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댓글로 보기 귀찮아서 복붙했다 추가되면 계속 수정할게 나처럼 대댓글로 보기 귀찮은 판녀들은 이걸루 봐~
좋아하는 남자애가 학교는 물론이고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모범생이었어. 그런데 여기서 모범생이란 게 애어른할 거 없이 모두에게 평판이 좋은 애라는 거.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계속 반장하면서 공부도 잘하고, 세 남매 중 장남인데 동생들도 잘 챙기고 예의범절 몸에 배어 있고, 정말 멋지다 느꼈던 게 그냥 겉치레로 예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뭐라 설명하기 힘든 품위라는 게 느껴진달까? 내가 반하게 된 것도 반 아이들 살뜰히 챙기면서도 한번 성깔 나면 언성도 안 높이고 상대방 멘탈을 조용히 털어놓으며 결국 자기한테 승복하게 만드는 .... 그만의 점잖은 카리스마가 있었어. 그래서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많고. 남자애들한테도 인기 많은 친구였다. 게다가 노래도 잘 부르고 악기도 기타랑 드럼 침. 복싱 배워서 몸매도 날렵하고. 얼굴은 준수한 편. 한마디로 사기캐였어. ㅠ 그렇게 모두의 동경을 받던 그애였는데, 나는 그 흔한 발렌타인 초콜릿 한 번 줘보지 못하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갑자기 내가 코피가 났어. 그래서 양호실 갔는데 거기에 그애가 침대에 누워 있음. (중2때부터 짝사랑했는데 그때가 고1. 중 2때 같은 반인데 고1땐 그애랑은 다른 반이었고.) 거기에 그애가 누워서 무슨 소설책 같은 거 읽고 있는데 심멎하는 줄. 양호 선생님이 나도 코피 멈출 때까지 누워 있으라고 해서 그애 옆옆 침대에 누웠거든. 침대가 세 갠데 걔가 창가쪽에 눕고 난 그 바로 옆에 누우면 티날까 봐 가운데 침대 비워두고 벽쪽에 누움. 양호샘이 반듯이 누우라고 해서 그렇게 있는데... 옆눈으로 걔 얼굴 보고 싶은 거 꾹 참고 눈을 꾹 감았어. 사락사락 걔가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으면서 속으로 콩닥거리고 있었는데 양호쌤이 "잠깐 나갔다 올게" 라고 하고 나가신 거야. 그랬는데 그애가 갑자기 "너 왜 나 아는 척 안 하냐."라고 함. ㄷㄷㄷ(댓글로 이어서)
나는 눈 감고 있던 김에 그냥 자는 척해버리려고 대답을 안 했는데, "김OO, 왜 나 아는 척 안 하냐고."라고 내 이름 정확히 부르면서 다시 묻는 거야. ㅠㅠㅠㅠ 안 자는 거 안다는 듯이 ㅠ 그래서 자다 깬 척하면서 "으응?" 하며 걔쪽으로 슬그머니 눈을 떴는데, 걔는 소설책에서 눈도 안 뗀 채로 피식 웃고 있음. 여기서 다시 심멎ㅜㅜ 근데 내가 볍신같은 게 그때 한다는 말이 "아, 안녕....?" 이랬음 ㅋㅋㅋ 근데 걔가 심드렁하니 뱉듯이 이러는 거야. "넌 왜 걸핏하면 코피 터지냐." 그 말투가 꼭 딱하단 듯이 오빠가 챙겨주는 말투 있잖아. '에그~ 칠칠치 못하게 맨날 코피나 나고~'라고 하면서 코피 닦아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 ㅠㅠ 거기에 감동 받은 게. 중2 때 같은 반일 적에 교실에서 두 번 정도 코피 난 적 있거든. 그중 한 번은 반장이었던 걔가 양호실 데려다줬었고. 그걸 걔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근데 여기서 내가 2차 볍신미가 터져. "넌 왜 걸핏하면 코피 터지냐"하는데 그때 걔한테 신세진 게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아 미안." 이래버림 ㅠㅠㅠㅠㅠ 그랬더니 걔가 읽던 책을 덮더니 날 보더라. 그러더니 "누가 주먹으로 때린 건 아니지?" 이러는데 누가 봐도 농담인데 꼭 진담 같은 말투에 진지한 얼굴로 묻는 거야. (다시 쓰면서도 심장 엄청 나댄다 ㅋㅋ) 그래서 내가 "아하하... 그건 아니지... "라고 얼굴 빨개진 게 나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말 더듬었어. 제발 이제 말 좀 그만 시켜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감당 못할 정도로 설레 있는데, 그애가 갑자기 일어나더니만 내 옆 침대(그러니까 걔랑 나 사이에 있던 중간 침대)의 베개를 살짝 아래 방향으로 끌어내리더니 침대 툭툭 치면서 "이리 와서 누워" 이럼 ㅠㅠㅠ
이 무슨 전개인가 싶을 정도로 막 가슴 뛰고 쿵덕쿵덕거리고. 심장이 너무 뛰어서 누구한테든 나 좀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음. 몸은 굳고 심장은 나대고 말로는 "왜. 왜 그래. 시...싫어."라고 가까스로 의사표시를 함. 그랬더니 걔가 "나도 환잔데, 거기까지 출장 가야 하냐."라는 거야.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침대 텅텅 두드림. 어서 와서 누우란 듯이. ㅠㅠ (근데 거기까지라고 해봐야 침대 하나만 더 지나쳐 오면 되는 거리 ;;)
그래서 뭔가 그런 야리꾸리한 이상한 분위긴 아니구나 직감하고(꿈깨고서 ㅋㅋ) 엉거주춤 일어나서 그 침대 쪽으로 갔거든? 그랬더니 다시 베개 위치 매만지더니 "자, 여기서 베개를 머리로 베지 말고 목으로 벤다는 느낌으로 누워봐."라고 하는 거야. 이쯤 되니까 거의 나도 모르게 그애 말에 따라 몸이 움직여짐. 그애가 하란 대로 우선은 위치 잡고 앉았는데. 근데 그러면서도.. 누우려니까 왠지 되게 신경 쓰이는 거야. 베개를 목으로 벤다는 느낌으로 누우면 얼굴이 더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잖아. ㅠㅠ 그애앞에서 그런다는 게.;;; 게다가 한쪽 코는 막은 채로 말야. 너무 혐스러울 것 같잖아.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걔가 또 픽 웃어. 그러면서 "안 쳐다볼게, 편히 누워."라고 하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커튼 쳐버림 ㅋㅋㅋ 그렇게 우리 사이엔 커튼이 쳐지고, 나는 누웠고. 커튼 너머로는 또 사락사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내가 진짜 용기 내서 말 걸었다? "어디... 아퍼?"라고 물었어. 내가 걔한테.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넌 어디가 아파서 양호실 와 있어?"라는 거였는데. 나도 모르게 저렇게 물음) 그랬더니 걔가 "일찍도 물어본다."라고 좀 퉁명스럽게 말함. 그러곤 잠깐 정적이 흘렀는데 이상하게 그애가 화난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근데 그애가 되게 진지한 투로 "몸조리 잘해. 반 달라졌으니까 이제 나처럼 착한 반장이 챙겨줄 일도 없을 거고. 네 몸 네가 알아서 챙겨야지." 라고 말하는데 '착한 반장'이라고 자기를 미화해서 말하는 것도 왠지 밉지가 않고, 영감님처럼 챙겨주는 말을 하는 게 진짜 마음 따뜻해지더라.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면 나 자신이 진짜 원망스러운 게 소설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같았으면 "그러는 넌 왜 네 몸 못 챙겨서 양호실 오냐?"라는 식으로 톡 쏴줬을 텐데. 그때의 난 너무 바보같이 그냥 "응." 하고 말았어.
