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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6년동안 아프면서 내가 겪은 것들

Biglove |2018.11.21 03:17
조회 73,989 |추천 727

+다섯분정도만 이야기를 나눠주셔도 참 힘이 되겠다 했는데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또 본인의 이야기를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스스로 토닥토닥해주고 있어요. 엄마가 열흘넘게 입원하시면서 저도 같이 병원생활을하느라 제 생활도 같이 멈춰져서 힘들고 우울해지더라구요. 어제 퇴원하셔서 당분간 병원에서 잘일은 없겠어요!!ㅎ 몇년이 흐르고 엄마가 건강해지시던, 그렇지 않아도, 제가 어떻게 살아가고있는지 후기를 남길게요. 위인전에 나올법한 인물은 못될 것 같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진심어린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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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투데이 5인 지극히 개인적인 블로그외에 온라인상에 제 가정사를 공개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과 공감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글을 올려봅니다. 쓰다보니 많이 기네요. 마음 있으신 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양한 연령대가 보는 게시판이라고 생각해서 결시친에 올립니다. 방탈죄송합니다!


제목 그대로이다. 우리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때 백혈병진단을 받았고 1년간 항암치료를 받고 골수이식을 받아 백혈병은 완치 되었지만 숙주반응이라는 무시무시한 종합병을 앓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외부로부터온 피가 원래 몸에 적응하지 못하면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엄마는 숙주반응 때문에 항암치료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고통 받으며 살게 된다.

나는 석식을 먹다가 아빠한테 전화를 받아서 집으로 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인 것 같았지만 큰 걱정은 안했다. 엄마는 일이주 정도 몸살인 것 같다며 누워있었고 큰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으라는 동네 병원 말에 큰병원에 가서 검진을 했다. 급성림프백혈병으로 판명되었고 나와 동생들은 엄마가 백혈병이라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 사실 실감도 안나고 백혈병은 막장드라마에서만 나오던 병이라 현실감이 제로였다. 엄마는 곧바로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고 머리도 삭발하고 얼굴은 팅팅 붓고. 엄마는 강한 사람이라 잘 이겨냈다. 나는 학생이었기에 공부를 하고 대학입시 준비를 하고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고삼때 기억이 없다. 친구문제도 힘들었고 집 사정도 힘들고 도서관 다니며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수능은 잘 못봤다. 어쨌든 내가 가고 싶던 계열에 학과를 들어갔다.

처음에 엄마의 숙주반응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청소 요리같은 집안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걸어다닐 수도 있고 빨래개기 같은 간단한 일은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숙주반응으로 폐기능이 굉장히 저하되어 숨쉬는 것을 힘들어 했다.

나는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어서 휴학을 했다. 돈을 모아야 했는데 애버랜드나 또래를 많이 만날 수 있는 스파브랜드 같은 곳에서 일해보고 싶었지만 내가 사는 곳은 시골이었고 아픈 엄마도 걸리고 집안일도 걸렸다. 그래서 집 근처 복지센터 같은 곳에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청소나 상담 관리 정도의 일을 했다. 온전히 집안 탓만은 아니고 쉬운 일이기에 틈틈히 영어공부와 자격증 공부를 할 요령이기도 했다. 일은 할게 없다 싶을 정도로 쉬웠지만 오전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누군가가 찾아오는 일도 거의 없고 나는 스무살이었기에 그상황이 더욱 우울했다. 대학 잘 간 친구들에 대해 혼자 열등감을 심히 느끼던 시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점심시간에 집으로가 엄마 밥을 챙겨줬다. 그리고 외국 갈 생각으로 참았다.

집은 나에게 참 힘든 공간이었다. 엄마가 아프기 전에 동생문제 때문에 힘들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집에 큰 문제가 있는건 아니지만 화목하지 않고 적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엄마가 아프고 난 후 나는 집이 더 힘들었다. 그래서 외국으로 간건 도피이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는 내 결정을 지지해주셨고 나는 워홀을 갔다. 아픈 엄마와 일하고 집안일 하는 아빠를 나몰라라 하고 떠난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사실 참 자유롭게 느껴졌다. 어린나이에 낯선 땅에 혼자 살아내는게 참 힘들었지만 버텼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중간에 내 건강도 그렇고 엄마도 몸이 더 안좋아져서 한국에 들어갔다. 엄마는 생각보다 몸이 더 안좋았다. 한국에 있는 동안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한편으로는 다시 외국으로 가지 못할까바 무서웠다. 어쨌든 나는 다시 외국으로 돌아갔고 학원을 다니며 친구도 사귀고 일을 하며 여행가기 위해 돈을 모았다.

