 불끈 손을 쥐었다.
“운. 대산사형을 생각하는거야?”
언제왔는지 정현이 그에게 다가와 있었고 곧 청운의 옆자리에 그도 앉았다.
“화통한 분이셨지. 우리모두에겐 큰 형님같은 분이셨어”
“그랬었죠.”
그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가슴을 쓸어내렸고 곧 정현이 다른말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참, 상주댁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지?”
청운의 몸이 순간 긴장되었다.
“어찌....되었습니까.?”
“몇년전쯤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고 하더군. 죽지는 않은모양이야.”
“그랬군요.”
짧게 내뱉는 청운의 목소리는 일순간 떨림이 일어났고 여전히 정현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누구지?”
정현은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 싫은 듯 고개를 저을 뿐이였다.
“그저 조금 아는 분입니다. 목숨은 잃지 않으셨다니 다행이군요.”
그의 말투는 이제 냉혹하리만큼 차가워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에게 부탁할게 있다.”
“....”
“나에게 정을 나눈 여인이 생기게 되었다. ”
정현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청운이 그를 쳐다보자 그는 그동안의 일을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이곳에 낯선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인이 이곳에 온다는 것은...”
“그건 걱정말거라. 오늘 스승님에게 허락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수연또한 여자이지 않느냐. 그녀가 오
면 수연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우린 서로가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조하였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정현은 뒤돌아서서 헛기침을 쏟아내었다.
그런 그를 쳐다본 청운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흘러나왔고 그의 마음을 빼앗은 여인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다녀 오겠습니다. 근데 누구를 찾으면 됩니까?”
“한여골로 내려가면 그 고을에 정 3품 벼슬을 가지고 있는 대감집이 있을 것이다. 그 집 규슈가 나와 정
을 나눈 여인이다.”
순간 청운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들었는지 자신의 귀를 의심해보았다. 분명 잘못되었으리라. 정현이 무언가 잘못알고 있는것이리라.
“무...무슨 말을 하십니까. 다시 한번 얘기해주십시오.”
온몸이 경직된 청운이 정현을 쳐다보지 못하고 멍하니 앞쪽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3일뒤, 달이 떠오르면 한여골의 당산나무에서 그녀를 기다리리거라. 그녀의 이름은 연화이다. 혹시 나
를 찾으면 내 이름을 말하고 대신왔다 하면 될 것이다.”
“정을 나눈사람이....바로.....그녀이옵니까?”
“그녀를 알고 있느냐?”
청운의 눈빛에서는 분노와 고통과 사모하는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뿜어져 나왔다.
평생 자신의 가슴에 묻고 살아가려했던 소중한 그녀의 이름이 다른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가슴속 깊은곳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것을 느끼고는 정현을 노려보았다.
순간 청운의 살벌한 눈빛이 자신을 향해있자 당황한 정현이 한발자국 물러났고 곧 청운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연화는 저녁상을 물리고 쉬고 싶다며 얼른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장롱안쪽에서 여러 가지 패물을 꺼내었다. 혹시나 이런 것이 필요할까 싶어서 그녀는 미리 챙겨놓았는데 거기에는 은비녀, 첩지, 노리개등 값비싼것들이 많이 보였다.
“애기씨 저 순심이어요.”
“그래 얼른 들어와.”
기다렸다는 듯이 순심의 손을 부여잡고는 곧 패물함중에서 몇 개를 꺼내더니 순심의 앞으로 내밀었다.
“자 너에게 주는 거야.”
“무슨 말이어요. 이런거 필요없으니까 애기씨 다 가져가셔요.”
“나도 많이 있는걸..어차피 다시 보지도 못할터인데”
끝내 눈물을 참지못하고 흐느끼자 순심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연화에게 절을 하는 것이였다.
“우리 애기씨, 거기가서도 잘 사시어요. 부귀영화 꼭 누리시구요. 흑흑”
달이 중천에 뜨자 옷가지와 패물이 든 보따리를 손에 쥔 순심과 연화가 슬쩍히 대문을 열고 동네어귀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왠일인지 그날따라 아무 장애물없이 쉽게 빠져나올수 있었다. 앞으로 먼저 걸음을 내딛은 순심이 뒤를 두리번 거리며 이것저것 확인하고는 연화를 부축해 길을 가기 시작하였는데 곧 당산나무 앞으로 다다르게 되었다.
"그만 들어가봐. 그리고 넌 절대 저녁에 날 보았다고 하지마.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다고.. 그렇지 않으면 넌 무사하지 못할꺼야“
“알겠어요. 제 걱정은 하지마셔요. 부디 애기씨 몸조심만 하세요.”
마음이 급해진 그들은 짧게나마 서로를 끌어안았고 곧 연화에게 보따리를 넘겨 주겨준 순심이 눈물이 터져나오는지 자신의 입을막고는 재빨리 집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연화는 한참동안 멀어지는 순심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는 곧 뒤를 돌아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미 주위는 칠흙같이 어두워져 사방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연화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당산나무쪽을 살피자 곧 검을 찬 누군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기쁜마음으로 그쪽으로 내달렸다.
그 누군가는 아직까지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였는지 여전히 다른곳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연화가 다가가자 곧 시선을 그녀쪽으로 옮겼다.
“소녀 도련님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하여 왔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숙여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하였는데 한참을 흘러도 정현의 대답이 없자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았는데 순식간에 그녀의 낯빛이 변하였다.
“정현이 아니라서 미안할 따름이군요.”
-제 1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