만화 캔디에 보면 캔디가 테리우스 뒤에서 끌어안으면서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이라고 하잖아. 난 "이대로 영원히 코피가 멎지 않기를." 속으로 진짜 간절히 원하게 되더라. 그렇게 커튼을 사이에 두고 그애랑 나란히 누워서 가끔씩 들려오는 그애 목소리를 듣는 설렘, 그리고 그렇게 툭툭 챙겨주는 말이 너무 좋았어. 그런데 곧 양호 샘이 들어오시고 ㅠㅠㅠ (쓰다가 잠깐 울컥해져서 ... 좀 쉬었다가 이어서 쓸게요. 생각보다 길어지기도 했고. ;;)
아. 양호 선생님 들어오시기 전에 걔가 그런 말 했어. "나 사실 꾀병이야. 너한테만 말하는 비밀이니까 선생님한테 이르지 마라."라고. 난 알았다고 했고. 얘같은 범생이도 이렇게 땡땡이를 치나? 싶어서 속으로 또 다른 매력이다 하고 풉 웃기도 했지. 그러고 나서 양호샘이 들어오시자 그애가 "선생님, 저 조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는데 연기가 너무 천연덕스러운 거야. 그런데 선생님은 또 거기에 호응해서 "아, 많이 안 좋니? 병원 가봐야 할 것 같아?" 이러시고. 역시 평소 하도 잘하다 보니 누구도 의심 않는구나 싶었지. 양호샘이 조퇴계 써주신다고 하고, 그애는 "감사합니다." 깍듯이 인사하는 소리 다 들리고. 이제 가겠구나, 싶어서 아쉬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 쪽 커튼이 젖혀지면서 그애가 "또 보자" 함. 환하게 웃으면서. ㅠㅠ 그때 진심으로 심장 정지가 0.1초 옴. 그렇게 그애는 가고 ㅠㅠㅠㅠ 발랑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느라고 좀더 누워 있었어. 양호샘이 "넌 코피 아직 안 멈췄니?"하는 소리 듣고 그제야 비실비실 일어났는데, 문득 그애가 무슨 핑계 대고 양호실 왔나 궁금한 거야. 그래서 걱정하는 척하면서 샘한테 "근데 쟤는 어디가 아프대요?"라고 물었어. 그랬더니 샘이 말하시길 "기흉이라서 수술했어." 이러시는 거임!! 완전 놀래가지고 언제요? 하고 벌컥 물었더니 지난 방학 때 발병해서 수술했었다고. 그 뒤로 예후가 나쁘면 재발할 수 있는데 그래서 가슴 통증 생길 때 잘 살펴보고 일시적인 거 아니고 지속되면 곧바로 병원 가봐야 하는 거래. 오늘은 통증이 심해서 왔는데 좀 누워 있다가 괜찮아지지 않으면 병원 가기로 하고 온 거라고. ㅠㅠ... 난 순간 혼란스러웠지. 뭐가 거짓말일까 하고. 꾀병이랬는데 기흉 수술 받은 거 핑계대고 아픈 척한 걸까 아니면 진짜 아팠던 걸까. 수술 받은 거 자체를 거짓말할 순 없잖아 ㅠ 그래서 어질어질하면서 교실 들어갔고, 그 다음날 일부러 걔네 반 쪽으로 가봤는데... 역시나 그애 결석했더라고. ㅠㅠㅠ 꾀병 아니었던 거야. ㅠㅠ 그제사 알았어. 아팠는데 그거 감추고 나한테 장난친 거구나...라고. ㅠ 나중에 '기흉'으로 검색했더니 그 통증이 재발하면 숨 쉬는 것도 힘들고 하여간 사람이 참기 힘든 고통이래 ㅠㅠㅠㅠㅠ 그걸 알고 나니까 내 가슴이 더 미어지는 것 같았어. 자기도 아픈데 나 코피 난 거 챙겨준 거잖아. 나랑 말도 해주고. 근데 난 꾀병이란 거 믿을 정도로 둔했던 거잖아.
그다음 날엔 그애가 다시 학교 나오긴 했지만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못하겠는 거야. 내가 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아프단 소리 듣고 나서는 더 좋아지고, 그래서 더 눈도 못 마주치겠고. 막 그런 거 있잖아. 많은 아이들을 챙기고 지켜주는 타입의 애였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병을 가지고 있고, 또 그걸 다른 애들한테 아프다고 내색도 잘 안 하고 그런 거 보니까 보호본능 돋으면서 ㅠㅠ 그러면서 내가 더 보호받고 싶어질 정도로 그애가 강해 보이고. ㅠ 그렇게 난 말 그대로 끙끙 앓았어. 그애에 대한 마음으로 내가 기흉 걸린 것처럼 가슴앓이가 심했지. 그렇게 지내전 어느 날 또. 복도에서 애들하고 깔깔거리며 음악실 쪽으로 가고 있는데, 그애랑 또 딱 마주침. 근데 그애가 애들 다 있는 앞에서 나한테 슥 다가오더니만 애들 다 들리게 귓속말로(몸 내 쪽으로 기울여서 비밀처럼 말하는데 다른 애들 다 들리게;;) "너 비밀 누설한 거 아니지?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 이럼. ㅠㅠ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다 보니까 어버버 하고 있는데... "말했으면 지금 실토해라. 3초 준다" 이러는 거야. 허허허...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정답지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ㅠ 난 또 뇌정지 상태에서 "말 안 했어."라고 최악의 대답을 해버림;;;ㅋㅋㅋㅋ ㅠㅠ 그랬더니 걔가 좀 화난 표정 지으면서 이러는 거야. "근데 왜 나 피해."