모든 표는 저가항공으로 프로모션 기간에 미리 예약을 해두고 하루하루 여행계획을 세우는게 내 낙이었다. 외국생활에도 많이 지쳐있었고 여행만 바라보며 정말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살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표까지 모두 예매해둔 나는 여행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2주전 한밤중 가족은 물론 친척들한테 연락이 왔다. 엄마가 매우 위급하다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생과사를 오가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죽을까봐도 무서웠고 내 여행을 가지 못할까봐도 무서웠다. 1년동안 엄마를 보지 못했는데 그대로 떠나보낼까바 무서웠고 내가 한푼한푼 모아서 준비한 이 여행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일까봐 무서웠고 포기가 원망이 될까봐 무서웠다.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채로 울고 기도했다. 환불불가 원칙의 저가 항공이었기에 나는 백만원도 넘는 모든 비행기표를 그냥 날려야했다. 그당시 내게는 참 큰돈이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엄마에게 가는 것으로 결정하고 다다음날 비행기표 구매해 디파짓도 못받고 귀국했다. 나는 한국에오면 내가 도와야할 많은 일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여행은 버텨내야할 나에게 주는 선물의 의미였는데 그래서 더 슬펐다.

서프라이즈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고 아빠에게 병실을 물어 그 큰 캐리어까지 끌고 몰래 찾아가 ‘엄마’하고 불렀는데 엄마가 꿈을 꾸듯이 정말 환한 미소로 날 반겨주는데 백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엄마는 정말 꿈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엄마 병실에서 퇴원할때까지 간호를 했다. 엄마는 산소호흡기를 달았고 산소줄 없이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엄마는 밥을 잘 먹지도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150중반대에 엄마는 32kg이었고 앙상했고 삐쩍마르고 부는 바람에도 부르르 떨리는 아기새같았다. 엄마도 사람이기에 우울해졌고 울고 기력이 쇠했다. 나는 절망하는 엄마, 힘들어서 잘 울지도 못하는 엄마, 절규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같이 울기도 방안에 들어가서 울기도 때로는 무시하기도 했다. 엄마가 많이 아플때는 걸을 힘도 없어서 침대에 누워서만 생활했다. 나는 엄마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대소변이 담긴 기저귀를 갈았다.

나는 학교로 바로 복학하지 않고 엄마를 돌봐야했다.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한 전날이던지 내가 다시금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계획을 실천하고 있는 날중에 병세가 심각해져 입원을 해야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때는 정말 절망스러웠고 내 삶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엄마는 폐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이산화탄소 배출도 어렵다. 산소는 떨어지고 이산화탄소가 가득 쌓여서 구급차에 실려간적도 여러번이다. 정말 엄마가 죽을뻔 한적도 있었는데 나는 엄마와 앰뷸런스를 타고 대학병원을 갔다. 구급차는 얼마나 빠르고 또 시끄러운지 이송되다 죽는 줄 알았다. 도착하자마자 의사들은 엄마의 옷을 다 벗기고 응급처치를 하고 드라마에서 보던 자동심장충격기와 cpr을 했다. 의사는 3시간 남은 것 같다며 부르고 싶은 사람을 부르라고 했지만 나는 왠지 엄마가 살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엄마는 예전부터 기도삭관은 거부했기에 이산화탄소빼는 기계만 착용하고 정신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나는 엄마 옆에서 카운트를 세며 호흡을 도왔다. 내가 멈추면 엄마가 숨쉬는 것을 멈출 것 같아서 목이 쉴때까지 했다.

