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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아르뚜르 통산 1300골의주인공

gkmtv992722 |2006.07.16 00:00
조회 1,457 |추천 0
p { margin: 5px 0px } arthur friedenreich(브라질) 입니다..
한글 검색으로 조금이나마 찾아볼려면... '아르뚜르 프리에델헤이츠', '프리덴라이히' 등으로 검색하면 됩니다..
영어 자료도 찾지 못하겠고....대략


1892년 출생
1909년-1934년까지 통산 1329골 기록
1969년 사망

그리고 iffhs(국제축구통계역사재단) 20세기 최고선수랭킹에....의외로 54위에 랭커되어 있네요?? -차범근은 60위에 랭커..



kbs 축구의 역사 '아르뚜르 프리덴라이히' 부분 정리

펠레 멘트
"'아르뚜르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의 대선수입니다. 아르뚜르는 1935년 이전에 활동했던 대선수입니다..."



20세기초 브라질에서 축구는 백인상류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아르뚜르는 혼혈이었지만 아버지가 독일 출신의 백인상인이어서 축구 클럽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르뚜르가 축구사에 대 천재가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알렉산드레 다 코스타 박사(축구의 역사 편저) 멘트
"그러니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르뚜르의 아버지 오스카가 아들 아르뚜르를 제르마니아 클럽에 입단시켜 축구를 시킴으로써 축구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다. 그는 최초의 축구 천재였죠"



아르뚜르가 17살에 입단했을 당시 흑인 선수에 대한 파울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그는 매번 상대선수들에게 거센 공격을 당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심한 파울로 쓰러진 아르뚜르는 문득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축구를 하다가 너무 축구에 몰두한 나머지 차에 치일뻔 한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몸을 돌려 사고를 피할수 있었다..

그날이후 아르뚜르는 자신만의 독특한 몸동작을 개발해 백인 선수들의 공격을 피했다. 이런 플레이가 팬들을 열광시켰다.
안타까운 것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이런 아르뚜르의 플레이를 기억하는 생존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니콜라우 투마'는 아흔 다섯 살로 라디오 기자로 활동했다. 덕분에 가린챠 펠레 호나우딩뇨 등 명선수들을 옆에서 지켜봤는데 그 중에서 아르뚜르를 최고로 꼽는다



"니콜라우 투마(언론인) 멘트
'아르뚜르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 축구를 새롭게 연 전설같은 선수입니다. 그 때 브라질 축구는 겨우 걸음마를 땐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고 비인기 스포츠였죠!



어느새 '아르뚜르 프리덴라이히'는 브라질의 전설이 되었다.
1919년 남미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강력한 우승 후보 우루과이를 1:0으로 눌러 이긴다. 이 때 골을 넣은 선수가 아르뚜르다.
이로써 브라질은 국제대호에서 처음 우승컵을 안았다.

브라질 신문 제 1면에 축구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아르뚜르는 호랑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브라질 축구 1면에 축구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알렉산드레 다 코스타 박사(축구의 역사 편저) 멘트
"그 때 당시를 돌아보면 아르뚜르가 축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때까지만 해도 브라질 언론은 경마에 대한 기사만 주로 다뤘습니다. 그런데 아르뚜르가 골을 넣고 우승을 하자 구석에 몇 줄 실리던게 고작이었던 축구기사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죠! 아르뚜르는 축구를 인기 종목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르뚜르가 축구선수로서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브라질 대표의 최초의 혼혈선수로서 그만큼 인정받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아르뚜르는 백인관중들이 자신이 혼혈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인종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경기전 곱슬머리를
펴서 기름을 바르고 그물망을 썼다.
결국 아르뚜르의 활약으로 브라질에서 비백인출신의 선수들이 축구를 할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아르뚜르의 전성기는 브라질 대표팀이 최초로 유럽원정 경기를 가졌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화면은 아르뚜르의 실제 경기 장면이 담긴 유일한 자료 화면이다.

파리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프랑스를 상대로 7:2 압승을 거뒀다.
유럽의 축구팬들은 브라질 대표팀의 높은 수준에 놀랐다.
그 중에서도 아르뚜르의 플레이는 신기에 가까웠다.



알렉산드레 다 코스타 박사(축구의 역사 편저) 멘트
"아르뚜르의 축구는 차원이 틀렸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깜짝 놀랏씁니다.
단 한경기를 보고서도 말이죠
아르뚜르는 이로써 왕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세계 축구의 왕중의 왕이 되었죠!"


저명한 스포츠 과학자 롤랜드 로이 박사는 과학적 근거에 준하여 축구 경기를 분석하고 과거의 기록들을 연구한다.



롤랜드 로이(스포츠 통계 전문가) 멘트
"아르뚜르 프리덴라이히는 통산 1329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기록은 우리가 잘아는 펠레나 독일의 게르트 뮬러의 골 수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또한 아르투르는 처음으로 1000골 이상을 넣은 선수이기도 합니다."



아르뚜르는 26년동안 현역선수로 활동했다. 그가 마흔세살까지 선보인 최고의 축구에 많은 팬들은 감찬을 금치 못했다..
세계 어러나라의 기자들은 그의 플레이에 찬사를 보냈다.
아르뚜르는 축구로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
다만 그의 소속 클럽에서 감사의 표시로 이 집을 마련해 줬다.
1969년 9월 아르뚜르는 칠십칠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석 달 뒤 펠레는 그의 천 번째 골을 기록한다.
하지만 펠레는 아르뚜르의 대기록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레 다 코스타 박사(축구의 역사 편저) 멘트
"지금과 같은 축구를 창조한 것은 영국입니다.
영국은 축구의 체계를 잡고 정립했습니다. 말하자면 뼈대를 세웠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축구를 빛낸 것은 아르뚜르입니다.
그는 축구를 재창조했습니다."



니콜라우 투마(언론인) 멘트
"'아르뚜르 프리덴라이히'는 그 시대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축구를 새로운 지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아르뚜르의 이름은 라디오 중계를 통해 브라질 전역에 울려퍼졌고, 덕분에 브라질 사람이면 누구나 그를 알았습니다
상류층부터 하층민까지 전부요! 아르뚜르의 성공을 보면서 국민들은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해서 브라질 축구는 획기적은 돌파구를 맞이했죠!"



축구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였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그가 처음 축구 인생을 시작했던 도시 이곳 상파울로의 운동선수 묘지에 고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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