하... 지금이라면, 아니 그때 뇌정지만 안 왔더라면 "너 왜 꾀병이라고 뻥쳤어!" 라고 따지는 게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 텐데. 퓨... 근데 왜 그애 앞에만 서면 그렇게 지질해지는지 그땐 또 "안 피했어." 라고 또 무미건조한 답을 해버림 ㅠ. 그랬더니 걔가 "거짓말까지 하네?" 라더니 화난 표정을 짓는 거야. 근데 진짜 화난 게 아니라 지어낸 것처럼, 마치 어린애한테 하듯이 말야 ㅠㅠ... 같이 있던 내 친구들도 덩달아 어버버 어버버한 상태고. 그러고 보니까 거짓말은 그애가 했는데 왜 내가 혼나는 기분이 되어야 하는 건데?? 하여간 그렇게 복도에서 다른 친구들 다 보는 앞에서 말 걸면서 친한 척하고, 그러니까 너무나 당황스럽고. 같은 반일 때도 이렇게까지 확 다가온달까?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뭔가 특별해진 느낌. 특별대우 받는 느낌이 들어서 다리까지 후들거리더라. 최대한 냉랭하게 태연한 척하면서 "알았어. 다음부턴 아는 척할게."라는... 역시나 바보같은 말을 하고 지나가려는데 "고맙다." 라면서 또 씩 웃는 거야. ㅠㅠ
속으로 난 뭐가 고맙단 건지도 모르겠고, 머리에선 대혼란 파티. ㅠㅠ 그렇게 그애는 또 덤덤하게 지나가고, 내 친구 두 명은 다들 난리가 났지. "헐!! 뭐야, 너네. 둘이 무슨 비밀이 있는데? 너 쟤랑 친해?" 등등. 그럴 정도로 그애가 학교에선... 그런 존재였어. 거의 준연예인급이어서 그애의 특별한 행동 같은 건 애들 사이에 괜시리 회자되기도 하고 그랬거든. 걔를 주인공으로 해서 팬픽 쓰는 애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ㅋ 나처럼 존재감 없는 애 입장에선 이렇게 튀는 행동하지 말아줬음 하고 바라는 마음까지 생겼어. 그러면 그럴수록 더 피하게 될 것 만 같고. 그렇게까지 했는데 인사 안 하기도 겁나서 그애랑 마주치는 것 자체가 겁나게 되버리는 거야. ㅠㅠㅠ 내가 감당할 수가 없어서. 이런 심정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다. ㅠ
그 뒤로도 체육대회랑 축제 때 에피소드가 몇 개 더 있는데 다 건너뛰고...그러던 어느 날 1학년 겨울방학 직전의 일이야. 방학 때 다닐 학원 알아보는데 중등고등 학원이 같은 건물에 있는 학원이 있었어. 그런데 친구가 말해주길 그 학원에 그애의 남동생 여동생이 다닌다는 거야. 중등반에.(남녀 쌍둥이 동생이었고 그때 그애들은 중1.) 소문 몇 마디 듣기로는 오빠이자 형인 그애가 두 쌍둥이 동생을 케어하는 입장이었다나 봐. 둘끼리는 되게 현실남매처럼 티격태격하는데 오빠형 말이라면 꼼짝 못한다고. 밖에서 가정교육 못 받은 애들처럼 굴면 엄청 혼나고 시험 성적 많이 떨어지면 둘이 나란히 서서 손바닥도 맞는다 하더라고.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다나 봐 ㅎㅎ ;;; 이건 좀 이질적일 수 있는데, 다른 애가 그러면 오글거리거나 똑같은 형제끼리 웬 훈장질이야 하고 반감 일어났을 텐데. 그애가 그럴 걸 생각하면 이상하게 더 두근거리더라. 쌍둥이니까 부모님이 다 보살피고 통제하기엔 무리였을 수도 있다 싶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그랬다니까 어린 그애가 어린 동생들 세워놓고 훈계하는 거 상상하니 그건 또 그것대로 귀엽기도 하고. 고등학생인 그애가 그럴 거 생각하면 이상하게 두근. 그애가 반장 노릇하는 거 보면 동생들한테 얼마나 극진할지도 다 그려져서 그애의 여친이 못된다면 동생이라도 되고 싶단 애들까지 있을 정도였어. ㅎ 그 쌍둥이 애들은 OO이 동생들로 더 유명했고. 암튼 그러다 보니 그 학원에 다니면 그애를 방학 때도 볼 확률이 있다는 거지. 걔가 챙기러 올지도 모르잖아. 참고로 그애는 학원이라고는 실용음악이나 복싱 같은 취미 학원만 다니고 공대 다니는 사촌 형한테 수학 과외만 받는다고 들었어. 영어는 인강 듣고. 나는 그 학원에 다니기로 했어. 그러곤 역시나 어느 날 그애랑 또 마주칠 일이 생겼지.
그 학원에는 나한테 그 정보 준 친구랑 같이 등록했어. 그런데 방학 하고 2주가 지나도록 그애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 거야. 대신에 그애 동생들만 종종 마주쳤지. 귀엽더라. 둘이 같이 다니는 건 아닌데 그냥 따로 떨어져 있어도 둘끼리 너무 닮아가지고 누군지 다 알 것 같았고. 올 땐 각자 자기 친구들하고 어울려 오는 것 같은데 집에 갈 땐 둘이 같이 갈 때가 많은 것 같더라고. 하여간... 같이 등록한 내 친구는 학원 재미없다면서 자주 빠졌어. 그러다 보니 난 그애를 보겠다는 목적도, 또 친구랑 같이 학원 다니는 재미도 잃은 채로 혼자 그저 공부만을 위해 밋밋하게 다니고 있었어. 그러던 그날도 학원 마치고 나가는데 건물 밖에 그애가 떡하니 서 있는거야. ㅠㅠ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또 모른척, 고개 숙이려다가 용기 내갖고 그 애를 바로 쳐다봤다? 그랬더니 그애가 날 똑바로 쳐다보는 거야. 그러면서 표정으로 말을 하는데 그 표정을 해석하자면 뭘 잔뜩 기다리는 듯이 기대하는 눈빛 있잖아. 귀쫑긋 표정. ㅋㅋ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할 거지?'라는 표정 있잖아. 하. 말로 설명하기가 정말 힘들다. 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그 표정에 나는 말하고 말았어. "안녕?"이라고. ㅠㅠ 그렇게 먼저 인사했더니 그애가 한시름 놓인 것 같은 얼굴로 "응. 안녕." 하더라. ㅋㅋ 이 안녕이라는 말을 먼저 뗀 내가 나 자신도 너무 기특했고, 그런 걸로 기특한 내 자신이 좀 한심하기도 했어. 그때 걔가 "너 이 학원 다녀?" 묻더라고. 그러면서 자기 동생들도 여기 다닌대. 난 "다 알고 여기로 접수했다."라고 속으로만 이실직고를 하면서... 하, 좀 창피했어. 속으로나마. 스토커 같잖아 ㅠㅠ아니, 실제 스토커지 뭐야.ㅠㅠ 팬으로 치자면 사생팬이고. ㅠㅠㅠ 암튼, 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아, 그래? 그렇구나"라는 아주 부자연스러운 답변을 했고, 그애는 나한테 묻더라고. "중등부 애들은 아직 안 끝났을까?"라고. 동생들 기다리는 모양이었어. 근데 건물만 같은 거지, 나도 언제 어떻게 시작하고 끝나는지 정확히는 몰랐거든, 그래서 "잘 모르겠어."라고 이때는 거리낌 없이 정직하게 말했어. 근데 가만 보니까 그애 손에 봉투가 들려 있고 그 안에 핫도그가 있는 거야. 동생들 주려고 사왔나 봐. 품에 안고 있더라고.-겨울이어서 춥기에 식을까 봐 그런 건지. ;;ㅎㅎ 눈에 뭐가 씌다 보니까 별게 다 신선하더라. 보통은 분식집 같은 데 데려가거나 하지 그걸 싸들고 오진 않잖아. ㅋㅋ 근데 무슨 영감마냥 그걸 사가지고 품에 안고 온다는 게. 재밌기도 하고 친근했어. ((읽어주는 사람들, 고마워요. 근데 나도 짬내가면서 쓰는 거여서 일사천리로 쓰지 못하고 6시면 여길 나가야 한다는 점 이해해주세요.))