엄마는 결국 깨어났고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이 차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자신이 이미 죽은줄 알고 자꾸 헛소리도 했지만 아빠와 우리를 많이 사랑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가 치매환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재밌었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다시 3일을 넘기기 힘들것 같다고 했고 나는 역시 엄마가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3일째가 되는 일요일 열두시가 지나자 나는 너무 기뻤다. 의사선생님에게 우리 엄마 안죽었다는 자랑을 했다.

그 이후 엄마는 긍정적으로 변화되었고 신앙심도 깊어지고 믿음도 단단해졌다. 나는 복학을 하고 몇달 뒤 내 인생의 최악의 우울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집에는 내가 어릴때부터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었는데 엄마가 아프고 아빠와 내가 엄마와 할아버지밥을 챙겨야 했다. 할아버지는 늙었고 걱정도 많았고 마음도 많이 약해져서 기력도 없고 죽어야지라는 말을 많이했다. 나는 한쪽에는 무기력한 노인, 한쪽에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아픈 엄마, 한쪽에는 지쳐보이는 아빠와 정신과 상담을 같이 가줘야하는 동생까지 많은 부담에 짓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멋지게 성공시키고 싶은 욕구가 굉장히 높았고 어느순간부터 불안했고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더 어려운 상황도 많은데 왜 이겨내고 멋지게 살지 못할까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학교도 더이상 다니지 못했다.

나의 우울했던 나날들의 이야기는 각설한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누워서 불안에 떨기만 했는데 그때 엄마가 참 많은 위로가 되주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소중한 존재이고 너에게 이런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것 뿐이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나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우울한 나를 덮어버리고 일반 사람들처럼 살려고 노력했고 끊임없이 밀려와서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넣던 생각과 부담감들을 지우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다시 조금씩 밝아지고 당당하고 매력있는 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취준생으로 면접준비랑 영어공부를 하는데 엄마가 또 입원해버렸고 나는 간의 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지쳐서 퉁명스럽게 심부름을 한다. 직업 특성상 면접 날짜가 언제 잡힐지도 불안정해서 대기 시간이 길어지며 나의 의욕도 저하되고 있다. 많은 취업공고를 보는데 전문지식도 없고 졸업장도 없는 나를 누가뽑아줄가 싶기도 하고 자기소개서에 구구절절한 내 사연을 적어보낼 수도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길 선택한 것인데 사회적으로는 참 볼품없이 느껴져서 내가 작아진다. 다시 작년에 우울했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부족한걸 인정하고 용기를 내서 부딪히자.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으니 사람을 너무 직업과 학벌과 돈과 외형으로만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회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과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장 듣기 힘든말이 어른들이 하는 “엄마가 니가 있어서/도와줘서 참 다행이다/힘이 되겠다”였다.
대견의 의미겠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부담감과 책임과 위선을 느끼게 한다. 만약 주변에 저런 상황에 처한 친구가 있다면 저런 말보다는 “잘하고 있는거야 걱정마.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야. 네가 멋지고 존경스러워.” 나 아니면 사실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현금을 쥐어주는게 가장 좋을 것 같다.


친한 사람들이 보면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최대한 둘러 써봤는데 그냥 한풀이니까 알아도 모른척 해주면 좋겠고 혹시나 다른곳에 퍼가거나 하지는 말아주세요! 엄마가 보면 슬픕니다.

길고 긴 제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미우나 고우나 소중한 가족 사랑하고 우리 희망 잃지 말고 살아요.

+아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어서 오해하실까봐 적습니다. 우리집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엄마를 위해, 가정을 위해 노력하시구요! 다시한번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추천수727
반대수13
베플ㅠㅠ|2018.11.21 09:26
고생했어. 내가 뭐 별건아니지만 정말 맛있는 밥 한번 사주고싶다. 울엄마도 3년전부터 아파. 나도 나중에 후회스럽지 않게 하고는 있지만. 너만큼은 엄마에겐 하지못하고 있어. 난 무교지만 뭐든지 항상 이겨낼수있는 힘을 저에게 주세요. 라고 기도했는데. 신이 나를 과대평가하는건 아닐까 싶어. 더 원대한 기도를 할껄 그랬나도싶고. 여튼... 다 괜찮아질꺼야. 힘내자 라는 뻔한 말이라도 전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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