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음날 아침. 혁필은 초인종이 울리자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채연이 방에 들어와 양탄자가 깔린 거실 바닥에 양반자세로 앉았다. 혁필도 조용히 채연의 옆에 다가가서 앉았다.
“미안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아직 당신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니까. 미안해 할 건 없어요”
“...”
채연은 품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내서 녹음을 시작했다.
“계속 해봐요. 어제 하던 애기...”
그러나 혁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채연는 혁필의 답답한 행동에 갑자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음이 급해져서 혁필을 재촉했다.
“어서 말하라니까요?”
채연의 짜증섞인 명령에 혁필은 조심스럽게 순응했다.
“…그런데... 이상한건... 동생이 죽은 이후로 꿈이 갑자기 사라졌어요.”
채연은 혁필의 이 한마디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동생이 죽었으니 더 이상 꿈의 도움이 필요 없어진 거겠죠.”
“그럴… 까요...?”
“내 생각에는...”
혁필이 책장 앞의 바닥에 널려진 책들을 가져다가 채연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웬 책들이죠?”
“당신의 말을 듣고 내가 옛날에 읽던 책들을 뒤져봤어요.”
그녀는 책들을 둘러 보았다.
“도대체 언젯적 책인데 이리 낡았죠?”
“내가 13살 때 읽던 책이예요.”
“흠… 신동이었나 보죠? 13살때 이런 아웃사이더들의 책을 읽다니... 콜린 윌슨 까지...“
다소 놀라는 그녀에 비해 혁필은 의외로 침착했다.
“표시된 부분을 봐요.”
채연은 색인이 되어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한참 책을 읽어 보았다. 채연이 책에 빠진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책을 조용히 놓고 신중히 생각에 잠겼다.
“내 분석이 맞다면… 이 모든 사태는 당신이 창조해 낸 거예요.”
“내가...?!”
“네! 당신은 당신의 소망을 성취해 줄 대리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괴테의 저서에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을 받아들인 거죠. 그리고 악마를 당신의 꿈속에서 창조해 낸거예요. 프로이드의 ‘소망충족의 꿈’을 이용해서 말이예요. 그리고는 당신의 분신인 악마가 - 당신의 표현을 굳이 빌리자면 그렇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그 악마가 당신의 꿈속에서 당신의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 거죠.”
혁필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런… 건… 믿을 수 없어요. 도저히…”
그러한 그에게 채연이 말했다.
“이거 왜 이래요. 믿지 못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예요.”
혁필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괴로워 하고 있었다.
“모두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니...”
혁필이 채연에게 되물었다.
“그럼... 전 몽유병환자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어요. 아직은...”
“...”
#19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다시 현재의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죠.. 이 사건의 최초의 살인으로…”
“최초의 살인…?”
“네… 과장이 죽기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죠?”
“제가 지각을 해서 심하게 꾸중을 들었어요. 항상 그랬어요. 과장은 처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 회사에서 일한지는 얼마나 됐죠?”
“얼마 안 됐어요… 한달 정도… 사실은 얼마 전… 회사를 옮겼거든요…”
“한달이라면…. 당신이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하는 군요…”
“아마도…”
“그런데…… 왜… 회사를 옮겼죠?”
“친구가 권유해서…”
“친구?”
“네”
“어떤 친구죠…”
혁필은 ‘God’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채연이 ‘God’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God’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아뇨… 이 사건과는 상관 없어요… 그를 끌어들이고 싶진 않아요…”
“…그래요…?”
“…”
채연은 ‘God’에 대해서 혁필에게 더 이상 캐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한 부서에 계속 있었나요?”
“아뇨. 그 전에는 다른 부서에 있다가 입사한지… 일주일 만에 갑자기 그 부서로 옮겼어요.”
“갑자기… 옮긴것도… 이상하고… 그 회사에 입사하자 또 다시 당신이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도 이상하군요… 그런데 당신은 한 달 훨씬 이전부터 내게 당신의 살인에 대해서 날 찾아와 귀찮게 했는데 그건 도대체 뭐죠?”
혁필은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곧 사실대로 애기했다.
“…그... 그건... 정말로… 지어낸 거예요. 난 항상 동생의 죽음에 대해 죄과를 치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채연은 한박자 쉬고,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동생이 죽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망이 확인되자 그 사실을 거부했군요.”
“미안… 해요…”
“나한테 미안해 할 일은 아닌것 같군요.”
두 사람은 다시 잠시 침묵했다. 무거운 침묵이 혁필을 완전히 잠식해 버릴 즈음 채연이 말했다.