(참고로 방학 전에 있었던 축제 때는 나와 그애의 개인 에피소드라기보단 그애 단독의 에피소드야. 그래서 학원 다니던 이때까지도 아직 마주치면 어색어색하던 사이^^;;) 그렇게 핫도그에 시선이 꽂히고 나도 모르게 풉, 웃었던가. 빙그레 웃었던가. 하여간 웃은 모양이야. ㅠㅠ 그랬더니 그애가 "왜 웃냐." 함. 그런데 내가 거기에 대고 "핫도그 사들고 온 모습이 귀엽고 의외여서'라고 할 만한 강심장이 못 되잖아. 그래서 그냥 "아, 동생들한테 주려고 사왔어? 맛있겠다."라고 나답지 않게 길게 말했어. 그랬더니 핫도그 세 개 중에 하나를 꺼내들어 나한테 내밀더라. 다른 말도 안 하고 그냥 "자"라고만 하면서. 나 먹으란 소린가?? 설마, 나 주는 거?라는 생각에 엉겁결에 받아 들긴 했어. 받아들자마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준다고 그냥 받은 거야? 사양도 한 번 안 해보고? 라는 생각에 뒤늦게 나 자신한테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멍을 때렸어. ㅠㅠ 그러자 그애가 "응. 들고 서 있으라고 줬어."라고 하는 거야. 내 마음속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ㅎㅎㅎ ㅠㅠㅠㅎㅎ 난 또 볍신 오브 더 볍신처럼... "아, 응. 그래... "하고 때리던 멍을 계속 때리려는데, 그애가 그냥 풉하고 웃더라. 그러더니 먹으래 ㅠㅠ 나 먹으래 ㅠㅠㅠㅠㅠ
"먹어."라고 짧게만 말하고 그냥 날 멀뚱히 바라보더라? 꼭 먹는 거 보겠다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못 먹겠잖아. 그래서 "아, 그럼 나 갈게..."라고 하고 가던 길을 가려는데 그 말 마치기가 무섭게 그애가 "앗. 안돼."이러는 거야. 놀라서 멈칫했지. 하기사 지나가다가 핫도그만 하나 얻고 그냥 가다니 이건 먹튀니까 좀 그런가? 싶었는데 그애가 말하길 "걸으면서 먹는 건 없어 보여서 안 되고. 여기 서서 다 먹고 가."라는 거야. 읭?? 서서 먹는 건 괜찮고 걸으며 먹으면 안 된다니. 이건 무슨 논리지? 싶으면서도 어쩐지 납득은 되더라. 포장마차 같은 데서도 서서 먹는 거니까 그건 정식으로 쳐줄 수 있지만 걸어다니며 먹는 식당은 없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그애의 논리를 내가 정당화시켜주면서 한 입 먹었어.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해요. 죄송해요. ㅠㅠ 컴퓨터 쓸 수 있으면 또 이어서 쓸게요.))
((핫도그 한 입 먹은 데까지 얘기했죠? 나도 이날의 일은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아서 이어서 쓸게요.)) 한 입 베어물고는 천천히 씹었어. 마치 잘 먹는지 못 먹는지 검사 받는 것 같은 마음이 되어서 땅바닥만 쳐다보고서 먹는데, 그애가 "그런데 OO야"라고 다시 말을 거는 거야. 그래서 "응" 그랬더니 "혹시라도 네가 어른들 앞에서 실수할까 봐 말해주는 건데..."라면서 살짝 말끝을 흐려.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씹던 거 멈추고 그애 얼굴을 봤다? 그러니까 그애가 되게 자상한 말투로 "누가 먹을 거 주면 먼저 고맙다는 표현부터 하고 먹어야 하는 거야." .... 그 말 듣고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막 숨고 싶어졌어. 그렇잖아. 좋아하는 애를 우연히 만나서 핫도그 맛있겠다고 탐내다가, 엉겁결에 핫도그 받고 그애 앞에서 우걱우걱 핫도그 씹다가 고맙단 인사도 안 하고 먹냐고 지적받고 있는 거잖아. 객관적으로 그런 거잖아. 그래서 씹던 거 삼키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아마 울상 지었을 거야 ㅠㅠ-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그애가 좋았어. 그 또래 애들 보면 특히나 남자애들, 그럴 때 보통 “야, 넌 고맙단 말도 안 하냐?” 이렇게 튀박 주잖아. 근데 이런 식으로 돌려서 말하는 게 좋으면서도 더 얄궂기도 하고. 그 말을 듣게 만들잖아. 그래서 “고마워...” 했어.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핫도그가 세 개였잖아. 그래서 “이거 너 먹으려고 산 거였지? 내가 뺏어먹은 거네. 미안해.”라고... 예절 중시하는 애란 거 다시 상기하고는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어. 그랬더니 그애가 나 빤히 쳐다보면서 이런다. “그럼 한 입 주든가.”
그때 진짜 얼굴 터지는 줄 알았다. 후끈하게 달아오르다 못해서 터져버릴 상태... ㅜㅜ 그런데 한 입을 어떻게 줘. 내가 먹던 거여서 침도 조금 묻은 거 같고, 걔랑 나랑 한 입씩 핫도그를... 어떻게 나눠 먹어. 어떻게 그러냐고. ㅠㅠ 그래서 또 여기서 바보 같은 말을 했어. “싫어, 그건...”이라고. ㅠㅠㅠ 그랬더니 걔가 “와아. 하하하.” 웃더라고. 기가 찬단 듯이. ㅋㅋ 내가 봐도 웃기지. 뺏어 먹어서 미안하긴 한데 한 입 주는 건 싫다라니... 이쯤 되니까 나도 그냥 어처구니가 없고 웃음만 나고 해탈하게 되더라. 어디 숨을 데도 없고 그냥 핫도그 들고서 냅다 튀고 싶은 심정이었어. 근데 그 애가 갑자기 “안 되겠다.” 이러더니 “들어가자.” 하는 거야. 어딜 들어가나 싶었는데 그애가 앞장서서 학원 안으로 들어가더라고. 이때다 싶어서 그냥 가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이제 진짜 영영 못 볼 것 같고. 귀신에라도 홀린듯이 따라 들어갔는데, 걔가 학원 로비에서 두리번대는 거야. 그러더니 “여긴 어떻게 자판기도 하나 없냐.”라고. 그러면서 정수기 있는 데로 가서 일회용 컵에 정수기 물 받아가지고 오는 거야. “마셔.”라고 나한테 내미는데 으어... 떨려서 받을 수가 있어야지. 자판기 컵이 작잖아. 그애랑 손이라도 닿으면 어떡해. 그런데 그애 손이 부끄러울 것 같아서 진짜 진짜 발끝에서부터 용기란 용기는 다 끌어내가지고, 내 육안으로 봐도 내 손이 떨리는 걸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았어. 근데 지금 생각해도 이 애의 자상함은 정말 완벽했던 게, 그 와중에 미지근한 물이었던 거야. 작은 컵에 찬물 뜨거운 물을 조금씩 받아서 준 거였어. ㅠㅠㅠ 날도 춥고 거기다 지적까지 받아서 굳었으니 목 메여 보였나 봐. 물도 먹을 거니까 난 잊지 않고 “고마워”라고 인사했고. 성수라도 되는 양 그 물을 조심스럽게 넘겼어.
휴... ;;; 솔직히 그때 그 물 받아 마시고는 그다음 그애의 멘트라든지 뭐가 더 있긴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 아무래도 그때 내 정신이 아니었던 거 같아.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어. 그렇게 핫도그 하나를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게 다 먹을 즈음에 중학생 애들이 우르르 몰려 내려오더라. 순간 꿈에서 깨는 느낌이랄까? 이제 동생들 오면 얘도 가는 거잖아. 짧지만 좋았던 꿈에서 깨는 기분. 그래서 “나 이제 갈게”라고 하려는데 그애가 중학생 애들 중에 누구 한 명 붙들고 뭐 물어보려는 거야. 그래서 인사할 타임을 놓치고 서 있었는데, 아무래도 자기 동생들 이름 대면서 아냐고, 둘도 곧 내려오는 거냐고 묻는 거 같았어. 그런데 붙들린 애가 “둘다 오늘 안 왔는데요?”래. 순간 그애 얼굴이 굳음. 몸도 경직됨. 순간 느꼈지. 얘 화났다. 그애가 우리 반 반장이었던 중 2때 가끔 봤거든. 걔 화난 모습. 화나면 순간 멈추는 게 그애 특징이야. 순간적으로 작동을 멈춘 것처럼 돼. 아주 순간이지만. 그래서 나까지 굳었어. ㅠㅠ
핫도그를 급하게 먹어선지 아님 그애가 화난 게 무서워선지 가슴팍이 콱 막히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말도 못 걸고 그렇다고 가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그애가 로비에 비치된 의자에 털썩 앉더니 “이럴 줄 알았어.” 하는 거야. 뭔가 허탈해하면서 배신감 느끼는 표정? 난 뭐라 할 줄 모르고 있다가 주춤거리면서 말 걸었어. “연락 해보고 오지 그랬어...” 그럼 허탕칠 일도 없으니까. 그랬더니 그애가 이러는 거야. “불심검문할 때 전화하고 오는 사람도 있어?” 그러면서 웃는데 순간 섬뜩하더라. ‘이럴 줄 알았지’란 말과 ‘불심검문’이란 말이 서로 연결되면서. 직감적으로 알았지. 쌍둥이 남매는 오늘 죽었다. ㄷㄷㄷ ㅠㅠ ;; 그런데 순간 왠지 좀. 그 동생들이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어. 2주밖에 안 됐지만 오며가며 그애들 자주 봤거든. 2주 만에 오빠 형이 애들 학원 잘 다니나 살피러 왔는데 딱 그날만 애들이 땡땡이 친 걸 수도 있잖아. 내가 맨날 확인한 건 아니어도 최소 애들이 맨날 그런 건 아니니까. 그래서 “동생들 학원 잘 다녀. 다른 날은 안 빠졌어. 진짜야.” 동생들 안 믿었다면 핫도그는 왜 사들고 온 건데? 라는 생각도 들면서... 내가 동생들 항변을 하게 되더라. 그러자 그애가 앉은 채로 날 올려다보면서 이러는 거야. “네가 어떻게 알아?” 그 순간, 헉. 육성으로 헉 소릴 내고 말았지.
진짜 헉이었어. 지금 생각해도 참 바보였지. 멍청하려면 온전히 멍청하든가 아니면 완벽하게 영리하든가. 왜냐하면 그애는 내가 그애 동생들하고 같은 학원 다니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잖아. 좀 아까 학원 앞에서 만났을 적에 내가 모르는 척했으니까. ㅠㅠ 멍청한 주제에 그런 사실은 왜 그렇게 빠르게 떠오르는 거냐고. ㅠㅠ 그애가 그렇게 묻는 순간 동생들 다니는 학원으로 일부러 끊었다는 것까지 걸려버린 것처럼 몸둘 바를 모르겠는 거야. 울 것 같더라. 그래서 실제로 울먹여졌던 거 같아. ‘네가 어떻게 알아?’라는 한마디에 모든 걸 들켜버린 듯 당황스럽기도 하고. 왠지 너무 무서웠어. 꿈만 깨면 좋은데 좋은 꿈에서 갑자기 악몽으로 변하는 것처럼... 그렇게 울먹여지는 거 참으면서 서 있는데 그애가 돌연 일어서더니 내 어깨에 손 올리면서 “아 미안해.” 이러는 거야. “내가 순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랬어. 미안.” 하면서 사과를 해. 거기서 긴장 풀리면서 나도 모를 말들이 술술 나오더라. “네 동생 모르는 애들이 어딨어. 너 유명하잖아. 그래서 네 동생들도 다 알아. 이 학원 다니는 사람들 다 알아. 나만 아는 거 아니야.”라고. 두서도 없이. ㅠㅠㅠㅠ 말하다 보니 더 이상한 변명만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마음은 안정이 되더라.
글이 좀 늘어지는 것 같으니까 그 뒤로 이어진 이날의 얘기는 최대한 빨리 적어볼게. 그애는 내가 뭐라고 하든 다행히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바로 폰 꺼내더니 동생한테 전화하더라. “어디야?”라고 묻는데 동생이 뭐라고 대답하자 그애가 고갤 숙이더라고. 그러더니 “형은 지금 어디 있을 거 같아?” 이러는 거야. 으어. 이어서 입술을 한번 깨무는가 싶더니 “학원 빠지는 거랑 거짓말하는 거랑 뭐가 더 나빠?”라고 하는데, 동생에게 내가 다 말해주고 싶더라. 남동생한테 건 걸 거니까, 그리고 남동생은 이미 형한테 학원 마치고 들어가는 길이라고 뻥친 것 같으니까. 여동생한테라도 오빠한테 전화 오면 사실대로 말하라고 알려주고 싶더라고. 오빠 화 많이 났다고. (일례로 그애랑 같은 반일 때 이런 일이 있었어... 라고 샛길로 빠져들고 싶은 걸 정신줄 잡고 이어서 씀) 아무튼 그애 말에 동생이 아무래도 굳어버린 것 같았어. “대답 안 할 거야?”라고 되묻는 걸 보니 그랬어. 그러곤 곧장 또 물어보더라고 “**이는 지금 어디 있어?” 여기서 **이는 여동생. 그러더니 동생이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더 말하려는 걸 끊는 투로 “형 한 시간 있다가 집 도착할 거니까 그전에 **이랑 같이 들어와 있어.”라고 하고 끊는 거야. 그런데 그 말투가 화내는 것도 아니고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실만 전달하는 것처럼 건조해가지고. 내 간담이 다 서늘해지더라. 난 거기서 “난... 갈게...”라고 두 번째로 ‘가겠다’ 찬스를 썼어. 도망치고 싶어져서. 그런데 그 말을 너무 기어들어가게 한 건지 아님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그애가 대뜸 자기 말을 늘어놓는 거야. “쌍둥이들은 이래서 골치야. 무슨 잘못을 저지를 때 절대 단독으론 안 해.” 라고. 그 말에 문득 그게 뭔 말인지가 궁금해지더라. 그래서 그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는데 이런 논리였어. “한 녀석만 잘못하면 다른 녀석이 일러바칠 거잖아.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렇게 학원 빠지고 싶으면 다른 한 녀석도 꼭 공범으로 만들어. 너도 빠지라고. 그러곤 다음 잘못을 할 때 그 빚으로 같이 잘못해주고. 한마디로 연합군인 거야.” 그러면서 나한테 묻더라. “넌 동생 없지?” 다른 사람은 아마 웃을 거야. 그 말에 얼마나 행복하고 가슴 뛰었는지 알면... ‘너는 동생 있어?’가 아니고 ‘넌 동생 없지?’라고 물은 거. 나에 대해 알고 있잖아. 내가 동생 없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게 그렇게 행복하더라고. 바보 같지? ㅠㅠ
그러면서 두 동생을 케어한다는 게, 특히나 쌍둥이 동생 케어가 이렇게 힘든 거구나,를 알게 되면서 그애가 한층 더 우러러 보인달까. 다른 세계 사람 같았어. 나는 먼 터울의 언니만 한 명 있는데 언니랑은 집안 사정상 서먹했고, 그나마도 직장 때문에 따로 떨어져 산 지 오래였어서. 거의 외동딸처럼 지내던 터라. 더군다나 다른 친구들의 오빠들하곤 뭔가 많이 다르잖아. 쌍둥이 애들, 오늘은 엄청 혼날 테지만.. 그래서 달아나라고 소리쳐주고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신경 써주고 관리라면 관리랄까, 내 행동이나 공부에 관심 가져주는 오빠 형이 있단 게 부러웠어. 그리고 학원 안 빠졌으면 핫도그도 먹고 즐겁게 집에 가는 거였잖아. 그런데... 내가 먹탐 부리는 애는 아니긴 한데...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에 식어가는 핫도그가 너무 신경 쓰이는 거야. 그래서 “집에 가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려?”라고 물었어. 얼른 가서 더 식기 전에 동생들한테 핫도그는 줘야 할 거 아냐. 그래서 그렇게 물었던 건데 그애가 너무 간단히 “아니.”라고 답하는 거야. 그럼 왜 한 시간 지나서 간다고 했을까, 생각하는데 그렇게만 답하고는 터덜터덜 학원 밖으로 나가더라. 뒤쫓아 나갔지. 이제야말로 진짜 가는구나 싶었는데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애가 하는 말이, “돈 있어?” 이러는 거야. 나는 “엥?” 말 그대로 엥, 그러다가 속으로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카드 준 게 있었어. “응. 있어.” 했더니 “시간은?” 이럼. ㅜㅜ 그냥 집에 갔어야 했나 봐. 그 순간에 심정지로 죽을지도 모를 운명이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있어.”라고... 뜸 들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 적응하느라고 좀 시간차 두고 답했는데. 내 대답 듣자마자 말하더라. “그럼 밥 사줘.” 응이든 아니든 뭐라 대답도 못하다가, “아, 아니, 그게...”라면서 머뭇거리니까 그애가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러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한마디를 던지더라. “배고파.” 라고.