“당신 과장 얘기나 계속 해봐요.”
혁필은 다시 진술을 시작했다.
“그날은 다른날 보다 정말 심하게 모욕을 당했어요. 하지만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그날 또 어떤일이 있었죠. 그일 말고... 다른 일은 없었나요. 하루종일 당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한명도 없었어요?”
“점심 때 동료직원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어요. 그 사람이 내게 과장이 심했다면서... 과장을 귀신이 잡아갔으면... 했어요.”
“동의했나요?”
“하지만... 그게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잖아요.”
“해석하기 나름이죠.”
혁필은 또 다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 후의 연쇄살인 사건은...”
혁필은 잠시 말을 잊지 못하다가 그녀의 질문에 다시 진술을 시작했다.
“그날은 정말 재수가 없었어요. 전날 밤에 눈이 와서 차가 막히는 바람에 지각을 했는데... 저녁에 다시 눈이 오더군요. 날씨도 추워서 길은 온통 빙판길이었는데... 그만... 길을 가다 넘어졌어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었겠군요.”
“네...”
“순간적으로 죽이고 싶었겠구요.”
“네... 하지만, 난... 그 사람들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뉴스에서 죽은 사람들 얼굴을 보고 놀라서 내게 찾아왔잖아요. 모른다고 할 수는 없죠.”
“...”
또 다시 침묵… 혁필은 이렇게 침묵과 진술을 번복하면서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럼 파출소 소장은 또 어떻게 된거죠?”
그녀의 물음에 침묵하던 그의 입이 다시 진술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매우 두려운 반사적 행동이 되어 있었다.
“당신에게 가기 전에 파출소에 갔었어요.”
“당연히 당신 말을 믿지 않았겠군요.”
“네...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소장은 저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면서 내쫓았어요. 그래서...”
“됐어요.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혁필은 그녀의 이 한마디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해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당신… 일은 정말 미안해요… 정말…”
“…”
혁필은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자 그는 다시는 입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20
그렇게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혁필은 그녀의 이마에 자신과 같은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이마는 왜 다쳤죠? 제가 그런건가요?”
“아니예요. 그냥 넘어졌어요. 당신 이마는...”
“저는 침대에서 떨어졌어요.”
“언제...”
“오늘... 새벽에... 그 바람에 잠이 깼어요.”
“네?”
그의 이 진술에 그녀는 그만 너무 놀라 말을 제대로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혁필도 놀라 물었다.
“왜...”
“그게... 몇 시쯤이죠?”
“1시쯤...”
“이런...”
“왜...”
그러나 채연은 더 이상의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채연은 다시 한참을 고심하다가 아주 작은 결론에 도달한 듯 보였다.
“내 예측이 맞다면… 당신이 창조한 악마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만 활동하는게 틀림없어요…”
“그런…”
혁필이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 채연이 다시 물었다.
“어제는, 어떤 꿈을 꾸었죠?”
혁필에게 질문을 하는 채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내가 기르던 토끼가 새끼를 낳았어요. 그런데 그 중 한 마리를 어머니가 동생에게 주라고 했어요. 나는 주기 싫었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었죠. 어머니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차라리 죽이는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네... 그런데 그 사건이 어제 꿈에 나타났어요. 이상한건 어젠 죽이기 전에 꿈에서 깨어났어요. 왜냐하면… 침대에서 떨어졌으니까요.”
“꿈이 깨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죠?”
“넘어졌어요. 미끄러져서...”
“그래요… 나는...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깔린 양탄자에 걸려서 넘어졌어요.”
“...”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꿈속에 현실의 나를 만들어 넣은 것 같아요. 내가 토끼로 외곡 되어서 당신의 꿈속에 나타난 거예요…”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소중한 존재인가요?”
“네?”
“아… 아니예요…. 그냥 잊어 버리세요.”
혁필은 심각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심경의 변화를 채연이 모를리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혁필이 다급하게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혁필의 질문에 채연은 그만 머리가 하얗게 멍해지는 듯 했다.
“글쎄요...”
“…방법이… 없나요…?”
“아직 단정하기는 일러요… 우선은 계약서 내용이 뭔지 확실히 알아야 겠어요. 그래야 그 계약을 파기시키죠...”
“하지만… 전… 생각이 안나요...”
“알아야 되요. 반드시...”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놀랐다. 그리고 혁필이 조용히 일어나 철문 밖을 확인했다. 문 밖에는 강재우 반장과 최창경 형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