우리는 걸었어. 한동안은 둘 다 말이 없었어. 나는 그저 어지러워지더라. ‘돈 있어?’ ‘시간은?’ ‘밥 사줘.’ ‘배고파.’ ‘돈 있어?’ ‘시간은?’...세 글자로 된 이 말들만 계속해서 머릿속을 뒤죽박죽 맴돌면서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르겠고 아무 정신이 없더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라고 지금 처한 상황을 나 자신한테 설명해보려 해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거야. 생각해봐. 3년 가까이 짝사랑하고 있는 애랑 갑자기 이러고 있다는 게... 반이 갈리고 또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몇 마디 주고받아본 적도 없는데... 느닷없이 이렇게 얘랑 단둘이 길을 걷고 있다니. 걷고 있다는 그 자체가 현실감 없이 느껴지더라. 누가 볼까 봐 신경 쓰이기도 했어. 아니 남들이 뭐라 하기 전에 나부터가 내가 뭔데 얘랑 같이 밥을 먹으러 가지?라는 생각마저 들었어. 내가 자존감이 좀 낮을 순 있는데 꼭 그래서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나 때문이 아니야. 그 애 자체가 그런 애인 걸 어떡해. 누구랑 조금만 특별한 장면이 연출되어도 그날 바로 “야야, 알어?”라고 하며 소문 쫙 나는 그런 존재였는걸. 왜 드라마나 소설 같은 데 보면 인기 많은 훈남 주인공 주변엔 꼭 허물없이 대하는 여자친구가 있잖아. 모두가 그애 앞에 서면 얼굴 붉힐 적에 그 여사친만큼은 막 뒤통수도 팍팍 때리고 헤드락 걸고 그렇게 말괄량이처럼 구는. 그러다가 결국 둘이 썸타거나 사귀게 되거나 그런 패턴도 있고. 그런 여자친구가 그애에겐 없었어. 중학교 때부터 한 번도 못 봤다. 그 애 주변에는 여자애들보다 남자애들이 훨씬 많았고, 그 무리에 단독으로든 짝지어서든 끼어든 여자애는 없었던 거야. 왜 그럴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어떤 격 같은 게 느껴져서 그런 것 같아. 그애부터가 여자애들한테 함부로 대하질 않았거든. 가끔씩 장난치는 말을 던져서 웃기는 적은 있어도 선을 넘지를 않는 거야. 마치 이 애의 뇌 속에 여자란 존중하고 조심해줘야 하는 존재,라고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뭐라 설명이 안 되는데 하여간 모든 말이나 행동에서 그게 느껴졌어. 예를 들어 피구 같은 거 할 적에도 여자애가 공 맞는 거 막아주다 어쩌다 손으로 터치하게 되면 반사적으로 “아 미안” 하고 얼른 두어 발짝 물러선다든지. 그런데 그게 과장되어 보이지 않고 되게 자연스러운. 그렇게 섬세하게 조심해주는 게 있었어. 든든하게 흔들림 없는 건 좋은데 누구에게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포스. 그래선지 그 애를 대하는 여자애들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편함, 친숙함, 이런 것보다는 설렘이 깔려 있었고 어려움이란 것도 동시에 깔려 있었어. 불편함과는 달라. 그냥 좀 어려운 거였어. 그러니까 그 설렘 같은 걸 뚫고서 허물없는 관계로 진척시킬 만한 여사친이 없었을 거 같아. 내가 분석하기론 그랬어. 그리고 그 심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내가 자존감 없어서가 아니라는 거 설명하려다 이렇게 또 길어졌다. ㅠㅠ 되게 되게 긴장되고 몸둘 바 모르겠는... 꼭 내게 어울리지 않는 명품 옷을 갑자기 걸친 것처럼. 좋다는 걸 느끼기 전에 어쩐지 곤란하고 어색한, 그런 기분으로 그 길을 걸었던 거 설명하고 싶었어.
“어? 어, 그래...”라고 대답하고 걸었던 걸로 기억해. 걷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미안하지만, 암튼 한동안 둘 다 말없이 걷다가 그 애가 먼저 말했어. “뭐 사줄 거야?”라고. 난 정신이 멍해져서 목적지도 정처도 없이 걷고 있었던 건데 그 애가 보기엔 내가 어디 정해 놓고 가고 있는 줄 알았나 봐. 그래서 내가 가는 대로만 쫓아온 건 가 봐. ㅠㅠ 사실 다시없을 기회잖아. 그 애랑 단둘이 밥 먹는 거. 그래서 좋은 데 가고 싶었어. 어디로 갈지 뒤늦게나마 머리를 엄청 바쁘게 굴리고 있는데 “너 좀 매콤한 거 먹고 싶지 않아?”라는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했더니 “핫도그 먹었으니까.”라고 당연하단 듯 말하더라. 그러더니 “그럼 천국 가자.”라는 거야. 그렇게 우린 천국에 갔어. 김밥천국에. ㅠㅠㅠㅠㅠㅠ 미안해. ㅠㅠ지어서라도 더 근사한 데 갔던 걸로 해두고 싶은데. ㅠㅠㅠ 하지만 천국에 들어서자마자 유리창 앞에서 김밥 마시는 아주머니 있잖아. 그분한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더라고. 여기서 새삼 반했어. 식당 나올 때 ‘잘 먹었습니다’ 하는 사람은 많아도 들어가면서부터 인사하고 들어가는 사람 잘 없잖아. 근데 거기서 또 하나 배웠다? 김밥 마시는 아주머니, 바쁘셔서 건성으로 답하거나 본 척 만 척 하실 것 같잖아? 근데 아니더라. 단골도 아닌 것 같고 거의 처음 온 것 같은데도 “아유, 어서들 와요. 밖에 춥죠?”라고 너무 반갑게 인사 받아주시는 거야. 기분 좋아하시면서 말야.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어. 나중에 나도 혼자 오더라도 꼭 인사 해야지 하고. 그렇게 작은 깨우침을 하나 얻고 자리에 앉았는데, 앉자마자 그 애가 묻더라. “내가 억지로 데려온 거 아니지?”라고. 억지로라니..... 누가 나한테 수능 문제 다 알려준다 하더라도 이 기회랑은 안 바꿀 것 같은 순간인데.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색한 얼굴로 “아, 아냐...” 했더니 이러는 거야. “억지로면 어때. 데려왔단 게 중요하지.” 혼잣말처럼 툭 내뱉더니 “안 그래?” 하고선 해말간 웃음을 짓더라.
무슨 뜻일까?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라고 어리둥절한 사이에 그애는 메뉴를 골랐나 봐. “난 참치 김밥 먹을 거야. 넌?”하고 묻더라고. 심장은 심장대로 나대도록 놔두더라도 그 말이 좀 속상했어. 더 좋은 거 사주고 싶었는데... 그래서 “비싼 거 먹어도 돼.”라고 했다. 말하고 보니 여긴 김밥천국.ㅠㅠㅠㅠ 아무리 비싸봤자...;; 내가 말하고도 내가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그 애는 “어, 진짜?”라고 땡잡은 표정 짓는 거야. 그러더니 또 골똘히 메뉴 종이를 살펴. 이러다 막 이것저것 몇 만 원어치 골라버리려는 거 아냐? 싶을 정도로 고개 처박고 “음... 어....” 막 이러더니 “그럼 모듬김밥 먹어도 돼?” 이럼. -.-;;; 세상천지 가장 비싼 거 시킨 것마냥. 그나마 김밥 중에 제일 비싼 걸로 고름. 너무 늘어지는 것 같으니까 주문한 거 나올 때까지 세세한 과정은 생략할게. 참고로 난 쫄면을 시켰어. 걔 말대로 좀 매콤한 거 먹고 싶어서. 아, 근데 내가 쫄면 시킬 때 그 애가 그랬어. “따뜻한 거 먹지 그래? 뱃속 차가워지잖아.” 이러는데 그 순간에 내가 만약 얘 여친이라면 그냥 먹으란 대로, 시켜주는 대로 먹을 것 같았어. 근데 여친도 아니면서 걔 걱정 받는다는 게... 그러면서 ‘아 그래.’ 하고 순순히 그 애 말대로 한다는 게 왠지 내가 너무 나대는 것 같은 거야. ㅜㅜ 좀 이상한 마음이지? 근데 그랬다. 그래서 “난 쫄면 먹고 싶어.”라고.... 그 애랑 별 상관없는 애답게 굴었어. ㅠㅠ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 애 눈치를 살피게 되더라. 그런데 그 애는 아주 잠깐 나 쳐다보는가 싶더니 바로 손 들어서 “저, 여기 주문하려고요.” 하고 아주머닐 불렀어. 아주머니 오시니까 “저희는요, 모듬김밥 하나하고.”라고 한번 끊고는 “쫄면 맞지?”라고 다시 내 눈 쳐다보면서 확인하는 거야. ㅜㅜ 그때 그냥 쫄면 철회하고 떡볶이든 오뎅이든 따뜻한 걸로 바꿔버릴까 하는 마음이 마구 샘솟더라.... 근데도 그냥 끄덕여버렸어. 그랬더니 “쫄면 주문하겠습니다.”라고. 가볍게 목례까지 하며 주문지도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드리면서 주문을 마치더라. 내가 왜 그랬을까. 예뻐 보이고 싶었는데... 착해 보이고 싶었는데.... 그 애가 바라는 모습대로 되고 싶고 그 애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싶은 게 내 소원인데ㅠㅠ 그렇게 쫄면과 모듬김밥을 앞에 두니까 그제야 뭔가 좀 실감이 났어. 그 애랑 둘이 밥 먹으러 왔다는 사실이.
김밥하고 쫄면이 동시에 나왔어. 보통 김밥이 먼저 나오는데 일부러 속도 맞춰주신 건가 싶을 정도로 한 쟁반에 담아다 주시더라고. 음식 나온 거 보더니 “감사합니다.” 아주머니한테 인사하곤 ‘이제 먹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웬걸. “잘 먹겠습니다.”라고. 내 쪽 향해 살짝 몸 구부리며 꾸뻑하는데, 허억 ㅠㅠ 그야말로 먹지도 않고 급체할 뻔. 왜 이런 데서 심쿵거리는 건지.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인 걸 텐데도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다는 게 함정. ㅠㅠ 나만 괜히 못 배운 티 내는 거 같아서 나도 덩달아서 한다는 말이 “네, 잘 먹겠습니다.” 였어. 걔가 그럴 땐 멋있어 보였는데 내가 하니까 되게 오글거리고... 으악. 당장에 이불킥을 못하니까 허공에 발장구라도 치고 싶어지더라고. 그앤 웃음 참는 얼굴 되어 있고. ㅠㅠㅠㅠㅠ 눈도 못 마주치겠어서 쫄면이나 한 젓가락 집으려는데 “김밥부터 먹어.” 이러는 거야. “응?” 너 먹으라고 시킨 건데. 내 쪽으로 접시 조금 밀어주면서 얼른 먹으란 듯이 기다리더라고. 왜 그러지? 하고 있는데 “먹으라고 했다고 한꺼번에 두 개씩 집어먹고 그러진 마라.” 하면서 픽 웃어. 헐... 모듬김밥이어서 한 입에 하나도 다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아니 설령 들어간다 하더라도 내가 설마 니 앞에서 김밥 두 갤 입에 집어넣을 수 있겠어? 속으로만 중얼거리는데 “속 버리니까 밥 들어간 것부터 먹으라고.” 라면서 쫄면 위로 하나를 살포시 올려주는 거야. 하... 자꾸 나한테 뭘 먹으라고 주니까.... 아까는 핫도그 주더니 이제 김밥까지 주니까... 아까 그 애한테 배운대로 “고마워” 하고 먹었다.
그러곤 김밥에 국물 나오잖아.(쫄면엔 안 나왔음) 그것도 자기가 입 안 댄 숟가락으로 한 입 떠서 먹어보더니 “안 짜다. 이것도 먹어.”라면서 내 쪽으로 밀어주고. 무슨 엄마인 줄...;;; 밥은 내가 사주기로 했는데 왠지 내가 대접 받는 기분이 되었어. 그러면서 너희 반은 괜찮냐느니, 공부는 잘 되냐느니 그런 것 묻더라. 마치 저녁식사 자리에서 식구끼리 이것저것 묻는 것처럼. 평범하지만 관심 가져주는 질문 있잖아. 나는 그렇게 재잘거리는 성격이 못되어서 거의 단답으로만 대답하는데, 하나 발견한 게 있었어. 그 애는 밥 씹을 때는 절대 말 안 하고 다 삼키고서 말하는 거야. 그러다 보니까 걔가 뭐 물어보고 그다음에 내 답이 짧으면 그 애가 씹어 삼키는 동안 또 말이 끊기잖아. 그래서 내 말이 조금씩 길어졌어. 그러다가 “너는 어때?”라고 물어보게도 되고.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게 아까 쌍둥이들 때문에 화났었잖아. 내가 쫄아버릴 만큼. 그거 다 풀린 건가 싶어서... 물어봤다? “근데 너 기분 괜찮아?”라고. 그랬더니 “응. 왜?” 하면서 먹던 거 멈추고 의아하단 듯이 되묻더라? 그래서 “아니... 아까 동생들...” 그랬더니 “아.” 하면서 갑자기 표정 굳음. 그러더니 “글쎄..”라고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여자친구가 바람핀 거 보면 이런 심정일까?”래. 그만큼 배신감 느껴졌단 건가 봐. 이럴 줄 알았다더니 그래도 믿었던 건가 봐. 근데 그때 나 자신도 못 믿을 만큼 대범한 말이 나왔어. “근데 넌 여자친구도 없잖아.”라고. 말하고 나니까 왠지 놀리는 멘트처럼 들릴 수도 있었겠다 아차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겁나는 거야. ‘아닌데? 나 있는데?’ 할까 봐...ㅠㅠ ;;
그때 그 애 표정이 갑자기 묘해지더라. 그러더니 “맞아. 나 여자친구 없지.” 그러는 거야. 괜히 내가 다 미안해지게... 요즘 말론 갑분싸라고 하지? ㅠㅠ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었는데 그 애가 말을 이었어. “그래도 짝사랑은 해본 적 있어.”래. 허.... 이게 무슨 말이야.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난 내 귀를 의심했지. 짝사랑이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니가 짝사랑을 해? 갑자기 심멎되면서 머릿속에서 전깃줄 혼선된 것처럼 답이 안 나오더라. 그렇잖아. 중학교 때부터 내가 다 봤는데. 전교생이 전부 다 너 좋아하는 건 아니더라도... 거의 그럴 기세로 인기 많았고 지금도 많은데. 누가 너한테 짝사랑을 시켜?? 멎은 것 같았는데 멎은 게 아니었어. 얻어맞은 것처럼 아픈 거였어. 심장이. 너무 세게 맞으면 마비되듯이 묵직하게 아픈 거 있잖아. 근데 자랑처럼 말하더니만 다시 말이 없어지더라. 이상하게 진지한 얼굴이 되어서 김밥 하나를 입에 넣더라고. 김밥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그래버리니까 난 더 궁금해졌어. “언제...?”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안 물어보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내 말에 또 침묵이 흘렀어... 그래서 “미안해. 이런 거 물어봐서....”라고 사과했어. 사실은 언제인지만 궁금했던 게 아니라 누구인지, 얼마나 오래 짝사랑한 건지 다 묻고 싶었는데... 그 애랑 분위기 나빠지는 게 너무 싫었어. 울 것 같은 기분이 되더라. 짝사랑은 내가 너한테 하는 게 짝사랑이지. 넌 아니었을 거야. 라고... 괜히 초라해지면서 먹먹해졌어. 그 애한테 짝사랑 받은 애가 너무 부럽고. 밉기도 하고. 왜 짝사랑에 그쳤을까는 너무너무 궁금하고.
“화난 거 아냐.” 그때 그 애가 그렇게 말했어. 안심시켜주듯이. 내가 또 울상되니까 무서워서 그런 줄 알았나 봐. 그러더니 “무지 좋아했었다.”라는 거야. ............여기서 마비된 듯 저리는 심장에 큰 바위가 와서 박히는 것 같았어. 먹던 쫄면을 앞에 두고, 김밥 몇 개를 앞에 두고, 차라리 죽고 싶더라. 짝사랑하는 심정 누구보다 내가 잘 알잖아. 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이 나한테 얼마나 큰 의미가 되는지, 또 일기장에조차 털어놓지 못하는 가슴앓이. 몰래몰래 쳐다보면서 혼자 상상의 나래 펼쳐보고, 그러다 또 혼자 비참해져서 헛웃음 짓게 되고. 혹시라도 그 애가 다른 누굴 사귀게 되진 않나 노심초사 하게 되고. 미친 척하고 고백해볼까 하다가도 그러다 진짜 미치는 일 생길까 봐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하고. 누군가 그 애 마음에 그런 존재였다는 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그 순간 나는 돌덩이가 되었어. 능청스럽게 물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이것저것 뭐든지 말이야. 그런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 마음이 들통날 것 같아서. 몸은 경직된 채로 입만 겨우 움직여서 말했어. “그랬...구나.”라고. 오랜만에 나오는 볍신미였어. ㅠㅠ 그런데 그 애가 허탈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럴 만도 하지. 힘든 얘기 꺼냈는데 고작 반응이 이거라니. 나 자신의 볍신미를 절감하는 순간, 각성이 왔는지 대뜸 이런 말이 나오더라. “그런데 너라면. 절대 짝사랑만 하다 말진 않았을 것 같은데.” 역시... 아픔보다 창피함보다 무서움보다 더 큰 게 그 애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 애라면 무슨 액션이라도 했을 것 같았어. 무조건. 절대로 그랬을 거란 확신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애답지 않게 다시 입을 꾹 닫는 거야.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나? 싶어서.. 좀 친해졌다고 내가 너무 나댔나 싶어가지고 또 좀 주눅 들어 있는데 그 애가 김밥 하나 남은 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러더라. “아무것도 못했어.” 헐. 너무 의외잖아. 고백은커녕 아무것도라니. 난 좀 흥분했어. “왜에? 왜?”라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왜를 진짜진짜 진심으로 외쳤어. 그랬더니 그 애가 그러는 거야. “맨 입으로는 말 못한다.” 그러더니 1초 있다가 “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겠네. 이렇게 실컷 먹었으니.” ㅎㅎ 하... 내가 하도 발휘를 못하니까 이 애가 발휘해주더라고. 능청스러움을. 덕분에 엄청 긴장해 있던 게 좀 풀렸지. 겨우 얼굴 근육이 풀어져서 나도 그 애처럼 조금 웃음기를 띌 수 있었는데, 그때 대답해주더라. “친구가 좋아했어.”라고. ..... 갑작스러운 말이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그다음 말을 들으니까 알 것 같았어. “좋아한 건 내가 먼저였던 것 같은데. 녀석이 나한테 먼저 고백을 해버리더라고. 그 애 좋아한다고.” 헐... 이 무슨. ㅜㅜ 그러니까 짝사랑녀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러기도 전에 친구가 먼저 자기한테 그 짝사랑녀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렸단 거지? 그래서 아무것도... 못했단 거라고? 납득이 되면서도 안 됐어. “그럼 뺏긴 거야? 아니아니, 양보한 거야?”라고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어. 그 애라서 납득이 되기도 했고, 또 그 애라서 납득이 안 되기도 했어. 원하는 건 언제나 자기 노력으로 얻어내는, 그런 인상이 강해서. 단지 그 이유로 그렇게 아무것도 못해버렸다는 게 이해가 안 되면서도 정말 친한 친구라면, 죽마고우라면... 그 친구한테 상처 주기 싫어서라도 자기 사심 같은 거 그냥 넣어둘 수도 있을 애 같아서. 그런데 그 애가 그러는 거야. “양보가 어딨어. 빼앗는 게 어딨고. 물건도 아닌데.”라고. 난 다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지. 나도 여자면서 그런 생각 못하고 나오는 대로 막 말해버린 게 부끄러웠다. “미안해...” 뭘 사과하는지도 모르게 사과하고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어. “그냥. 여기까지만 할란다.” 그 애도 부끄러웠던 걸까.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못했던 자신이? 아니면 역시 너무 힘든 이야기였던 걸까. 그만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응, 그래.”라고. 더 이상 캤다가는 나도 감당 못할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어. 조금 남은 쫄면은 이제 불어가고 있었고 김밥은 언제 다 먹었는지 없었어. “가자.” 하고 일어서는 그 애 뒤를 총총 따라가는데 카운터 앞에서 문득 멈춰 서더니 아주머니한테 이래. “계산은, 이 친구가 할 겁니다.”라고. ㅎㅎ 너무나 당당하게 중요한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투로 말야. 그 덕에 좀 유쾌한 기분으로 카드 계산하고 나오려는데. 그 애가 문 잡아주더라. 그런데 정작 나가려고 하니까 몸으로 입구 막더니 이러는 거야. “너 바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